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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형제단:
저항과 타협 사이에서 진퇴양난

무슬림형제단(이하 형제단)은 이집트의 최대 야당이다. 사실, 정당이라기보다는 운동에 가깝다. 형제단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 많은 지지자들이 이번 항쟁에 참가했다.

그런데 왜 형제단은 정권과 협상을 시작했는가? 무바라크가 퇴진하기 전에는 어떤 개혁 논의도 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주장하는 시위대의 뜻을 거스르면서 말이다.

항쟁 초기에 형제단은 운동 참여에 반대했다. 그래서 형제단 지지자들은 시위와 행진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동의 동력이 하도 커서 형제단 지도자들은 단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믿을 만한

항의 운동의 엄청난 압력을 받은 무바라크 정권은 적당한 단체들과 협상을 타결해서, 운동을 분열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에 부딪혔다. 독립적 정치 조직을 수십 년 동안 금지하다 보니 지금 믿을 만한 “중재자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운동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믿고 의지할 만한 중재자들 말이다.

최근 협상에는 온건 야당 둘(와프드당과 가드당)이 참여했다. 두 당은 모두 정권이 정해 놓은 한계를 충실히 따른다. 그들은 (집회를 개최하거나 중요한 회의를 열거나 시위를 벌이는 등의) 공개적인 대중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 심지어 선거 때도 그러지 못한다. 두 당에는 활동가 당원들도 없다.

형제단은 다르다. 형제단은 불법 조직이지만 탄탄한 기반이 있다. 그래서 정권이 형제단 지도자들을 협상에 끌어들인 것은 필사적으로 위기 타개책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형제단의 오랜 역사는 개혁주의적 타협과 모순으로 점철돼 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형제단은 이집트를 식민지로 지배하던 영국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에서 지도적인 구실을 했다. 그러나 형제단의 지도자 하산 알-바나는 친영(親英) 왕정의 파루크 국왕과 협력했다.

대항마

형제단은 1950년대에 나세르 정권의 폭력적 탄압 때문에 수백 명짜리 조직으로 위축됐고, 대다수 단원들은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했다. 그들은 1970년대에 대통령 사다트와 합의를 맺고 귀국했다. 당시 사다트는 성장하는 노동자 운동에 맞설 대항마로 형제단을 이용하려 했다.

1980년대에 형제단 지도자들은 경제적 자유화(인피타, 즉 “개방” 정책)의 주요 수혜자였다. 사다트와 무바라크는 인피타로 국영 부문을 해체해서 사적 자본에 넘겼다.

형제단의 기업인들을 연구한 자료를 보면, 당시 형제단은 모든 민간 벤처기업의 40퍼센트를 통제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형제단은 대중조직으로 성장했다. 이집트 공산당이 1960년대 초에 해산한 결과로 생긴 정치적 공백도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인피타의 결과로 고통을 겪던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정의와 이슬람주의적 대안을 주창한 형제단에 이끌렸다.

형제단은 각종 의료·교육 시설 같은 사회복지망을 구축했다. 이런 시설은 많은 이집트인들에게 도움이 됐다. 1992년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국가는 수수방관한 반면 형제단의 사회복지 시설들은 중요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어떠한 반대도 두려워한 정권은 많은 형제단원들을 투옥했다. 그러나 형제단은 대응하지 않았다. 항의 운동도 조직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개 활동에서 후퇴했다.

다른 많은 이슬람주의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형제단도 모순에 빠져 있다. 기층 단원들은 정권의 혹심한 폭압에 고통을 겪었지만, 지도자들은 권력을 조금이라도 나눠 갖기를 갈망한다. 그 지도자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지만, 기층 활동가들의 다수는 급진적 변화를 염원한다.

형제단 지도자들은 온건 개혁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기 단원들을 억제할까? 많은 활동가들은 이것을 최악의 배신 행위로 여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