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대량해고 사태에 맞섰던 대우자동차 노동자 투쟁은 경제 위기 시기에 노동자들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2001년 2월 당시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대우차 노동자들은 무려 1천7백50명이었다. 당시 대우그룹 파산이 가져다 준 충격의 규모도 컸다. 박정희 시절부터 정경유착으로 급성장한 대우그룹의 파산은 한국 자본주의가 직면한 위기와 취약성을 상징했다.

2001년 대우차 투쟁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효과적으로 맞서려면 양보가 아니라 단호한 투쟁이 필요하다.

대우그룹 손실의 분배를 놓고 채권단과 대우, 채권단 내부에서 이전투구가 계속됐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한 치의 차이도 없었던 것은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었다. 정부와 채권단은 마치 책임이 노동자들에게 있는 것처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는 노조에 대한 초강경 몰아붙이기 등 노동자들의 기를 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한국 대기업 노동자 투쟁의 포문을 열었던 대우차 노동자들을 좌절시켜 노동자 운동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목적도 컸다. 

급기야 2월 19일 중무장한 경찰 4천2백여 명이 소방차까지 동원해 물대포를 쏘고 곤봉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대우차 부평 공장을 점령해 버렸다. 경찰은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는 어린아이가 넘어지건 말건 조합원들을 잡으러 공장을 휘젓고 다녔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필자에게 그 장면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경찰은 근처 성당으로 피신해 간 노동자들을 연행하려고 군사독재 정권에서도 없었던 성당 난입까지 시도했다.

경찰력 투입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한 대우차 조합원들을 경찰이 무자비하게 집단구타하는 장면은 김대중 정권의 반노동자적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을 핍박하는 데서 어떤 주저함도 없었던 민주당을 떠올리면 이들이 지금 부르짖고 있는 ‘일자리와 복지’가 얼마나 진심어린 것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족쇄

도대체 노동자들은 이렇게 억울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경제 위기 때 노동조합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가?

대우차 노조의 패배가 애초부터 예정돼 있던 것은 아니었다. 민주노총과 당시 금속연맹의 실질적인 연대파업이 조직됐더라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결코 불가능하지 않았다.

대우차 해고 사태를 자신의 문제로 여겼던 노동자들의 분노가 큰 밑천이 됐을 터였다. 경찰력 투입 다음 날, 부평역 집회로 단숨에 달려온 현대차 노조 가족대책위의 한 아내는 “울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며 울부짖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금속연맹 지도부는 2월 28일 연대 파업을 하루 네 시간 파업이라는 상징적 파업으로 한정해 버렸다.

대우차 노동조합 지도부의 거듭된 양보 교섭도 걸림돌이 됐다. 대량해고 1년 반 전부터 사측은 ‘노조 동의서’를 노조 투쟁의 족쇄로 활용했다. 워크아웃을 위한 노조 동의서, 산업은행의 자금 지원을 위한 노조 동의서 등으로 노조를 옭아매려 했다. 

노조 지도자들은 회사가 어려운 상황에서 임금 등을 양보하는 게 그나마 고용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는 가망 없는 대안에 매달렸다. 그래서 회사 간부들은 월급 몇 천만 원씩 꼬박꼬박 받아가는데도, 노동자들의 월급봉투는 계속 얇아졌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조합원들의 사기와 자신감은 높아지기 힘들었다.

노동자들은 “늪”에서 탈출하려면 투쟁적인 지도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당시 노조 선거에서 가장 전투적인 후보가 새 지도부로 당선했다. 좌파 노조 지도부는 정부·채권단·회사에 대한 가차 없는 반격을 건설해야 했다.

긴박한 사태 속에서 노동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좌파 지도부 또한 동요했고 노동자의 희생을 감수하는 노조 동의서를 제출했다.

그러면서 해외 매각에 맞서는 정치적 대안으로 제기됐던 공기업화 요구는 점점 사라졌다.

사실, 자본주의 위기 속에 부도·파산한 기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지키려면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 보장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리고 이 요구를 실현하려면 단호한 점거파업과 연대 파업이 필요했다. 그런데 양보 교섭에 매달리던 노조 지도자들은 공기업화 요구 앞에 ‘한시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더니 어느 순간에는 ‘공장 정상화’로 공기업화 요구를 대체했다.

경찰력 투입 일주일 전에 사측은 노동자들이 집결하지 못하도록 아예 휴업조처를 공고했는데, 그때 노동자들에게 남은 유일한 카드는 공장 점거파업이었다. 그러나 그 카드는 끝내 사용되지 않았다. 결국 경찰이 노동자들을 내쫓고 공장을 점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대우차 투쟁은 경제 위기 시대에 노동조합의 불가피하지 않은 양보가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보여 줬다. 다시 경제 위기가 도래해 한진중공업 등에서 대량해고가 자행되는 지금, 그 교훈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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