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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정부에서도 사회복지예산은 제자리걸음

노무현정부에서도 사회복지예산은 제자리걸음

우석균(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

9월 22일 2004년 정부예산안이 확정돼 국회 예결위원회에 넘겨짐으로써 사실상 예산의 대강이 확정됐다. 총 1백17조 원인 예산안은 사회복지예산이 12조 1천6백억 원에 불과한 반면, 국방예산은 1조 4천억 원이 늘어난 18조 9천4백억 원에 달한다.

노무현 정부가 세외 수입이 줄어들어(공기업 민영화 탓이다) 균형 예산을 잡는다고 호들갑을 떠는 와중에도 MD(미사일방어체계) 구입 예산을 비롯한 국방 예산을 늘린 이번 예산안은 현 정부가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과 군수자본을 바라보는 태도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언론들은 사회 복지 예산이 대폭 증가했다는 보도를 했으나 고정 증가분에 가까운 건강보험, 공무원연금 지원분 등과 노인 인구 증가 등에 따른 자연 증가분을 제외하면(아직 계산은 안 끝났으나 이조차 정부의 기여분은 사실상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부분의 증가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사실, 애당초 적은 사회 복지 예산이 몇 퍼센트 증가했는지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습다.

노무현 정부가 스스로 내세운 공약사항인 공공의료 확충과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예산은 전액 삭감됐다.

민주노총 등 46개 단체가 사회보장연대를 만들어 사회 복지 예산 증액을 요구하는 투쟁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빈곤 문제만 보더라도 8백만 명에 달하는 절대빈곤층 중 기초생활급여를 받는 사람들은 1백50만 명에 불과하다.

총과 빵은 양립할 수 없다

서구 사회에서 복지 예산과 국방 예산의 관계는 상호 배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상관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국방예산에 비하면 복지예산이 너무나 ‘새발의 피’여서 그렇다.

1957년부터 1994년까지 사회 복지 예산은 정부재정의 6.5퍼센트였던 반면, 국방 예산은 26.5퍼센트에 달했다. 이것이 한국사회가 거쳐 온 역사다. 한국전쟁 이후 겉으로는 전쟁이 끝났는지 모르지만 한국 민중은 사실상 전쟁을 계속해 왔다. 민중의 피와 땀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 자본의 군사적 요구와 ‘경제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외 자본의 이윤을 위해 바쳐졌다.

그 과정에서 민중의 삶은 파괴됐고 노동력 재생산에 쓰이는 돈은 총을 위해 쓰는 돈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그 결과 한국은 북유럽처럼 사회 복지 지출이 정부 재정 지출의 30퍼센트를 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 복지의 주요 부분이 사영화돼 있어 복지 후진 국가로 불리우는 미국에도 못 미치는 10퍼센트 미만인 사회에 머물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서구에서는 복지 국가를 해체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애당초 없던 복지를 더욱 망가뜨렸다. 기존의 공공부문을 민영화했고 의료보장이나 국민연금에 대한 사영화(연금개악, 민간의료보험 도입)도 계속되고 있다.

이 때문에 개인 의료비의 지출은 이미 미국보다도 많으면서도(OECD Health Data 2001) 사회보험의 보장성이 극도로 낮다.

그래서 의료보장의 경우 한국 사회의 ‘중산층’이라는 사람들도 가족 중 한 사람이 중병에 걸리면 그 한 사람을 희생시킬 것인가 아니면 가족 전체의 앞날을 희생시킬 것인가하는 야만적 ‘선택’을 해야 한다.

국방 예산 삭감과 사회 보장 예산 확보를 위한 투쟁

사회보장제도는 사실상 그것이 확보됐다고 해서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는 아니다.

노동자의 건강만 하더라도 생산 과정에서 그들의 노동력이 자본의 이윤 대상이 아닐 때만 지켜질 수 있다. 자본의 입장에서 의료 보장은 손상된 건강을 다시 한 번 자신의 이윤을 위해 쓰일 수 있게 ‘재생산’하기 위한 장치이며 실직 보장은 다음 번 착취 현장에 쓰일 때까지 노동력을 보존하기 위한 장치이고 산재보험은 ‘산업폐기물’ 처리법일 뿐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이러한 자본을 위한 노동력 재생산 비용까지도 노동자와 민중에게 전가해 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보장 제도는 노동자가 스스로를 지킬 최소한의 장치다. 사회보장 투쟁이 항상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의 주요한 과제가 돼온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복지가 있기도 전에 ‘복지병’의 병폐가 선전되고 ‘생산을 위한’ 복지가 강조되는 자본의 억지만이 판을 쳤다.

노동자·민중의 사회복지 투쟁, 사회보장 강화 투쟁이 필요하다. 이는 국방 예산 삭감을 목표로 하는 반전 평화 운동이 중요한 한 축이 될 것이고 다른 한편 사회 복지 예산 증대를 가로막는 사영화된 복지 부문의 자본들에 맞선 투쟁이 또 다른 한 측면이 될 것이다.

전자는 “전쟁 지원할 돈 있으면 교육·의료에 쓰라”는 9·27 집회 때 구호가 한 예가 될 것이다.

후자는 연금 확대를 집요하게 반대하는 국내외 보험 자본과 금융 자본에 대한 투쟁과 의료보장 확대에 집요하게 반대하는 병원과 제약 자본에 대한 싸움이 예가 될 것이다.

사실상 군수 자본과 복지 부문의 자본은 사회보장 강화를 가로막는다는 측면에서 이해를 같이한다.

많은 경우 이들은 동일한 자본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한국 백혈병 환자들이 약값 인하를 주장하면서 투쟁했던 ‘노바티스’는 약을 파는 제약 자본인 동시에 화‘약’을 파는 군수 자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