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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벨로:
타이를 위한 전투

2010년 5월 25일 사건이 벌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타이는 여전히 지난 5월 19일 레드셔츠들이 집결해 있던 수도 방콕의 관광중심지에서 벌어진 군대 공격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체포된 레드셔츠 지도자들과 투사들은 전쟁포로처럼 취급 당하고 있다. 하층 계급 레드셔츠의 근거지는 점령지나 마찬가지다.

타이는 내전 중이다. 그리고 내전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지난 몇 주 동안 방콕의 중간계급들은 레드셔츠가 축출된 전 총리 탁신의 통제를 받는 ‘테러리스트’라는 그들의 입장을 더욱 굳혔고, 동시에 하층 계급들은 자신이 유권자의 다수이지만 자신의 의사가 무시당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친탁신 대 반탁신이라는 단순 논리는 마오쩌둥의 말을 빌리자면 ‘타이형’ 계급 전쟁을 은폐하고 있다.

서사적 비극

8주간의 ‘방콕 코뮨’에 대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모든 서사적 비극이 그렀듯이 진실과 신화가 뒤얽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명백하다. 민간 시위대를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타이 정부의 결정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사상자들의 숫자는 여전히 늘어나고 있다. 정부 소식통은 5월 19일 가장 치열했던 충돌로 52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불을 지른 라지프라송 교차로의 거대한 센트럴월드 쇼핑몰에서 구조대가 발견한 시체 9구를 포함해 시신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최종 사망자는 훨씬 많을 것이다. 예를 들면 5월 20일 시암 스퀘어 지역의 레드셔츠 시위대 해산 작전에 참가한 한 군인은 시체 25구를 보았다고 폭로했다.

레드셔츠 지지자들은 군대의 무차별적인 총격을 비난하고 있다. 총격을 당한 6명 중에는 레드셔츠 수 천명이 피난해 있던 와트파튬 와나람 사원 근처에서 저격용 총으로 살해된 의료진 2명도 포함돼 있다.

타이 학자 피폽 우도미티퐁의 상세한 보고서를 보면, 5월 19일 공격을 감행하기 몇 일 전 레드셔츠의 주요 집결지 중에 하나인 룸피니 공원 근처에서 군대가 정당한 이유 없이 구급차를 공격하기도 했다.

레드셔츠들이 희생자를 헤아리는 동안 방콕 중간계급은 5월 19일 불에 탄 39개의 시설과 건물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방콕포스트〉는 사설에서 “방콕 시민들은 재건에 나설 것이며 공공의 선이 우리의 집과 사업을 파괴한 테러리스트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하고 주장했다.

계급전쟁

타이 언론들은 레드셔츠는 가난한 북동부지역에서 방콕에 침입해 온 하층 빈농 폭도들로 묘사하고 있다. 많은 레드셔츠들이 이것이 왜곡이라 말한다. 지난 두 달 동안 레드셔츠 시위대와 동조자들에 대한 분석을 보면 70퍼센트가 방콕과 그 주변지역에서 왔고, 30퍼센트가 북동부, 북부 그리고 다른 농촌지역에서 왔다.

군대의 진압이 시작되기 전 레드셔츠 지도부가 평화적으로 해산하자고 했을 때 이를 따르지 않고 레드셔츠 주요 근거지를 방어하며 군대의 공격에 저항했던 이들은 대부분 방콕의 하층 계급 지구인 클롱 토에이 등에서 온 청년들이었다.

이 투쟁이 마르크스의 이론 속에서만 존재하는 고전적인 형태의 계급전쟁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레드셔츠와 현 타이 정부의 대중적 기반인 옐로우셔츠 간의 투쟁이 계급투쟁적 요소가 강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택시기사들은 대부분 레드셔츠 편이다. 그리고 5월 19일 이후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정부·방콕의 부자·중간계급을 욕하고 싶어 안달이다. 방콕뿐만 아니라 타이 전역에서 레드셔츠와 그 하층계급 지지자들이 공격받고 체포와 구금을 당한 것을 볼 때, 한 택시기사의 말은 명백한 진실이다. “계엄령이 끝나면 타이에서 전에 결코 볼 수 없었던 행동들 벌어질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내렸나?

아피싯 총리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타이 거물 지배자들의 명령에 종속된 아피싯에게 누가 ‘신호’를 보냈는지 궁금해 한다. 군대는 민간인을 공격하는 것을 꺼렸다. 경찰들 중 상당수가 레드셔츠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경찰 쪽에서 허가가 떨어진 것 같지도 않다.

많은 레드셔츠 활동가들은 ‘프렘Prem’을 지목한다. ‘프렘’은 왕립추밀원의 핵심 인물인 프렘 틴술라논다 장군을 지칭하는 말이다. 어떤 레드셔츠들은 모사꾼인 그가 학살의 원흉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타이 분석가들은 많은 레드셔츠에게 ‘프렘’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다른 이들도 포함된 말이라고 지적했다.

아프다고 알려진 늙은 왕이 이번 탄압과 관련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타이에서 매우 존경 받는 정치인인 아난드 판야라춘은 맹렬히 반박한다. 그는 자신의 두 번에 걸친 총리 경험에 따르면 왕은 헌법을 준수해서 요청이 있을 때만 조언을 할 뿐이며 무엇을 할지는 정치인들에게 맡긴다고 주장했다.

또, 1992년 5월 왕은 적대적인 잠롱과 수친다를 함께 불러 국민들의 이익에 맞도록 두 사람이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며 왕은 결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 최근 비극에서 왕의 구실이 무엇이었든 혹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않았든 간에 이전에는 어렴풋한 은유적 암시 정도에 그쳤던 왕의 구실에 관한 비판적 토론이 이제는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어떻게 이 모든 일들이 벌어졌나? - 민주주의와 그 불만들

수친다 장군의 독재가 민주 정부에게 길을 비켜 준 1992년이 분석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92∼1997년 사이 선거에서 3개의 연합세력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신의 경제적, 관료적 부를 기반으로 특히 농촌지역의 표를 통제한 기성 정당 지도자들과 엘리트들이 독점하는 의회 내 세력들이었다.

도시와 농촌 지역 빈민들의 사회적 불만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의회민주주의가 인기를 잃어가는 동안 경제는 팽창했다. 방콕은 금융과 생산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시장에 편입됐다. 1985∼1995년 사이에 국민총생산은 10퍼센트씩 성장해 세계은행에 따르면 세계 최고의 성장을 기록했다.

이런 경제성장은 수치상으로는 인상적이었지만 방콕과 나머지 지역, 도시와 농촌 그리고 사회계급 사이의 점증하는 불평등을 감추고 있었다. 성장이 최고조에 올라 타이가 아시아의 다섯번째 호랑이라고 불리던 1988∼1994년 사이 총소득에서 상위 20퍼센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54퍼센트에서 57.5퍼센트로 늘었고 반면 하위 20퍼센트의 비중은 4.6퍼센트에서 4퍼센트로 하락했다. 1960년대에 농업노동자들의 수입은 다른 부문 노동자들의 수입과 비교해 6분의 1이었는데 1990년 초반이 되자 12분의 1로 떨어졌다.

한 경제학자가 말했듯이 “농촌 전체가 빈곤에 빠졌다.”

IMF와 민주주의의 위기

그런데 타이 경제가 바닥으로 떨어진 1997∼1998년 아시아 경제 위기 때 1백만의 도시 노동계급이 빈민이 됐다. 그리고 ‘세계화’가 문제에 처하고 타이 정부가 IMF로부터 자신을 선출한 국민을 보호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의회민주주의도 신뢰를 잃었다.

또한 타이 정부에 7백20억 달러를 제공하는 대가로 IMF는 정부지출 대폭 삭감, 많은 기업의 부도 선고, 외국투자 개방, 국영기업의 민영화 같은 매우 혹독한 ‘개혁’ 프로그램을 강요했다. 차오발릿 옹차이유드 정부가 이런 정책들의 추진을 주저하자 IMF는 정권교체 압력을 넣었다.

그 다음 등장한 추안 렉파이 정부는 IMF의 요구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자국 국민이 아니라 외국 기관을 위해 일하는 정부가 그 후 3년을 집권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 정부는 IMF의 수요 감소 정책들을 받아들이며 타이 경제를 침체와 스태그네이션으로 내몰았고 국민의 신뢰도 잃었다.

탁신의 두 얼굴

이런 상황에서 뛰어난 경영자이자 명망 있는 정치인, 그리고 매우 탁월한 소통능력을 가진 탁신 시나와트라가 집권했다. 비록 그는 자신이 소유한 민영 통신회사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세계화 과정에서 이익을 얻었지만 금융위기를 통해 드러난 자유시장 세계화에 대한 광범위한 두려움, 타이의 부를 독점하고 있는 농촌과 도시 지배자들과 국제금융기구를 향한 대중적 분노를 감지하고 있었다.

2001년 총리에 취임하자 탁신은 몇 가지 놀랄 만한 조처를 취했다. 그는 차관을 갚아 버리고 IMF를 타이에서 몰아냈다. 전국민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해 미화로 1달러만 내면 누구나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했다. 농가 부채 지불을 유예하고, 모든 마을에 백만바트 기금을 만들어 마을 주민들이 원하는 곳에 투자할 수 있게 했다. 덕분에 탁신은 타이의 빈민과 비주류,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집단에서 엄청난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와 농촌의 빈민들이 무시하는 탁신의 다른 측면도 있다. 억만장자인 탁신은 말 그대로 의회 안에 그의 정치적 동맹들을 돈으로 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영향력 있지만 자신에 충성하는 정치적 기반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과 친구들의 축재를 도왔다.

탁신은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지 않았다. 탁신이 선거를 통한 우위에 기반해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던 바로 그 시점인 2006년 1월, 그의 가족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통신재벌 신코퍼레이션의 주식을 10억 8천7백만 달러에 싱가포르 국영기업인 테마섹에 팔았다. 이 거래 이전에 탁신은 국세청에 개입해 그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도록 조처해 뒀다.

화가 난 방콕 중간계급이 거리로 나와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타이 정치지형을 새롭게 바꾸려는 탁신의 시도에 치명적 위협을 느낀 타이의 기성 정치인들도 반부패 투쟁에 나섰다. 선거를 통해서도 탁신을 이길 수 없고 그를 권력에서 몰아내기 위한 거리 투쟁에도 충분한 대중을 확보하지 못하자 기성 정치인들은 2006년 9월 군부로 하여금 탁신을 몰아내도록 했다.

쿠데타와 계속되는 위기

군부는 탁신 지지세력의 저항과 자신들의 실수 때문에 타이를 안정화하는 데 실패했고 어쩔 수 없이 군부 직접 통치를 그만둬야 했다. 쿠데타 세력의 지원을 받은 정부가 집권한 상황에서 치뤄진 선거에서 두 개의 친 탁신 정당 연합이 권력을 획득했다.

선거결과에 실망한 지배-중간계급 연합은 직접행동을 호소했고 그중 가장 악명이 높았던 행동은 반탁신 옐로우셔츠들이 2008년 12월 수바르납후미 신국제공항을 점거한 것이다. 동시에 친탁신 정당을 해산시키기 위한 사법적 조처들이 취해졌다. 또, 압력을 행사해 일부 친탁신 정당 의원들이 아피싯의 민주당이 주도하는 새로운 연합에 가입하도록 했다.

이때가 되자 탁신 지지자들은 옐로우셔츠들처럼 거리에서 실력을 행사해야만 타이의 다수파로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파타야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담을 취소시키고 일부 국가 정상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쳐야 했던 2009년 봄의 가두 투쟁은 아피싯의 퇴진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올해 5월 중순에 시작된 레드셔츠 투쟁의 밑거름이 된 리허설이었다.

승리가 목전에?

많은 타이 전문가는 2주 전 레드셔츠가 아피싯에게 9월 의회 해산과 11월 선거 실시가 포함된 타협안을 이끌어 냈을 때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아피싯 정부는 레드셔츠 강경파가 4월 10일에 죽은 20여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정부 인사들을 처벌하라는 새로운 요구를 내놓아 타협안을 파기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레드셔츠 지도부는 정부가 서둘러 타협안을 철회하고 협상을 종결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타협안은 단지 정부가 군사진압을 준비할 시간을 벌려고 사용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확실한 것은 레드셔츠 지도부의 항복과 레드셔츠 수천 명의 귀향이 레드셔츠 운동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 레드셔츠 지지 학자는 [쿠데타와 현 정부에] 불만인 군인, 경찰 그리고 정부 공무원들이 이번 투쟁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으며 다음 투쟁을 위한 지하 조직 건설에 착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된 동력은 민중 스스로 만들어 낼 것이다. 타이는 결코 이전과 똑같지 않을 것이다.

한 택시기사는 지금 상황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방콕의 부자들은 우리가 멍청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하고 민주적 선택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안다. 그들은 탁신이 썩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위한 정책을 폈다. 방콕의 부자들과 중간계급은 우리를 적으로 본다. 만약 그들이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야 될 것이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더 큰 시작을 위한 끝일 뿐이다.”

출처: Foreign Policy in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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