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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리영희 조사 (1929∼2010년):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12월 5일 리영희 선생이 별세했다.

강준만은 “리영희만큼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그 누구보다 더 직접적으로 광범위하고 치열하게 겪은 사람이 또 있을까” 하고 말한 적이 있다.

정말 그랬다. 리영희는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 곧 베트남전과 미군 개입, 미국 세계 전략, 분단, 남과 북, 군부 쿠데타, 자본과 시장 등에 관해 쉼없이 썼다.

그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우상과 이성》, 한길사, 1977년)

중국의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노신(루쉰; 리영희는 어느 글에서 중국식 발음인 루쉰보다 노신이 더 정감이 간다고 말한 바 있다)을 사랑한 리영희는 노신의 글쓰기를 이렇게 말했다.

“그[노신]의 글에는 현학적인 요소가 없다. 고매한 학설이나 이론으로 탁상공론하는 것은 동포에 대한 지식인의 배신행위로 생각했다.” 실은 리영희의 글쓰기 자세였다.

진실을 알리는 글쓰기는 리영희에게 견디기 쉽지 않은 개인사적 고통을 안겨 주기도 했다. 9번의 형사입건, 4번의 구속, 언론과 학계에서 모두 4번의 해직을 당했다.

그럼에도 리영희의 글은 수많은 사람들, 특히 대학생과 지식인 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70년대 대학생에게는 리영희가 아버지였다”고 했다. 프랑스 신문 〈르 몽드〉는 리영희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사상의 은사”라고 썼다.

김동춘은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 1974년)를 읽고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유신독재가 시작되면서 사회가 잔뜩 얼어붙고 서슬 푸르고 흉흉하던 1974년 초여름에 출간된 이 책은 대번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박정희 정권은 1979년에 이 책을 불온서적으로 지목해 판매를 금지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 책을 몰래 구입해 읽었다. 1천9백 원이던 것이 헌 책방에서는 1만 원가량에 거래되기도 했다.

《우상과 이성》도 판금 조처에도 불구하고 1986년 7월 초까지 7만 1천여 부가 판매됐다.

박정희 정권은 곧장 보복했다. 《우상과 이성》이 출간되자마자 리영희를 반공법으로 구속시켰다.

미국 제국주의의 본질을 밝히다

리영희는 미국 제국주의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미국은 제국주의다. 가장 악랄하고 가장 범죄적인 제국주의다.”

그는 일찍이 1960년대 중반에 미국의 베트남전을 비판했다. 당시 〈조선일보〉 국제부에서 근무한 리영희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비판적인 유일한 지면”을 만들었다.

리영희는 베트남전 종결 10년을 맞이해 그동안 써 왔던 글들을 모아 《베트남전쟁: 30년 베트남전쟁의 전개와 종결》(두레)을 1985년에 출간했다.

리영희는 주한미군의 진정한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선구적으로 밝혀냈다. 리영희는 미국 지배자들이 한 주장, 예를 들어 미 국방부 부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미 의회에서 한 증언을 인용해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를 들춰냈다. “[주한미군은] 한국만을 보호하기 위한 우산이 아니다. … 미국이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이유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다.”

2000년대 초반에 반전 운동에 참가했던 청년들 중에는 미국 제국주의를 향해 포효하는 리영희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 중인 몸을 이끌고 반전 집회에 참여해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노무현 정부의 파병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바그다드가 함락된 직후 열린 4월 12일 ‘국제반전평화 공동행동의 날’에 참여해서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미군의 바그다드 함락으로 개전 3주 만에 성공을 거둔 듯 보였지만 이후 더 큰 재앙들을 예고”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경고는 현실이 됐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최종 패배했다.

리영희는 독재정권이 금기시한 영역 중 하나인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진실을 알리는 작업을 했다.

특히 리영희가 1988년에 발표한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 연구》는 “정부(당국)가 오랫동안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것 달리 남북한의 군사력 및 종합적 전쟁능력 비교에 있어서 남한이 북한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최초의 연구다.”

그러나 리영희는 북한 체제에 비판적이었다. “북한 사회는 오랫동안 1인 숭배, 1당 독재, 폐쇄적 사회통제, 개인적 사유의 억제 등 어느 모로나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체제와 제도임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리영희의 북한 비판은 결코 남한 체제의 우월성 인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남한과 북한은 둘 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그 추악함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는 “통일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 사회민주주의 체제로의 수렴을 생각”했다.

그런 리영희도 1990년대 초반 옛 소련 블록의 몰락을 보면서 고민과 갈등을 했고 긴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지난 시기 우리의 유일한 대안이었던 마르크스주의의 진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불확실성이 우리 지식인의 고뇌다.”

그러나 그는 다시 시대의 요청에 응했다. 잠시나마 김영삼 정권에 기대를 걸었던 리영희는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에 환멸을 느끼면서 혹독한 비판을 퍼부었다(《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두레, 1994년).

1999년 6월 15일 서해교전이 일어나자 리영희는 북방한계선의 역사적 사실관계를 밝히는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 진실을 알고 주장을 하자〉는 논문을 발표했다(이 논문은 《반세기의 신화: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 삼인, 1999년에 수록돼 있다). 김대중 정부의 경찰은 이 주장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는지를 조사했다.

리영희는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긴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리영희는 마지막까지 낙관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한 단계, 한 정권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 50년이란 조감도를 놓고 보면 역시 우리 민족은 진화하고 있었고, 인권과 의식도 전진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