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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 국가자본주의론의 관점

문제 제기

1989/91년 동구권이 붕괴하자 그 사회들이 사회주의를 구현하고 있다고 여겼던 좌파는 커다란 이데올로기적 혼돈에 빠졌다. 만일 이 사회들이 계급 없는 사회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을 구현하고 있었다면, 동구권의 붕괴는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파산을 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사회들이 단지 명목상으로만 사회주의였을 뿐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한 변형에 지나지 않았다면, 동구권의 몰락은 그로 인해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회주의를 염원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익이 될 수 있었다.

지금도 이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북한·중국·쿠바 등 잔존하는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소련을 본보기로 건설됐다. 이 국가들이 ‘사회주의’라는 말 앞에 ‘우리식’이나 ‘중국적 특색’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 북한 등이 사회주의라는 주장은 사회주의가 노동자의 자력 해방이라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거스르는 것이다. 만일 북한 등이 사회주의라면, 사회주의는 국가와 경제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한 국유화와 중앙 경제계획을 뜻하는 것일 게다. 국가를 누가 통제하는지, 또 계획이 민주적 계획인지 아니면 세계경제의 흐름에 좌우되는 사이비 ‘계획’인지 하는 본질적 문제는 도외시된 채 말이다.

그래서 소련이 사회주의였는지 아니었는지 하는 문제는 단지 역사학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달리 말해 노동계급의 해방이란 무엇인가 하는 원칙 중의 원칙 문제다.

운동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운동의 궁극 목표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비교적 널리 퍼져 있다. 이것은 개혁주의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실제로, 100여 년 전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운동만이 중요할 뿐 운동의 궁극 목표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의 당면 이익뿐 아니라 역사적 이익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혁명가들은 수단뿐 아니라 목적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국제주의 시각

소련 블록 스탈린주의 제도의 소멸 이면에 심각한 경제 위기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방법상의 특징은 그 사건을 세계적 시각에서 봤다는 것이다.1 즉, 위기에 빠진 제국주의 세계 체제가 가하는 국제 경쟁 압력 때문에 국가자본주의 제도의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운신의 폭이 좁아졌고, 그래서 그 제도는 험난한 길일지라도 경제의 일국적 편제 대신에 경제의 다국적화를 선택했다.2

‘민영화’(사기업화)와 시장경제로의 이런 이동은 하나의 자본주의적 착취 방식에서 다른 자본주의적 착취 방식으로 옆걸음질 치기(진보도 퇴보도 아닌)였다.3 그러므로 관료는 여전히 경제·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비록 경제·정치 구조에 일정한 변화는 있었지만 말이다.4

세계 자본주의 체제라는 관점에서 동구권 문제를 보지 않고 관료제의 결점에서 문제를 보는 대다수 사람들은 왜 동구권 경제가 과거에는 오랫동안 번영을 누리다가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성장이 더뎌지고 마침내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됐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의 세계화라는 세계적 맥락 속에서 동구권 위기를 자리매김하는 국가자본주의 이론은(그리고 이 이론만이) 이 문제에 답변할 수 있다. 또 국가자본주의 이론만이 1920년대의 고립된 노동자 국가가 세계 자본주의 속에서 결코 극복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인식할 수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사회주의 군도는 ‘바다’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물에 잠길 것이라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점을 견지하는 것은 국가자본주의 이론뿐이다.

마르크스주의 법칙들의 종합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소련 블록 경제가 힐퍼딩·부하린·레닌이 파악한 현대 자본주의(제국주의)의 법칙들에 따라 작동했음을 보여 준다. 이 법칙들은 마르크스가 파악한 고전적 자본주의의 법칙들이 변용된 것이다.

현대 독점자본주의에선 가치와 가격 사이에 필연적 조응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가치법칙이 부분적으로 부정된다. 또, 제국주의적 경쟁에서 비롯하는 전쟁 준비에 의해 경제가 규정된다. 그래서 국가자본주의가 가장 유력한 형태가 된다. 국제 질서도 여러 국가자본주의들 사이의 충돌의 보편화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치법칙은 더욱 수정된다.

세계 체제의 일부로서 소련은 군사적으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서방과 무기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급속한 중공업 건설이 필요했다.5 이를 위해 스탈린과 그 휘하의 관료는 1928~1929년 국가자본주의적 반혁명을 일으켰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선진국들에 50년 뒤졌습니다. 10년 안에 이 격차를 메워야 합니다.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들[서방]이 우리를 분쇄해 버릴 것입니다.”

이런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이 소련 경제에 가치법칙을 강요했다.6 비록 ‘부분적으로 부정된’ 가치법칙이었긴 하지만, 이것은 정도 차이일 뿐, 서방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방의 무기·중공업 제품 생산자들이 노동비용을 줄이려 함에 따라 소련도 따라 해야 했다. 그 역도 성립했다. 그리하여 소련의 구체적 노동은 세계 규모의 추상적 노동과 연관되게 됐다.7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가치법칙의 이런 수정된 관철은 서방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8 특히 1·2차세계대전 때는 더욱 그랬다. 당시의 서방 경제는 현상적으로도 소련과 놀랍도록 흡사했다.9 그럼에도 물론 자본주의적이었다. 교전국 상호 간의 군사적 경쟁은 노동생산성 상호 비교를 강요했다.10

단지 전쟁 때만 국가 개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1930년대 이후 국가는 국민경제에 개입해,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는 산업에 국가보조금을 대 준다거나 국유화하는 방식으로 가치법칙을 수정했다.11 1930년대에 이 방향으로 가장 멀리 나아간 게 소련이었고 그다음으로 일본, 독일, 미국 순이었다. 1950년대 이후로는 중국과 브라질·멕시코 같은 제3세계 나라들이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갔다.12

그러나 소련 경제를 포함한 현대 자본주의가 고전적 자본주의의 법칙들에서 벗어나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 추세가 소련과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작용한다.13 또 주기적 과잉생산 위기를 소련도 경험했다.14

물론 자원 배분이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서가 아니라 관료의 지령에 따라 이뤄졌으므로 위기는 공업 생산의 감소, 공장폐쇄, 실업 급등과 같은 현상보다는 성장률 감소와 같은 현상을 초래했다.15 위기가 나타나는 형식 자체는 마르크스의 고전적 자본주의 모델과 다소 달랐던 것이다.16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역사적 배경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소련은 승전국으로 떠올랐고, 서방과 전리품을 나눠 가졌다. 동유럽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소련 관료가 전쟁을 거친 뒤나 심지어 전쟁 중에라도 몰락할지 모른다던 트로츠키의 예상을 빗나간 사건이었다.17

이 예측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에르네스트 만델이 지도하는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가 진보적 세력으로 해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1946년 동유럽 국가들을 일단 “자본주의적 완충국”들로 규정했다.18 동유럽 사회들이 소련 사회구조를 급속히 닮아 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1948년 봄 티토와 스탈린이 충돌했다. 트로츠키주의 정설파는 티토 편을 들었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에 맞서 ‘자본주의 완충국’을 지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정설파는 티토가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고 있다고 자의적으로 규정했다.19

1951년, 정설파는 논리적 일관성을 기하기 위해 유고와 여타 동유럽 국가들을 “일그러진 노동자 국가”라고 규정했다.20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폭시켰다. 만일 동유럽이 일그러졌다 해도 어쨌든 노동자 국가라면 스탈린주의는 노동자 국가들을 세웠으므로 진보적 세력이 된다. 이것은 정설파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다.

또 이것은 노동자 국가 건설이 노동자 자신의 행위라는 마르크스의 핵심 원칙과 모순되는 것이기도 하다. 정설파의 공식 견해는 사실상 노동자가 아닌 다른 세력(소련 군대나 티토와 마오쩌둥의 농민 게릴라)이 노동자를 해방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이 국가들이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면 경제·정치·사회 구조가 이 국가들과 거의 같은 소련도 노동자 국가일 수 없다. 이런 추론에 바탕을 두고 토니 클리프(이가엘 글룩슈타인, 1917~2000)는 1946년부터 소련 사회를 연구해 이듬해인 1947년 《소련 국가자본주의》 초판을 집필했다(출판 연도는 1948년).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 국가’ 이론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정설파가 소련을 사회주의로 본 것은 아니다.22 그들은 소련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 사회인 노동자 국가(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봤다.23 다만 ‘관료적으로 퇴보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또 트로츠키와 정설파가 소련 국가의 개혁 가능성에 기댄 것도 아니다. 그들은 혁명이 필요하다고 봤다. 다만 ‘사회혁명’이 아닌 ‘정치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관료가 ‘계급’이 아닌 ‘신분caste’이라는 트로츠키의 규정에서 도출되는 실천적 결론이다.24

관료가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이 아닌 노동계급 내의 특권적 상층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트로츠키는 관료의 권력이 생산수단이 아닌 분배수단에 대한 지배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5

그러나 관료는 소비수단뿐 아니라 생산수단도 지배한다. 즉, 그들은 지배계급인 것이다. 실제로, 관료는 소비보다 생산을 중요시했다. 소비재 부족 사태가 되풀이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랬다.26

생산수단에 대한 사유가 아닌 국유가 노동자 국가의 본질적 특징이라는 주장도 잘못됐다. 소유관계는 생산관계의 법률적 형식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유사한 유형의 착취적 생산관계들이 상이한 소유 형태들과 공존할 수 있었다. 예컨대 중세의 농민은 사유지가 아닌 교회 소유 토지에서 일하든, 봉건영주 소유의 토지에서 일하든 똑같이 착취당했다. 또, 아랍 봉건제는 국유재산에 바탕을 뒀는데, 그 지배계급의 성원들은 개인 재산권(사적 소유권)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랍의 농민은 유럽의 농민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착취당했다. 법률적 관계들이 달랐어도 말이다.27

소련이 사회주의 또는 노동자 국가라는 주장은 내용보다 형식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적 소유가 국유로 대체됐다며 소유관계를 강조하고, 시장의 무정부성이 계획으로 대체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들이 생산과정에 대한 통제로부터 배제돼 있는 실제 생산관계를 간과한다. 또 적대적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군사적으로 생존할 필요에 크게 영향받는 경제 ‘계획’의 내용도 간과한다.28

소련은 이행기 사회가 아니라 1928년에 자본주의적 복원이 일어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국가관료는 이 사회에서 스스로 지배계급이 돼 소련 경제를 자본주의적으로 운영했다. 관료는 스스로 자초한 1926년 영국 총파업 패배, 1927년 중국 혁명 패배, 뒤이은 고립, 침략당할 위험 등에 대응해 무장을 강화해야 했다. 여기에는 중공업의 급성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산수단의 축적이 지상명령이 됐다.29

반혁명은 노동자 권력의 잔재를 남김없이 파괴해 버렸다. 1인 경영제, 노조 무력화, 단체협약 폐지, 개별 고용을 통한 노동계급 원자화, 스타하노프식 노동강도 높이기, 국내통행허가증제 도입, 여성의 예속, 물품세 도입을 통한 물자 이전(소비에서 무기 생산으로), 농업의 강제 집산화, 강제노동수용소, 소수민족 억압 등등.30

국가를 통해 축적 과정을 지배함으로써 관료는 “자본의 인격화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됐다.31 관료의 권력은 트로츠키가 지적한 분배 통제나 물질적 소비상의 특전으로 나타나는 기생주의가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지위에서 나온다. 그들은 계급이다.32

지배계급인 관료는 노동자·농민과 떨어져 있었고 그들 위에 군림해 왔다. 그들은 도가 지나친(소련의 기준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서구의 기준으로 봐도) 부와 특전을 누렸고 일반으로 자신의 계급 지위를 자녀와 손주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33

노동계급

어떤 사람들은 소련에 임금노동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자본주의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소련 노동자들의 정치적 권리가 제한돼 있었긴 해도 그들은 ‘자유’ 노동자들이었다. 첫째, 그들은 다른 어떤 개인이나 국가에 속박돼 있거나 소유돼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법률상으로 자유로웠다. 둘째, 그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거나 통제하거나 그것에 속박돼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과 똑같은 관계를 생산수단과 맺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먹고살기 위해서는 관료가 지배하는 국유 기업에 고용돼야 했다. 서구 자본주의에서처럼 그들은 일할 수 있는 능력, 곧 노동력을 파는 대신에 임금을 받았다. 노동력은 소련의 공식 계획 당국이 시인했듯이 “그것의 재생산에 필요한 재화량”, 즉 노동력의 가치에 따라 매매됐다.34 이런 노동력 매매를 통해 소련 노동자들은 착취당했다. 이 착취는 자본주의에 앞선 사회에서처럼 특정 노동이나 특정 생산물에 대한 직접적 전유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서구 자본주의에서처럼 생산물로 구체화된 노동시간 가운데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부분(필요노동시간)을 뺀 나머지 부분(잉여노동시간)은 국가와 지배계급이 전유했다. 노동자들은 무보수 잉여노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토니 클리프는 노동시장의 자유화 정도를 과소평가했다. 그가 《소련 국가자본주의》를 집필하던 1947년 당시 입수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 때문이었다. 이것은 여러 해 뒤에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바로잡았다.35 소련의 임금 수준은 산업에 따라, 직장에 따라, 지역에 따라, 또 노동계급 내의 기능별·교육별·성별·인종별 계층에 따라 달랐다. 각 부문의 노동 수요가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임금률은 공식적으로는 중앙 계획 당국이 책정했다. 그러나 소련의 계획 입안자 자신이 시인했듯이, “임금 차이를 자의적으로 조정한다는 것은 몹시 잘못된 생각이다. … 이런 관점이 모델을 세우거나 예측을 할 때 여러 실책을 범하게 한 이유였다.”36 효과적인 임금 책정은 다양한 경제 부문의 다양한 수요에 제대로 부응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게 되면 기업 경영자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노동을 끌어들이려 국가의 임금 시책을 위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37 그래서 소련의 임금과 임금 차이는 자의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계획’되기는 했지만 임금은 현실의 수요·공급, 즉 시장 압력을 반영했고 경제 전반에 노동력을 분배하는 구실을 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경제에서 임금의 고전적 기능이다(물론 임금 차이는 서구 자본주의에서처럼 분열 지배에도 이바지했다).

더구나 소련에서 개별 기업의 임금 책정은 실제로는 매우 자율적이었다. 경영자들은 서로 상여금이나 성과급, 노동 기준량(노르마) 조작 등을 이용해, 자신에게 필요한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경쟁을 벌였다. 이런 일은 노사 간 비밀 거래 방식으로 이뤄졌다. 또 단체교섭권 등 노동기본권이 크게 제한돼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찾아 직장을 바꾸는 것으로 ‘교섭력’을 높였다. 젊은 노동자의 20퍼센트가 취업 첫해에 직장을 바꿀 만큼 이직률이 높았다.38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인 실업이 소련에는 없었으므로 소련은 자본주의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고르바초프의 최고 경제 자문이었던 아벨 아간베갼이 지적한 사실을 드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는 소련 학술원(과학아카데미) 산하 노보시비르스크 경제·산업 조직 연구소 소장 시절인 1965년에 소련 주요 도시의 실업률이 8퍼센트이고 소도시의 실업률은 20~30퍼센트라고 썼다.39 그러나 국가가 임금 수준 책정을 통해, 축적이 급속히 이뤄지는 시기에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를 훨씬 웃도는 수준으로 인상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에 기업은 축적률이 저조한 시기에도 장차 일손이 모자라게 되는 때를 대비해 대량 해고보다는 불안정 고용을 선호했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이것은 경제에 간접 비용을 부과하는 셈이었지만, 이 점은 서구 자본주의의 사회복지 혜택도 마찬가지다.

맺음말

《사회주의: 공상에서 과학으로》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 대표자인 국가는 결국 생산에 대한 지도를 맡아야만 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주식회사와 트러스트 또는 국가 소유로 변형된다 해서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본질이 제거되지 않는다. … 형태가 어떻든 간에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기구이고 자본가들의 국가이며 총 국민자본의 관념적 인격화다. 현대 국가가 생산력 장악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것은 더 많은 시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는 임금노동자, 곧 프롤레타리아로 남는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제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정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정점에 이르면 그것은 넘어진다. 생산력의 국유는 충돌의 해결책이 아니지만 그 안에 해결책의 요소들을 이루는 기술적 조건들이 숨겨져 있다. 이 해결책은 … 사회가 공공연히 그리고 직접적으로 생산력을 장악함으로써만 생겨날 수 있다. … 프롤레타리아가 공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그들은 사회화된 생산수단을 … 공공재산으로 바꾼다.

엥겔스의 예측대로 그 뒤 세계 자본주의는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국가자본주의로 전환했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대체된다는 그의 예측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자본주의는 시장 자본주의로의 험난한(그리고 불완전한) 전환에 착수했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넘어지는” 것은 예정돼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조직된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의 존재에 달려 있다.


  1. 크리스 하먼, “논리의 검증을 이기지 못하는 이론”, 하먼·캘리니코스 외,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풀무질, 1995, 74쪽.

  2. 같은 글, 96~97쪽.

  3. 같은 글, 106쪽.

  4. 같은 글, 103쪽.

  5. C Harman, 1969, “The inconsistencies of Ernest Mandel”, International Socialism(old series) 41, p 38.

  6. 같은 글, p 37.

  7. 같은 글, p 38.

  8. 크리스 하먼, “논리의 검증을 이기지 못하는 이론”, 75~79쪽.

  9. 알렉스 캘리니코스, “파산한 이론을 은폐할 수 없는 수사학”,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212~213쪽.

  10. 크리스 하먼, “트로츠키에서 국가자본주의로”,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35~36쪽.

  11. 데렉 하울, “가치법칙과 소련”,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121쪽.

  12. C Harman, 1976, “Poland : the crisis of state capitalism, part 1”, International Socialism(old series) 93, p 27.

  13. 같은 글, p 28. 데렉 하울, “가치법칙과 소련”, 141~144쪽.

  14. 크리스 하먼, “논리의 검증을 이기지 못하는 이론”, 82~85쪽. C Harman, “Poland : the crisis of state capitalism, part 1”, p 27.

  15. C Harman, “Poland : the crisis of state capitalism, part 1”, p 27.

  16. 크리스 하먼, “논리의 검증을 이기지 못하는 이론”, 84~85쪽. 데렉 하울, “가치법칙과 소련”, 115쪽, 141~142쪽. 알렉스 캘리니코스, “임금노동과 국가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257쪽.

  17. 앨릭스 캘리니코스, 《트로츠키주의의 역사》, 백의, 1994, 38쪽.

  18. 같은 책, 48~53쪽.

  19. D Hallas, 1973, “FI in decline”, International Socialism(old series) 60, p 21.

  20. 앨릭스 캘리니코스, 《트로츠키주의의 역사》, 53~54쪽.

  21. L Trotsky, Revolution Betrayed, London, 1967, pp 61~62[국역: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 1995].

  22. 같은 책, p 47.

  23. 같은 책, pp 252, 288.

  24. 같은 책, p 112.

  25. 토니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책갈피, 2011, 342~345쪽, 182~184쪽.

  26. 같은 책, 339~342쪽.

  27. John Molyneux, Leon Trotsky’s Theory of Revolution, Harvester Press, 1981, pp 129~130.

  28. 토니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167~169쪽, 191~192쪽.

  29. 같은 책, 1장.

  30. 같은 책, 184~186쪽.

  31. 같은 책, 182~184쪽.

  32. 옛 소련 사회과학자들의 논문집인 Murry Yanowitch and Wesley A Fisher, eds and trs, Social Stratification and Mobility in the USSR, NY, International Arts and Sciences Press, 1973. 특히 pp 241~274. Alastair McAuley, Economic Welfare in the Soviet Union: Poverty, Living Standards and Inequality, Wisconsi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79, p 66. Hedrick Smith, The Russians, NY, Ballantine, 1977, pp 48, 131~132[국역: 《모스크바 25시》, 문학관, 1989]. 또, 미하일 보슬렌스키, 《노멘클라투라》, 평민사, 1981(그러나 터무니없게도 보슬렌스키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기원을 레닌과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33. N E Rabkina and N M Rimashevskaya, Osnovy differentsiatsii zarobotnoi platy i dokhodov naseleniya[인구의 임금·소득 차이의 토대], Moscow. A McAuley, Economic Welfare in the Soviet Union, 1979, p 181에서 재인용. 소련의 계획 당국은 공식 빈곤선을 “최소한의 물질적 만족”이라 불렀는데, 노동자 가구의 3분의 2와 집단농장 농민 가구의 84퍼센트가 공식 빈곤선의 1.4배 이하의 소득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에 대해서는 McAuley, Economic Welfare in the Soviet Union, ch 3 참조. 또, David Lane and Felicity O’Dell, The Soviet Industrial Worker: Social Class, Education and Control, NY, St Martin’s Press, 1978, 표 5.7.

  34. 알렉스 캘리니코스, “임금노동과 국가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풀무질, 1995, 226~257쪽.

  35. N E Rabkina and N M Rimashevskaya, Osnovy differentsiatsii zarobotnoi platy i dokhodov naseleniya, p 208; McAuley, Economic Welfare in the Soviet Union, p 182에서 재인용.

  36. McAuley, Economic Welfare in the Soviet Union, p 182.

  37. S Batyshev, “Vybor oshibok”, in Literaturnaya Gazeta, 1968년 3월 19일. Lane and O’Dell, The Soviet Industrial Worker, p 90에서 재인용.

  38. Abel Aganbegyan, “The real state of the economy”, in Stephen F Cohen, ed, 1982, An End to Silence: Uncensored Opinion in the Soviet Union, NY, Norton, p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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