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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혐오증은 왜 나타났는가?

저술가이자 활동가인 타리크 알리가 7월 초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주최한 맑시즘 대회에서 ‘이슬람 혐오증의 위험성’을 주제로 연설한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병한 지금, 전쟁 정당화의 주된 논거 중 하나인 ‘이슬람 혐오증’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해 싣는다.

“우리는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30~40년 전에 누군가가 이슬람이나 종교가 토론해야 할 중요한 쟁점이라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웃었을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냉전기 동안 제국주의 나라들(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자신의 적에 맞서는 필수적 방어벽으로서 정치적 이슬람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칭 ‘이슬람적’ 조직들을 이용해 자신의 적을 공격했다. 미국은 중동의 세속적 민족주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남아시아(주로 파키스탄, 유일한 사례는 아니지만)의 급진화 물결에 맞서 이슬람 조직들을 이용했다.

타리크 알리는 작가이자 방송인, 좌파 활동가이다. 타리크 알리의 주요저서 중 《근본주의의 충돌》 (이토), 《1969》 (삼인)과 이슬람 소설 3부작 《술탄 살라딘》 (미래인)과 《석류나무 그늘 아래》 (미래인) 등이 국내에 번역돼 있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 이슬람 혐오증은 주로 서방 세계에서 새롭게 적을 만들면서 인위적으로 창조된 것이다.

이슬람 혐오증은 진실을 알 만한 고위층 인사들과 이슬람 혐오증을 이주자를 반대하는 데 이용하는 극우파들이 창조한 것이다.

이슬람 혐오증의 양상은 다양하고 우리는 다양한 측면에서 그것에 도전해야 한다.

무슬림들에 반대하는 이른바 ‘대중’ 여론 문제부터 살펴보자. 내 생각에 이 정서는 근본주의나 ‘이슬람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 오히려 다른 문화 출신의 사람들, 특히 제2차세계대전 뒤 유럽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대하는 적대감과 관계있다.

이주자들에 반대하는 주장들은 20세기의 첫 50년 동안 유대인에 반대해 이용된 주장과 상당히 닮았다. 그들은 우리와 같지 않다, 그들은 다른 문화 출신이다, 그들은 종교가 다르다, 그들은 안식일이 다르다,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들은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는다는 주장 말이다.

오늘날에는 무슬림에 반대해서 매우 유사한 주장이 이용된다. 그들은 우리와 같지 않다, 그들은 ‘타인’이다.

테러리즘

반복해서 제기되는 쟁점은 테러리즘이다. 나는 최근에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영국에서 이런 생각이 얼마나 깊이 자리 잡았는지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1퍼센트는 ‘무슬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맨 처음 떠오르는 단어가 ‘테러리스트’라고 답했다. 이런 여론조사는 결코 신뢰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이런 여론조사가 1920년대나 1930년대에 실시됐다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유대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맨 처음 생각나는 단어가 ‘볼셰비키’라고 답했을 것이다. 오늘날은 ‘유대인 볼셰비키’가 아니라 ‘무슬림 테러리스트’라는 점만 다르다.

평범한 유대인이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볼셰비키이거나 백만장자이거나, 둘 중 하나로 여겨졌다.

우리는 무슬림에 관해서도 같은 주장이 제기되는 것을 종종 듣는다. 무슬림은 런던 사교클럽의 카지노에서 도박하며 자기 나라의 국부를 진하는 부유한 아랍 왕자이거나(분명히 이런 경우는 있겠지만) ‘무슬림 테러리스트’다.

세계의 모든 집단처럼 무슬림 지역 출신자들 중에서는 이 양극단 사이에 서로 크게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포진해 있다. 무슬림 지역 출신자이더라도 신앙인도 있고 비신앙인도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문화적 형태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종교적이지 않으면서도 히잡을 착용하는 많은 젊은 여성과 대화해 봤다. 그들은 착용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서 히잡을 착용한다. 특히 프랑스에서 그런 경우가 많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에 관해 서유럽인들이 어떤 내용의 교육을 받는지 생각해 보라.

그런 교육은 뇌리에 깊이 각인돼, 심지어 일부 어리석은 정치인들 예컨대 토니 블레어는 제2차세계대전이 ‘유대인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이 말에 담긴 무지함과 냉소는 엄청나다. 제2차세계대전이 유대인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면, 그 전쟁에서 우리는 졌다.

그들은 유대인을 구하지 못했다. 유대인들이 폭격을 요청했는데도 그들은 단 한 곳의 강제수용소에도 폭격기를 보내지 않았다. 독일의 파괴라는 주요 임무에서 폭격기를 이탈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배우는 내용은 너무 피상적이어서 반유대주의의 기원은 토론도 되지 않는다. 그런 교육이 있다면 사람들이 다른 소수자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의 문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교육은 명백히 없었다.

이슬람은 유럽 역사와 관계없는 종교나 문화가 아니다. 내가 쓴 《이슬람 5중주》는 유럽 문화에서 이슬람이 정상적이고 중요한 일부였고 지적으로 대단히 발달한 문화였음을 보여 주는 역사 소설이다.

15~16세기에 이베리아 반도[현재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축출되면서 유럽에서 새로운 정체성이 창조됐다. 오늘날 이 정체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자리를 구해 이주하는 무슬림들(주로는 과거 서방 강대국들의 식민지였던 나라 출신)의 새로운 유입에 의해 도전 받고 있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이슬람을 쉴 새 없이 비방하는데, 이에 저항해야 한다. 한때 좌파였던 사람들 중 일부는 국제 엠네스티가 관타나모 수용소의 정치수를 방어하는 점을 비판하면서, 정치수들이 여성주의에 옳지 않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설사 그렇더라도 그래서? 논쟁하면 될 것 아닌가? 정치수들에게 관타나모에서 자신들에게 벌어진 일을 밝힐 기회조차 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예컨대 많은 독일 녹색당원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여성 해방이 목표였기에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히틀러에게서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는 전쟁이 아니었듯이,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여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과 상관이 없었고 오히려 서방의 이익을 지키고 방어하려는 것이었다.

나라마다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유럽의 상황은 알고 있다. 독일은 이주자들을 ‘손님 노동자’라고 부른다. 이 말은 괜히 쓰는 것이 아니다. 손님이라면 언제든 떠날 것을 요구받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 이주민들은 프랑스 시민의 권리를 모두 보장받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일자리를 구할 때는 차별받는다.

공격

프랑스에서 경찰이 이주자들을 공격하거나 죽일 때, 프랑스에 잘 통합된 젊은 이주민들은 다른 프랑스인들이 억압당할 때 하는 행동을 따라한다. 그들은 재산을 공격하고 바리케이드를 쌓고 스스로를 방어한다. 프랑스 역사는 이런 것을 빼고 논할 수 없다.

미국은 이주자의 나라다. 미국에는 두 새로운 이주민 집단이 있다. 그러나 이슬람 혐오증은 9·11 후에 크게 강해졌다.

FBI는 이주민 사회에 첩자를 심어 이주자들을 늘 감시한다. 젊은 이주민들은 툭하면 검문을 당한다. 이 모든 것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똑같은 일이 영국에서도 벌어진다.

영국에서는 의회에도 무슬림이 있고 좌파 단체에도 무슬림이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구분되지 않는 거대한 블록을 구성한다는 관념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

2005년 6월 런던 폭탄 테러 후에 우리는 ‘이슬람, 이슬람, 이슬람, 이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신노동당의 네오콘 추종자들은 이슬람에 폭력이 내재해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테러가 난 바로 다음날에 테러를 옹호할 수는 없지만, 테러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그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테러의 원인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을 돕기로 결정한 블레어의 외교 정책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영국과 미국의 모든 정보 기관도 보고서에서 비슷한 지적을 한다.

이슬람 혐오증은 정부 당국자들에게 유용하다. 국민들을 계속 불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혐오증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행되는 잔혹한 행동들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수감자들이 말하듯 관타나모 수용소의 상황도 끔찍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카불 외곽에 있는 바그람 감옥에서는 훨씬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이슬람 혐오증은 다음과 같이 정당화한다. 이슬람 혐오증은 끔찍하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그리 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당신도 무슬림이 어떤 자들인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주류 언론들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꽤나 공개적으로 이용한다. 미국의 전쟁과 점령, 그리고 유럽의 지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버락 오바마는 전 세계에서 부시의 정책을 계속 따라하고 있다.

이슬람 혐오증이 영원히 유지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슬람 혐오증은 위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고 적절한 때가 오면 다시 사라질 것이다.

이슬람 혐오증은 현재 미국이 중동의 넓은 지역을 점령하고 있다는 점에 정치적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나라들을 점령하려면 이슬람 혐오증이 필요하다. 미국에게는 ‘테러와의 전쟁’이 ‘악’에 맞선 전쟁이라는 생각이 필요하다.

이슬람 혐오증을 비판할 때, 우리 사회주의자는 이슬람 혐오증만 비판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임무도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는 비합리적이고,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위기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설득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굴복한 것이 재앙이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것이 낳은 공백에서 다양한 경향들이 자라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심은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공장, 농장, 마을, 지역, 나라 등 모든 수준에서 대중이 진정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사회를 바란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회주의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통해서만 옛 사회의 낡은 것들이 일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제를 심화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근본주의의 충돌》(타리크 알리, 미토)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