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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균 칼럼:
《행복한 왕자》도 금서로 지정해야 하나?

“도시 한복판 높은 축대 위에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높다랗게 서 있었습니다. 동상의 온몸은 얇은 순금으로 덮여 있었고 두 눈은 반짝이는 사파이어였고 칼자루에는 크고 붉은 루비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 동화, 《행복한 왕자》를 읽거나 보거나 듣지 않고 어른이 된 한국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스카 와일드의 이 동화는 그의 《욕심쟁이 거인》이라는 동화만큼이나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글이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자였다. 《행복한 왕자》의 지은이 소개를 정확히 한다면 그가 동성애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영국에서 쫓겨나 파리에서 굶어 죽었으며 동시에 그가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그의 동화들을 읽어 보라. 테리 이글턴의 말대로 “아동용 동화로 위장한 혁명전단”이 아닌가? 그뿐인가.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검열관의 눈’으로 《행복한 왕자》를 읽어 보라. 왜 행복한 왕자는 공주를 놓아두고 굳이 성별도 불분명한 제비와 사귀며, 또 왜 왕자는 제비에게 계속 “하룻밤만 더 있자”고 조른단 말인가.

금지

‘바른 성문화를 위한 전국연합’(이하 ‘바성연’)이라는 단체가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 걸려 죽으면”이라는 광고를 〈조선일보〉에 실었다. 또 법무부는 구금시설에서 이 드라마 방영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이 드라마뿐만 아니라 훨씬 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이 읽는 《행복한 왕자》는 당연히 금지해야 한다. 동성애 작가가 쓴 글인데다가, 병에 걸려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여성 봉재사의 아들에게 눈을 가져다주면서 공주를 비판하고, 성냥팔이 소녀의 참상을 고발하고, 맘몬을 숭상하는 지배계급에 대한 직접적이고 통렬한 비판을 담은 이 동화를 왜 가만 놔둬야 하는가? 어린이들이 게이가 돼 에이즈에 걸려 죽고 빨갱이가 되려면 어쩌려고?

그들이 낸 광고가 무지에 근거한 편견에 가득찬 글이라는 것은 다른 글들에서 밝혀졌으므로 (‘“동성애=에이즈”? ‘바른 성문화’? 무지와 편견부터 벗자!’ 〈프레시안〉, 10월 1일치) 더 자세한 언급은 않겠다. 다만 그들이 유엔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유엔 AIDS계획(UNAIDS)이 ‘인권에 기초한 에이즈 접근’을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강조한다는 점은 말해 둬야겠다.

유엔은 물론 값싼 복제약을 놓아두고 값비싼 특허약 중심의 ‘원조’ 계획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에이즈의 최대 후원자로 알려진 게이츠 재단이 특히 이러한 특허약품 중심의 치료를 옹호한다) 효과적으로 에이즈에 대처하는 것과 거리가 멀긴 하지만, 유엔조차 약자들의 권리를 강조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여성의 권리가 억압당하면, 동성애자들의 권리가 박탈당하면 이들이 에이즈에 감염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성행위를 거부하지 못하는 사회일수록, 또 동성애 혐오가 심해서 그들이 사회에서 내몰릴수록 이들은 ‘안전한 섹스 safe sex’에서 거리가 멀어진다.

따라서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 혐오가 문제다. 문제는 동성애자들이 아니라 ‘바성연’과 같은 동성애 혐오 집단이다. 동성애자가 에이즈 감염률이 높다면 그것은 바로 ‘바성연’과 같은 동성애 혐오증을 부추기는 사람들 탓이 크다. 동성애의 결혼이나 동거가 합법화된 유럽에서 동성애로 인한 에이즈 감염률이 가장 낮은 것은 이러한 사실의 반영이다(그리고 물론 전 세계적으로 에이즈는 이성애에 의해 주로 전염된다. 성행위를 금지시키려면 이성애부터 금지시켜야 할 것이다).

동성애 혐오증이 더욱 가시화되는 것은 일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물론 동성애 운동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의 반영이다. 동성애를 드라마에서 다루고 차별금지법에 ‘성적 지향’이 명문화되려는 운동에 대한 반발로 이러한 운동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때도 그렇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시기의 객관적 상황이다.

혐오증

세계경제 위기는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고 이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소수자 탄압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이주민 혐오증을 부추기는 파시스트 정당인 스웨덴 민주당이 최초로 의석을 얻었다. 프랑스에서는 로마(‘집시’)를 추방했고 유럽 전역에서 히잡이나 부르카 금지가 입법화되고 있다. 경제 위기와 실업이 정부와 자본의 탐욕과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미 G20을 앞두고 이미 지난 6월부터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추방이 대대적으로 행해지고 있고 앞으로 이슬람 국가 출신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혐오증이 공공연하게 부추겨질 가능성이 크다.

최근 미성년자에게 낙태를 시행한 의사에게 실형이 선고되는 등 낙태 금지 조처가 현실화되고 있고 프로라이프 등 이를 부추기는 세력이 힘을 얻고 있다, 저출산이 낙태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성애 혐오증 또한 이러한 흐름과 같이 볼 필요가 있다. 세 가지 모두 그 형태는 다르지만 국가와 일부 우익 사회세력의 합작에 의한 것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경제 위기 때문에 서민들의 삶이 어려워질수록 각국 정부들은 정부와 자본에 대한 불만을 대신할 속죄양을 찾으며 동시에 민주주의적 권리를 제약하기 시작한다. 독일의 나치즘이 처음에 탄압한 것은 사회주의자, 유태인, 동성애자, ‘로마’였다. 그러나 그 파시즘의 탄압은 결국 모든 민주주의적 권리를 남김없이 압살했고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명박 정부는 이번 개각에서 다른 사람들은 버리면서도 쌍용자동차 파업 진압이 자랑스러운 일이었다는 경찰청장 조현오를 끝까지 고수했다. 그리고 조현오는 이제 시위 진압에 고무총탄 발사기와 음향대포를 사용하려 한다.

마르틴 묄러의 “처음에 그들은”이라는 잘 알려진 다음 글은 왜 경제 위기 시기에 민주주의적 권리의 옹호와 소수자 탄압에 항의하기 위한 연대운동이 중요한지에 대한 경고다.

“처음에 그들은 사회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 다음에는 노동조합원들을 잡으러 왔다. 나는 침묵했다.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 다음엔 그들은 유태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 다음에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연대해 민주주의적 권리를 옹호하지 않고 약자들의 권리를 지키는 일에 나서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행복한 왕자》를 읽을 권리까지 빼앗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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