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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로 세상 보기:
윤리적 소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마트가 동네 시장 품목까지 판매하면 되냐는 비판에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이 “이념적 소비를 하느냐”고 조소하면서 “윤리적 소비” 논쟁이 불거졌다.

조국 교수는 ‘윤리적[착한] 소비’ 운동으로 오만한 대기업에 본때를 보여 주자고 호소했다.

오늘날 ‘윤리적 소비’(또는 ‘착한 소비’) 운동가들은 ‘나쁜’ 대기업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벌이는 불공정 거래와 착취·환경파괴 등에 분노한다. 이들은 기업 이윤보다 인권과 환경, 민주주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초콜릿 회사를 비난할 때, 그것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등의 카카오 농장에서 인신매매로 팔려온 아동들이 다국적 식품회사를 위해 노예노동을 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변혁하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분노에 공감한다. 이랜드 등 ‘나쁜’ 기업의 노조 탄압에 맞선 보이코트(불매운동)를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적극 지지하고 동참한 바 있다.

그럼에도 이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차적으로 다른 점은 자본주의 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믿는 방법의 차이에 있다.

“소비 투표”

이들은 자본주의에서 기업들은 결국 상품 판매에 성공해야 이윤을 벌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윤리적 소비”가 기업에 진정한 압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소비는 돈으로 하는 투표”라는 말로 요약된다. 경제 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소비 투표”로 시장을 민주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방법의 차이는 대안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들이 ‘나쁜’ 기업을 길들여 만들려는 세상은 ‘윤리적(착한)’ 자본주의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점진적 목표를 이루는 데서조차 몇 가지 난점을 낳는다.

첫째, 현실에선 ‘나쁜’ 대기업들이 필수적인 소비 시장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무노조 삼성의 가전 제품이 싫어 노조 탄압 LG 제품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둘째, 이윤 그 자체가 목적인 기업들은 ‘윤리적 소비 시장’도 창출해 낸다. 창업자가 극우 시오니스트고 아프리카 커피농장 착취로 대표적인 불매 대상 기업이던 스타벅스가 겨우 5퍼센트만 공정무역 커피를 쓰고도 ‘공정기업’으로 불린다!

셋째, 윤리적 소비를 하려면 대체로 더 비싼 가격을 치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신세계 정용진을 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마트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소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는 자본주의를 바꿀 수 없다고 본다.

자본주의에서 개별 기업은 시장 경쟁의 압력에 종속돼 있다. 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를 쥐어짜고 산업안전이나 환경보호 등에 드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 시장을 지배하는 ‘나쁜’ 기업들은 이 과정의 필연적 산물이다.

문제는 이 기업들의 이윤 활동이 전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의 활동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노동은 자신의 임금몫 말고도 막대한 부를 생산한다.

이들은 소비자로서보다 생산자로서 더 큰 잠재력을 가진다. 현대자동차 소비자 수백만 명을 모으는 것보다 현대자동차 노동자 4만 명이 파업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파급력이 크다.

따라서 진정 이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원자화된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과정을 중단시킬 수 있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이다. 이것만이 ‘나쁜’ 기업들이 지배하는 경제 구조를 민주적 계획이 기초가 되는 사회로 바꿀 잠재력을 가진다.

진심으로 기업 횡포가 만연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착한’ 소비에 머물지 말고 노동계급의 집단적 투쟁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이 투쟁에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