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출간됐다.《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이하 《다윈》)에서 저자인 최종덕 교수는 진화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역사, 생물학, 의학, 동아시아철학 학자들과 대담하고 그 내용을 책으로 엮어 냈다.

진화심리학자 전중환 교수는 트위터를 통해 《다윈》에 대해 “사소한 사실도 아니고 책 전체의 핵심 논증부터 틀”렸다고 일갈한다. 진화론에 대한 토론은 빈번하게 이념 논쟁으로 확산된다. 생물학자인 장대익 교수는 이 책의 서평에서 “진화론 논쟁이 이념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너무 많이 봐 와서 그런지 이젠 좀 그런 비판에 무덤덤해지는 것 같아요” 라며 다윈주의 ‘좌파’의 비판에 담담하려 노력한다.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최종덕, 휴머니스트

그러나 그가 쓴 서평은 이 책을 흠집내기 위해 몇몇 사실들을 나열하고 다윈의 ‘입’을 빌어 다윈주의 ‘좌파’의 논리를 반박하지만 그 설득력이 부족하다.

장 교수의 반응과 다르게, 한국 사회에서는 우생학,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등에 대한 대중적인 토론이 부족했다. 20세기에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깊이 고민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 둘이 있었다. 하나는 물리학자들의 핵무기 개발이고 또 하나는 생물학자들의 우생학 발전이다. 미국의 생물학자 존 벡위드는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과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사회적 논쟁이 진행된 적이 있지만, 우생학과 관련한 대중적 논의는 없었다고 반성한 바 있다.

유전자 결정론과 사회 생물학 등을 비판하는 《다윈》은 진화론을 이해하고 생물학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대담의 상대방에 따라 다소 불균등하다. 특히 이 책의 대담자들이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진화론 이해를 왜곡하는 부분이 많아 서평자의 의견을 덧붙이고 싶다.

역사

《다윈》은 역사학자와의 대화로 시작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한 시대)의 산물이다. 빅토리아 시대는 기독교가 삶의 규범으로 정착됐고 과학기술의 진보가 곧 삶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종의 기원》(1859)은 맬서스의 《인구론》(1798)과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1830)를 사상적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은 실체론(현상과 작용의 뒤에 실체가 있다는 이론)적인 형이상학을 버리고 ‘변화’라는 것을 역사적 기준으로 놓았다. 다윈은 생명종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관념에 도전했다. 그래서 다윈의 진화론은 목적 지향적인 생명관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진화의 목적을 설정하거나 그 결과를 예측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종의 기원》은 빅토리아 시대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했던 발전의 맥락(경쟁 논리)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자본축적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역전시켰다. 한편으로 《종의 기원》에는 생존경쟁 논리와 더불어 공존의 논리도 있다. 자연에는 다양한 생명종이 공존한다는 점도 중요한 점이다.

다윈의 이론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으로 발전한다.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적자생존이 제국주의 시대에 약육강식론으로 해석된 것이다. 사회진화론은 미국에서 선주민을 식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됐고 아시아에서는 식민지 국가들의 부국강병론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사회진화론이 제국주의와 나치의 인종청소와 결합됐다[1]. 식민지 조선에서도 좌우를 포괄해 명망가들이 조선우생협회를 구성해 활동했고, 이 협회 발행인은 해방 후 보건부장관을 역임하였으며 현재의 모자보건법에는 우생학의 흔적이 남아 있다[2]. 혈액형 성격학에도 우생학의 영향이 있다[3].

최종덕 교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진화생물학이 사회생물학으로 일부 변질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생물학으로부터 진화론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것은 진화론의 핵심 개념인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윈》에서 최종덕 교수와 대담한 임지현 교수는 다윈의 자연 생존 경쟁과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의 역사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에게서 다윈의 ‘경쟁’은 인간 사회 계급 간 경쟁으로 치환된다고 본다. 그리고 임 교수는 마르크스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역사의 진보로 정당화했다고 왜곡한다. 임 교수는 서발턴 연구를 수용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서양의 엘리트주의 이론이라고 본다.

임 교수의 왜곡과 달리, 마르크스는 인도에 들어온 최신 시설들도 평범한 인도인들의 투쟁이 없다면 그들을 위해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 경고하며, 식민지 토착민들의 민족해방 투쟁을 지지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식민지 토착민들의 투쟁이 식민모국의 투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 착목했다.

한편 서발턴 연구그룹은 제3세계 민족 억압에 맞선 투쟁에서 착취와 억압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4]. 인종차별과 억압에 대한 공통의 경험 자체만으로는 결코 억압에 맞선 투쟁이 성공할 수 없다. 인종 억압의 문제는 계급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혼란한 생각은 문화가 사람들을 단결시킬 수도 있지만 또한 분열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임지현 교수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이어서 변화한다는 것을 잘 설명한다. 그럼에도 민족주의 이해에서는 현실에 발딛지 못하는 현학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의 민족주의와 이승만의 우파 민족주의를 아예 구별하지 않고 있다. 그는 1930년대 민족주의자들이 우생학을 수용한 오류를 보지만 그들의 반제국주의 저항에 담긴 식민지 민중의 독립 열망을 읽지 못하고 있다.

임 교수는 모순된 의식을 갖고 있는 피억압자들의 저항을 이데올로기의 순수성으로만 해석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래서 “민족해방이나 민족운동, 저항민족주의가 사실은 서구에서 만들어낸 제국의 법칙을 그대로 따른 거”라고 말하고 있다[5].

《다윈》에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진화론을 잘못 이해하는 지점도 있다. 구소련의 스탈린주의[6] 과학자인 리센코의 진화론을 마르크스주의인양 소개하거나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의 ‘인간본성론’이나 개혁주의자인 카를 카우츠키의 기계적 진화론을 마르크스주의 해석이라며 왜곡하고 있다. 이는 아나키즘·스탈린주의나 사회민주주의와,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구별하지 않는 한계를 보여 준다[7].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진화론 이해

스탈린주의 리센코 학설을 비판한 사람에는 영국 마르크스주의자인 코드웰이 있다[8]. 그는 스탈린주의 교리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영국 공산당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의 저서 《유전과 발생》이 1986년에야 출판됐다. 이 저서는 생태적 변증법을 발전시키는 인상적인 시도였다. 코드웰뿐만 아니라 할데인, 레비, 호그번 등도 생태적 변증법을 발전시켰다. 오늘날 영국의 스티븐 로즈, 리차드 르원틴, 리차드 레빈스와 미국의 스티븐 제이 굴드는 마르크스와 다윈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을 계승한 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좌파이다.

카우츠키의 진화론 이해는 마르크스주의적이라기보다는 다윈주의적이었다[9]. 그는 《공산당선언》에 앞서 다윈의 《인간의 유래》를 먼저 읽었다. 그리고 후에 그는 자신의 사상적 배경과 맑스와 엥겔스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대비시켰다. “그들은 헤겔에서 출발했다. 그에 비해 나는 다윈에서 출발했다. 맑스보다 다윈이, 경제보다는 유기체의 발전이, 그리고 계급투쟁보다는 종들의 생존 투쟁이 나의 초기 사고를 사로 잡았다.” 카우츠키는 근본적 변혁을 통해 사회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견해를 폐기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점진적 변화를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화론적 사회주의론(개혁주의)를 발전시켰다.

물론 마르크스는 다윈의 진화론을 찬양했다[10]. 그는 《종의 기원》을 읽고 페르디난트 라살레에게 편지를 썼다. “처음으로 ‘우주목적론’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고 그 합리적인 의미가 경험론적으로 밝혀진 곳은 바로 이 책에서입니다.” 그가 비판했던 다윈의 유일한 약점은 다윈이 자연선택론을 발전시키면서 기독교 도덕, 자연신학, 부의 불평등과 계급의 분화를 정당화하는 맬서스주의에서 영감을 받음으로써 맬서스의 사회적 위신을 높여 줬다는 것이다[11]. 엥겔스가 다윈과 마르크스 사이에서 간파한 유사점은 엥겔스로 하여금 자연세계와 사회세계에서 모두 작동하는 보편적인 변증법적 법칙에 대한 관념을 정식화하도록 고무했다. 그럼에도 엥겔스는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는 인간 역사에서 출현한 진화와는 매우 다른 인과적 유형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그 차이는 결정적으로 인간의 능력, 즉 자신들의 행위를 의식적으로 통제하며 그리하여 자신들의 역사를 다른 종들의 역사보다 훨씬 덜 맹목적인 과정으로 만드는 인간 능력에서 기인한다.

《다윈》의 대담자들은 자본주의자들이나 유물론자들(사회주의자들)은 진보의 개념으로 진화를 파악하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자본주의자들이 진화를 목적론적 진보로 해석할지는 모르나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이와 다르다. 유물론자인 굴드나 로즈는 진화가 진보는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한다[12].

리처드 르원틴도 생명체의 진화를 진보로 볼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비슷한 조건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고, 따라서 이를 예측하거나 이 과정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오히려 다윈의 자연선택론이 진화와 진보의 양가적인(ambivalent, 이중적이거나 상반되는)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한다.

굴드는 다윈의 생존경쟁 개념에 주목한다. 생존경쟁을 통해 한 종이 다른 종을 이기고 살아남게 되면 살아남은 종에게는 예전에 사멸된 종이 가지지 못한 이점이 존재한다. 이렇게 수백, 수천 번의 과정이 반복되면, 현재 살아남은 종에는 예전에 사멸된 종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점들이 누적돼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만 다윈의 진화를 일종의 진보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화와 인간

《다윈》은 다윈의 진화론이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 후천적으로 획득한 형질이 유전될 때 진화가 일어난다는 이론)을 극복했다고 평가한다. 진화는 자연의 상태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군이 살아남아 자손을 증식하는 것(자연선택)이었다. 진화론의 기본 적응 동력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말고도 성선택(sexual selection)도 있다고 제기한다. 자연선택처럼 생존 경쟁이라는 원리뿐만 아니라 종의 번식에 더 유리하게 개체가 변화하는 메커니즘이 있다고 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자연선택뿐만 아니라 우연(예를 들어 운석 충돌 같은 대재앙과 지각 변동 등)을 통해서 진화가 급격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운석의 충돌 등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인해 그 전의 생물군이 사라지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생물군이 출현하면서 생명계의 진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주류의 진화론은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을 적응이라고 하는 데 반해 굴드와 같은 주장은 적응 외에 적응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종 존재의 발생학적 구조가 있다고 주장(단속평형설)한다.

반면 에드워드 윌슨은 개미의 집단 행동이론을 인간사회에 적용해서 도덕이나 문화 같은 개념을 설명하려 했다. 나아가 유전자의 차원에서 설명하려고 했다. 윌슨의 사회생물학은 생물학 환원론(생물학이론이나 법칙을 유전자나 개체 수준의 행동이나 법칙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비판받는다.

생물학 환원론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이타주의와 생물학적 이타주의(궁극으로 이기적 이익을 위해 이타적 행위를 한다는 주장)를 구분하지 못하고 생물학적 이타주의로 환원한다. 그리고 인간 본성에서 사회성을 전제하지 않고 있다[13].

사회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은 인간 본성조차 생물학적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이 생물체의 어느 수준(유전자, 세포, 개체, 친족, 집단)에서 작용할 것이냐에 대해서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윌슨의 사회생물학은 자연선택이 유전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처드 르원틴은 유전자 수준 진화 이론은 유전자결정론으로 이어질 수 있고, 유전자결정론이 지배층의 도구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유전자로 설명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폴 에얼릭은 인간의 유전자 수가 2만 5천 개 정도여서 인간의 온갖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유전자의 대상이 불분명해, 특정 유전자의 형질을 제어하면 나머지 형질도 제어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유전자 결정론의 한계는 체세포 내 염색체의 구조와 기능을 이해한다면 더욱 분명해진다. 처음에는 유전자 하나가 RNA를 통해 단백질 하나를 만들 것이라는 가설을 믿었는데, 이런 일대일 대응가설은 오류로 판명되고 있다. DNA 그 자체가 아니라 DNA를 통해 만들어진 단백질이 유전적 형질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 중요하다. 형질을 발현시키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단백질이다. 유전자는 단백질을 만들 뿐이었다.[14]

유전자결정론이나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신경과학의 발전으로 설득력이 떨어지고 있다. 특히 인간은 뇌의 가소성(plasticity, 뇌기능의 유연한 적응력)으로 인해 문화적·환경적 요인에 따라 후천적으로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 예컨대 뇌의 한 부분이 기능을 잃으면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다른 기능이 발달하는 사례들이 많다. 뇌의 가소성이 갖는 의미는 인간의 의식적 행위가 인간의 유전자보다 더 중요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15].

《다윈》에서는 유전자 결정론의 한계를 소개하는 대목이 또 있다. 그것은 진화도 어떤 경우에는 속도가 꽤 빠를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의 압력이 크면 클수록 단시간 내에도 변할 수 있다. 예컨대 항생제에 내성이 있는 슈퍼박테리아가 출현했고 갈라파고스제도에서 30년 만에 핀치의 부리가 변한 것이 관찰됐다. 영국 지하철역에서는 겨울에 동면을 하지 않는 새로운 모기종이 발견됐고 역마다 다른 모기 종이 관찰됐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는 농경사회 이후 엄청난 속도의 문화적 사회적 진화를 이루었다. 이것이 생물학적 진화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인간 뇌 기능의 변화와 인간 ‘속성’을 형성했을 것이다[16].

《다윈》에서 최종덕 교수와 대담한 강신익 교수는 골상학은 두개골의 모양을 보고 사람의 성격을 판단하는 운명론의 한 관습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요즘 골상학과 유사한 현상이 뇌과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뇌과학에서 뇌의 특정한 부분이 활성화되는 것을 보고 그 부분이 활성화될 때 특정한 기능을 한다는 이론이 있다. 예컨대 언어를 관장하는 브로커Broca라는 영역이 있는데, 이 부분이 말의 기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을 한다는 것은 뇌의 특정 부위의 활동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뇌과학의 자기공명영상 응용에 치중하여 자칫하면 골상학처럼 운명론으로 갈 위험이 있다.

뇌신경결정론은 DNA 결정론의 환상처럼 뇌신경세포의 운동과 기능으로 모든 사고와 행위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뇌신경세포수는 대략 1천억 개 정도이고 이런 세포들을 연결하는 시냅스의 수가 약 1백조 개 정도된다. 이런 뇌신경세포와 시냅스 활동이 뇌의 가소성을 낳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결정론적(선천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동적 평형

《다윈》의 저자 최종덕 교수는 현대 문명의 위기에 진화론은 대안일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생명은 원래 주어진 그대로를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환경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이 진화론의 핵심이다. 생명(인간)의 개방성과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출발점일 수 있다고 말한다. 생체계는 외계와 에너지와 물질교환이 이루어지는 개방계이므로 반응의 진행에 수반되는 자유에너지 감소가 뒤따르더라도 일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진화론을 의학에 적극 반영한 진화의학도 조명을 받고 있다. 《다윈》의 강신익 교수는 인간의 몸은 선사시대 수렵채집 시기에 적응돼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비만과 당뇨병 같은 성인병은 몸이 현대 문명에 맞지 않아 발생하는 결과라는 것이다.

공진화共進化는 한 생물 집단이 진화하면 이와 관련된 생물 집단도 대응해 진화하는 현상이다. 예컨대 인간이 항생제를 개발하여 박테리아에 대응하면, 박테리아도 인간의 항생제에 대응하여 진화한다. 이것이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슈퍼박테리아를 발생시킨다.

강신익 교수에 따르면 진화의학에서는 현대 의학의 치료법과 다른 진화론적 처방이 담겨 있다. 현대 의학은 기침이 나면 기침을 멈추는 약을 주고, 콧물이 나면 콧물을 멈추는 약을 처방하며, 열이 나면 해열제를 준다. 그런데 기침이나 콧물, 열의 증상은 진화 과정에서 보면 일종의 방어기전이다. 그래서 진화의학은 감기 증상인 기침이나 열도 필요한 만큼 발생한다고 이해한다. 감기의 처방이 열을 빼는 것이 아니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더 흘리게 하는 처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진화의학은 말라리아모기를 예방접종으로 박멸할 수 없기 때문에(더 독한 말라리아모기로 진화하므로) 경미한 증상만 일으키는 말라리아모기로 진화할 수 있도록 예방접종보다는 모기장과 모기 번식지 퇴치가 더 효과적이라고 처방한다.

이런 진화의학적 방안이 아프리카에 적용되어 효과가 있다는 보고가 있다. 그럼에도 진화의학을 현존 의학에 대한 전면적인 대안체제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진화의학을 기성 의학에 보완이 되는 수준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성 과학에 대한 반성으로 대안 의학이 떠오르고 있다. 한의학은 질병-치유 경험의 진화라는 핵심이 있다.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약초의 효능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 많다. 인간이 약초에 대한 지식을 누적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약에 대한 질적 진화를 이루었다. 한의학의 철학은 서양의학의 철학을 보완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대안의학이나 한의학이 신비주의나 반과적학 풍토로 빠지지 않도록 과학적인 탐구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과학과 종교, 그리고 신화

《다윈》에서 최종덕 교수와 대담한 전방욱 교수는 과학이 ‘과학’이 아니라 신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과학이 당대의 신화가 될 수 있는 이미지를 빌려와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산업혁명기에는 사람이 기계로 은유됐고, 이제는 인간을 컴퓨터나 유전자, 사이보그 등 그 시대에 맞는 이미지를 차용해 해석해왔다. 유전자결정론은 과학이 아니라 신화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 과학과 신화는 결코 낯선 두 세계가 아니다[17]. 만약 신화적 사고, 종교적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학도 없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케플러는 천문학자인 동시에 점성술사였다. 그리고 뉴턴은 연금술사였다. 보어의 경우 도교에 심취했고, 슈뢰딩거는 힌두교에 정통했다. 이 밖에도 많은 과학자들이 종교와 신화에 영향을 받았다. 이는 과학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표현을 다듬는 데 일조한다면 과학 역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의해 끊임없이 가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윈》에서 기독교인인 전방욱 교수는 과학으로서 진화론의 구실과 종교의 구실을 구분한다. 그는 과학을 공부하다 보면 인간의 왜소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과학으로서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종교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화론을 수용한다고 해서 종교를 배타적으로 여길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사회생물학자들의 일면적인 종교 비난은 대중을 설득하기 어렵다. 그런데 전투적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종교는 대중(the people)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18]. 마르크스 시대에 아편은 합법이었고, 가장 효과적인 진통제였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말을 현대식으로 의역하면 “종교는 대중의 아스피린”이라는 표현쯤이 될 것이다.

특히, 이 문구 앞뒤의 문맥을 살펴보면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한 경멸적 비난이 아니라 종교의 사회적 토대 천명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이 참된 실재를 획득하지 못했으므로 종교는 … 인간 본질의 판타지적 현실화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반대하는 투쟁은 간접으로는, 그 영혼의 향기가 종교인 세계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 종교에 대한 비판은 종교가 그 후광인 현세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인 테리 이글턴은 종교를 사이비 과학이라 비판하면서 초합리주의적 계몽주의로 대체하려는 전투적 무신론자들을 비판하고 있다[19].

한편으로 지적 설계론으로 재포장한 새로운 창조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은 《다윈주의와 지적 설계론》에 담겨 있다[20].

진화론이라는 변화의 과학을 이해하고 생물학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은 좋은 물음을 던지는 《다윈》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김호연의 《우생학, 유전자 정치의 역사》(아침이슬, 2009)에 자세한 논의를 담고 있다.

[2] 신영전, ‘식민지 조선에서 우생운동의 전개와 성격’, 《의사학》 제15권 제2호, 2006년 12월.

   일제 점령기에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은 유전 질환이 아님에도 우생학의 영향으로 강제적인 불임시술을 받았다. 조선우생협회에는 여운형, 조만식, 김성수, 정인보, 이광수, 방응모, 이갑수 등이 참가했다.

[3] 오기현, 《SBS 스페셜, 혈액형의 진실》, 그루북스, 2006.

  혈액형 성격학의 출발은 우생학에서 비롯됐다. 우생학은 백인 중에 많은 혈액형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이론을 만들게 됐다. 즉 네 가지 혈액형 중 유럽인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A형과 O형에는 긍정적인 내용이 많은 반면,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은 B형과 AB형은 ‘덜 떨어진 인종’으로 규정했다. B형이 비교적 많은 아시아인들은 열등한 인종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1910년대 이후 일본은 독일의 혈액형 성격학을 우생학의 한 분야로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키게 됐다. 그리고 혈통을 중요시하는 한국인의 정서에 편승하여 우리 나라에 도입 되었다.

[4] http://blog.marxism.or.kr/42

    서발턴은 천대받거나 억압받는 집단을 가리키는 포스트식민주의의 용어로 서발턴 연구는 1980년대 초에 인도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시작됐다. 서발턴 연구그룹은 영국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한 식민주의 역사학을 비판했고,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비판을 제시했다. 또, 역사를 도그마적으로 해석하는 스탈린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러나 그들의 스탈린주의 비판은 고전 맑스주의 복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서발턴 연구그룹은 계급에 기초한 분석이 인도 역사에 맞지 않는다며, 마르크스주의를 유럽 중심주의라고 비판한다.

   탈라트 아흐메드는 인도 출신 여성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다. 그녀는 인종차별이나 식민지적 억압에 맞서기 위해 ‘공동의 문화’와 ‘공동체’만을 강조하는 것도 인종차별에 맞서는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종차별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분명 인종차별 경험은 그러한 피억압 집단 출신의 사람들이 모두 겪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취와 억압의 관계라는 핵심 문제를 무시한다. 인종차별과 억압에 대한 공통의 경험 자체만으로는 결코 억압에 맞선 투쟁이 성공할 수 없다. 인종 억압의 문제는 계급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혼란한 생각은 문화가 사람들을 단결시킬 수도 있지만 또한 분열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5] 임지현 교수와 같은 ‘탈민족주의’ 역사 서술은 갖가지 본질론을 거부한다면서 이데올로기적 범주의 해체와 학문적 객관성을 내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종의 ‘국제주의적’ 실용주의를 내세운다. 그러나 인도의 서발턴 그룹과 마찬가지로, 탈식민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초국적’ 식민주의 담론을 은폐하는 위장막으로 너무나 쉽게 악용된다.(오언 밀러, ‘유럽중심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보편주의로’, 《마르크스21》 5호, 2010년 봄호)

[6] 러시아의 스탈린주의 과학 정책은 과학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억압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러시아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은 ‘사이비’ 과학이었고, 당시 발전하고 있던 유전학은 리센코의 이론과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받았다. 스탈린주의 억압은 많은 망명 과학자를 낳았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빅뱅 이론의 창시자’ 조지 가모브다. 한국에도 그의 저서가 많이 소개됐다. 조지 가모브가 ‘좌파’는 아니지만 그에 대해서는 ‘애틋한’ 감정이 있다.

조지 가모브는 과학자로서 러시아 적군 장교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스탈린 집권 이후 양자론이 억압받았고 물리학자로서 연구의 자유를 탄압당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조지 가모브에 대한 ‘연민’에는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조지 가모브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트로츠키를 소개하고 있다. 트로츠키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던 트로츠키는 성심성의껏 작문을 했다. 그런데 러시아 문학 선생님이 비평도 없고 작문한 것을 돌려주지도 않는 것이었다. ‘고딩’ 트로츠키는 몹시 마음이 상했다. 트로츠키는 문학 선생님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고스란히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다. 이때 트로츠키의 러시아 문학 교사가 바로 조지 가모브의 아버지였다. 트로츠키의 ‘오해’였는지 모르겠으나 조지 가모브의 아버지는 좋은 작문으로서 트로츠키의 글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 작문은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가난한 가모브 집안에서 땔감으로 이용됐다. 조지 가모브와 트로츠키의 삶을 연결해 주는 아버지 가모브와 트로츠키의 인연이 참 애틋하다. 혁명이 스탈린주의 반혁명으로 끝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 가모브(그리고 아들 가모브)와 트로츠키가 화해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조지 가모브》(조지 가모브, 사이언스 북스, 2000, 26-27쪽)와 《나의 생애》상(트로츠키, 범우사, 142-144쪽) 참고)

[7] 이에 대해서는 존 몰리뉴의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2005)를 추천한다.

[8] 존 벨라미 포스터, 《생태혁명》8장, 인간사랑, 2010.

존 벨라미 포스터, 《마르크스의 생태학》, 인간사랑, 2010년 9월 20일 출간 예정.

리처드 르원틴의 인터뷰는 《과학의 정열》( ‘모든 것이 유전자에 쓰여 있지 않다’, 다빈치, 2001)에 실려 있다.

[9] 알렉스 캘리니코스, 《사회이론의 역사》 5장 삶과 권력, 일신사, 2008.

[10] 알렉스 캘리니코스, 위의 책, 166-167쪽.

[11] 존 벨라미 포스터 외, 《다윈주의와 지적설계론》5장, 인간사랑, 2009.

[12] 홍석욱, ‘진화와 진보’, 《진보평론》41호, 2009년 가을.

[13] 유물론자의 인간 이해에 대해서 케넌 말릭의 ‘과학과 인간이라는 동물’(《세계의 과학자 12인, 과학과 세상을 말하다》, 지호, 2009)을 소개한다.

[14] 《다윈》에서는 소개하지 않았지만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비판으로 후성유전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후성유전학은 DNA 염기서열의 변화, 즉 유전자 변이 없이 일어난 유전자 기능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용도 폐기됐지만 후성유전학의 개념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 후천적으로 획득된 형질 중 일부는 유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성유전학에 대한 이해를 돕는 좋은 예는 일란성 쌍둥이이다. 두 쌍둥이 자매는 정상적인 청소년 시기를 거쳤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한 아이는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고 다른 아이는 건강한 생활을 영위했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2차 대전 이후 네덜란드에서 대기근으로 1만 8천 명이 사망하고 많은 아이들이 영양 결핍을 겪었다. 이 아이들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으므로 다른 질병에도 쉽게 거렸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자손들이 타 지역 아이들보다 저체중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 사례들은 고전적 유전학으로 잘 해석되지 않는다. 후성유전학은 위 사례처럼 유전체에 미묘한 변경을 가져오는 후성유전적 변화를 연구하고 있다.

  후성유전학자들은 DNA 메틸화가 대표적인 후성유전적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DNA 메틸화는 유전자 코드의 변화 없이 유전자의 기능을 직접적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 DNA 메틸화는 자손 세포에 전달되고 유전자의 발현, 염기서열 변이 초래, 종양 발생 등에 관련 있다. 메틸화는 유기화합물의 탄소·질소·산소·황 원자 등과 결합한 수소 원자를 메틸기로 치환하는 반응이다. DNA 메틸화는 RNA와 DNA에서 발견되는 다섯 가지 주요 염기 중 하나인 사이토신cytosine의 수소 원자가 메탄CH4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DNA 메틸화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바이러스, 니켈, 염증, 노화 등이 있다.

[15] 일찍이 심리적 기능들이 뇌 활동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실험 인지심리학을 신경학, 생리학과 결합시킬 것을 제기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있었다. 러시아 심리학자 비고츠키(《마인드 인 소사이어티》, 학이시습, 2009)의 이론은 핀란드 교육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6] 뇌과학의 결정론적 시각 비판과 인간 진화의 이해, 뇌과학 상업화에 대한 비판으로 《새로운 뇌과학》(데이 리스· 스티븐 로즈 엮음, 한울, 2010)을 추천한다.

[17] 스벤 오르톨리 외, 《과학에 관한 작은 신화》, 에코리브르, 2009.

[18] 최일붕,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계몽주의 종교 비판의 한계를 보여 준 책’, 〈맞불〉 54호, 2007년 8월 18일.

[19]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모멘토, 2010.

[20] 존 벨라미 포스터 외, 《다윈주의와 지적 설계론》, 인간사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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