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다윈 —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서평자 장대익 교수와 저자 최종덕 교수의 흥미로운 논쟁이 〈프레시안〉에 실리면서 또다시 다윈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고 있다. 한정규 씨가 〈레프트21〉에 보낸 독자편지 ‘마르크스주의와 진화론, 다함께 공부합시다’에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공부하자고 제안했던 것도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다만 한정규 씨의 글에서 혼란스러운 점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아 조금 덧붙이고 싶다.

한정규 씨는 《종의 기원》이 출간될 당시 창조론이 빅토리아 시대에 지배적인 사상의 근원이었지만 동시에 진화론도 존재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화석 증거를 비롯해 당시에 밝혀낸 과학적 증거들이 창조론에 훨씬 더 잘 들어맞았다”는 한정규 씨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빅토리아 시대에 지식인 그룹에 속했던 신사계급은 주로 여행을 다니며 화석을 수집하는 것을 취미로 삼을 만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증이 많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집한 다양한 화석 들을 보면서 당시 지배적인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서 모순과 갈등을 느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 이전부터 모종의 생명 종이 있었다는 점을 입증해 주는 증거들을 화석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출판된 다윈의 《종의 기원》은 자신들의 의심을 풀어 준 하나의 지적이고 혁명적인 자극제가 됐던 것이다.

한정규 씨는 다윈이 “기존의 창조론과 진화론을 모두 비판했다”고 썼지만 다윈이 기존의 진화론을 어떤 의미에서 비판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윈이 ‘진화’라는 개념이 ‘진보’라는 의미로 곡해되는 것에 대한 반감을 나타냈다는 것은 확실하다. 다윈은 진화라는 말을 “변이를 수반한 유전”이라는 엄격한 의미로 쓰이길 바랐다.

반면, 한정규 씨는 다윈이 “확신하고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은 ‘자연 선택’이었다. 이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는 매우 크지만, 간략히 말하면, 자연스러운 선택이 자연의 원리라는 것이다. 선택이 과연 자연스러울 수 있는 것일까. 어떤 결정론적인 시각이 개입돼야 선택이 되는 것은 아닐까? 목적과 원인이 있어야 선택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한정규 씨가 자연선택설에 목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제기한 것은 ‘자연선택’을 단지 생명종의 ‘자연스런 선택’이라는 일면적인 의미로 이해했기 때문인 듯하다. 다윈은 생명 종의 진화에는 뚜렷한 목적이 없고 어떤 정해진 방향도 없음을 누누이 강조했다.

다윈은 자연계에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진화라는 개념을 일찍이 간파하면서 “생물과 주위 환경 사이에서 적응성이 증가되는 방향”으로 인도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자연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수반된다는 이른바 ‘자연선택설’을 주창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진화의 사다리에서 최고 정점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여러 시도는 다윈의 진화론과는 무관한 것이다.

한편 한정규 씨는 “진화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적자생존? 자연도태? 왜 우리는 진화론의 핵심으로서 적자생존, 자연도태를 자연선택보다 더 친밀하게 느끼고 있었을까. 자연선택이 잘 와 닿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며 자신의 견해와 상충되는 듯한 문제제기를 던진다.

그러나 한정규 씨도 자신의 글에서 밝힌 것처럼 (자연선택 개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1800년대 유럽의 부르주아지들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자연의 원리를 적자생존, 자연도태, 즉, 경쟁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진화론이 “창조론에 밀렸”다는 한정규 씨의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진화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당시 논쟁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사회적인 모순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더 나은 사회로 한층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했고 지배자들은 과학의 발전이 새로운 사회를 앞당길 것이라고 봤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식자층과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그럴듯한 과학적 권위도 필요했다.

그들이 보기에 다윈의 진화론 즉, 생명종은 ‘환경에 이로운 방향으로 살아남는다’ 라는 자연선택설이 당시 부흥하는 자본주의의 경쟁 논리와 지배논리에 부합했다. 따라서 ‘자연선택설’이 ‘강한 자만이 살아 남는다’라는 ‘적자생존’ 과 ‘자연도태’ 같은 제국주의적 지배 논리를 강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인간사회의 발전 법칙을 발견한’ 위대한 혁명가라면 다윈은 ‘자연의 발전 법칙’ 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윈의 진화론은 광범위한 업적을 남겼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진화론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초보적인 논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윈에 대해 다양하게 조망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다루는 한정규 씨의 글을 접해서 좋았고 계속 다윈의 진화론을 탐구하자는 주장도 반가웠다. “과학이 전문가들이 소유하는 지식이 아니라 대중의 지식 속에서 살아나야 한다”고 강조한 최종덕 교수의 말처럼 ‘진화론’이라는 이름으로 억압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다윈의 업적을 새롭게 조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