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신을 옹호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의 무신론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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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관한 현재의 논쟁에 큰 도움이 되는 이 책에서 테리 이글턴은 두 가지 핵심 목적을 갖고 있다. 하나는 이른바 신
이글턴은 디치킨스 류의 주장에서 두 가지 주된 약점을 꼬집어낸다. 첫째, 디치킨스가 종교를 단지 잘못된 과학적 설명
둘째, 디치킨스는 종교를 모종의 초
이글턴의 또 다른 목적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올바르게도 이슬람보다는 기독교에 초점을 맞추는 이글턴은 기독교가 제도화되고 권력에 포섭됨에 따라 초창기의 급진성을 잃었다고 주장하면서 이 과정을 마르크스주의가 스탈린주의로 타락한 것에 비유한다
기독교가 원래는 혁명적인 교리였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문제는 기독교의 타락이 필연이었는가 우연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글턴은 우연이라고 보는 듯한데, 사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비교가 부적절해지는 것은 이 대목에서부터다.
마르크스주의가 스탈린주의로 변질된 것이 필연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던 여러 가지 정치적 사건들의 결과였다.
반면 기독교가 종교로서 살아남으려면 존재와 의식 간의 모순을 반영해야만 했고, 그 결과 사도 바울이 말한 “세속의 권세”와 타협해야 했다. 비록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꼭 로마 제국 후기의 기독교와 똑같은 형태로 변질될 것이라는 필연은 없었지만 말이다.
종교 때리기
《신을 옹호하다》는 이글턴의 강연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이 책의 장점이자 약점이다. 대부분의 강단 사회주의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이글턴만의 강연 스타일을 재현해 준다는 점에서는 분명 장점이다.
그러나 이글턴 특유의 인상주의적 스타일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는 약점이다. 그의 글과 말은 항상 지적이고 재치가 있지만, 때로는 주제의 깊이에 비해 너무 산만하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 서두에서 그가 던지는 질문을 다루는 데서 그렇다. 그 질문이란 이것이다. “나 자신까지 포함해서 전혀 그럴 법하지 않은 사람들이 갑자기 하느님을 들먹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글턴은 종교가 일정 정도 부활한 이유에 대해서는 명쾌하다. 어느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경제적 자유주의가 사회를 황폐하게 만들면 소외된 집단들 중 일부는 배타적 정체성이나 단호한 원칙에 집착함으로써 불안감을 달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글턴은 디치킨스로 대표되는 전투적 무신론이 득세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덜 명확하다. 내 생각에 현대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무신론적이라는 이글턴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이는 어째서 종교 때리기가 근래에 그토록 극성스러워졌는지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아마도 부분적인 이유는 왕년의 급진주의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체제에 포섭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판적 지식인 행세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 지식인으로 행세하고 싶은 자들에게 종교는 안전한 표적이니 말이다. 이글턴의 말마따나, “히친스, 도킨스, 마틴 에이미스, 살만 루슈디, 이언 매큐언 같은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의 전도사들은 급진 이슬람의 해악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세계 자본주의의 해악에 관해서는 놀라우리만치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 때리기가 기승을 부리게 된 결정적 이유는 이글턴이 “고도로 개명된 유형의 문화적 우월주의”를 논하면서 잠깐 언급한 바로 그 이유다. “인종을 가지고 타인을 열등하다고 낙인찍는 일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대신 종교를 빌미로 삼아 바깥의 어둠 속으로 밀어내는 방법이 사용된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글턴이 이 책에서 올바르게도 비판 대상으로 삼는 많은 사람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몇 가지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시의적절하고 흡입력 있는 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