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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임승현 씨의 편지에 대한 답변:
왜 노동계급이 중요하고 사회주의가 필요한가

이 글은 〈레프트21〉 50호 온라인 독자편지 ‘‘신입생과의 진땀빼는 토론후기’를 읽고’에 대한 답변입니다. 

우선, 이렇게 답을 해 줘서 고마워요. 글로 쓰니까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간결하고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어요. 저 역시 말로 답했으면 ‘껑충껑충’ 건너뛰었을 수도 있는 얘기들을 빠짐없이 쓰려고 노력하면서 논리를 단련시키는 훈련이 되었어요.

세 부분으로 나눠서 답을 해 볼게요. ①하나는 사회주의가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라면 결국 또 소외 받는 사람들이 생길 것 같다는 것과, ②더 많은 차별과 억압을 받는 ‘소수’가 (여성은 수적으로는 소수가 아니지만) 사회개혁의 주체라는 주장에 대해서, ③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데 꼭 사회주의나 마르크스 얘기를 해야 하는가.

①마르크스는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공산당선언》)” 하고 말했는데 이때 그가 말한 계급은 생산수단을 둘러싸고 형성된 계급을 말해요.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먹을 것, 마실 것, 살 곳, 입을 것 등이 필요하죠.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매우 당연한 말 같지만 자본주의 초기까지만 해도 정신, 종교, 도덕, 인류애가 우선한다는 의견(관념론)이 우세했어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런 관념론에 반대하면서 역사를 분석했고, 역사에서 잉여 생산물이 등장한 이래 생산수단을 놓고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어 왔다는 것을 밝혀냈어요(격주간 〈다함께〉 15호, ‘마르크스는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는가?’).

자본주의 이전에는 왕, 황제, 교황 등이 “하늘이 준 권리”라면서 생산수단을 지배했고, 자본주의에서는 “경영 능력”을 이유로 자본가들이 지배하고 있죠.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 그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이 있다. / 그 왕들이 바윗 덩이리들을 끌어 왔던가? /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 그때마다 누가 그렇게 많이 그 도시를 재건했던가?”라는 시가 보여 주듯이 역사에서 언제나 실제로 생산을 했던 주체는 노동자들이에요.

사회주의자들은, 소수가 지배하고 있는 생산수단이 노동자들의 통제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해요. (〈레프트21〉 22호, ‘21세기에도 노동계급은 사회 변혁의 핵심 주체인가’)

노동자도 자본가도 아닌 사람들 중에는 농민과 자영업자가 있어요. 이 둘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빠르게 임금 노동자로 바뀌고 있지만, 농민의 경우는 아직도 많은 빈국들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기도 해요.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단지 인구 수가 아니라 각자의 노동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구실을 더 중요하게 보기 때문에, 그런 나라에서도 노동자가 자본주의 타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이들이 농민을 지도해서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봐요.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은, 민중주의자였던 형의 실패를 보면서 마르크스주의를 탐구했고 그 결과로 당시 러시아에서 비록 수는 더 적었지만 프롤레타리아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또 이후 러시아 혁명 당시 농민들이 노동자들을 지지하기로 한 것은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중요한 단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농민들이 혁명에 앞장서고 노동자들이 그 뒤를 따라가는 식으로 혁명이 일어난다면 자본주의가 제대로 타도될 수 없어요. 자본주의에는 비농업적 생산수단이 훨씬, 훨씬 더 많고 또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사회주의에서 노동자들은 분명히 자본가와 농민보다 더 많은 것을 결정하게 될 거예요. 그러나 이는 노동자 개개인들이 특권층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노동자 개인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죠) 그들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사회운영에 필요한 물자들을 생산하기 때문이에요.

앞에서 계급은 생산수단 지배를 둘러싸고 나뉘는 것이라고 했는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이 되는 것을 넘어서 계급 자체가 없는 사회로 가는 길까지 제시했어요. 바로 생산수단이 더 이상 특정세력에 집중되지 않고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만큼 사용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싫으면 관두든가”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실업자가 되면 생계를 보장받지 못하니까 그럴 수 없죠. 반면에 완전고용에 가까운 몇몇 예외적 상황(예를 들어 2차대전 당시 전시동원경제 같은)에서 노동자들은 싫으면 언제든지 사장에게 대들고서 때려치울 수가 있었어요.

만약 기본적 생필품뿐만이 아니라 모든 재화의 생산수단을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사회라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원치 않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에요. 사회주의 사회(다수가 생산수단을 지배)는 자본주의(소수가 생산수단을 지배)에서 공산주의(모두가 생산수단을 공유)로 가는 중간단계인 것이죠. 사회주의자들은 계급 없는 사회로 가기 위한 일보전진을 이루기 위해서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어요.

②차별과 억압을 받는 ‘소수’자라는 구분은 생산수단을 중심으로 본 구분과 어긋나는 면이 있어요. 제가 “어긋난다”고 표현했는데, 그런 구분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들도 자본가와 노동자들로 나뉜다는 뜻이에요. 마찬가지로 소수 민족이나 성적 소수자가 아닌 사람들도 자본가와 노동자들로 나뉘어요.

대표적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경우, 이건희 아내이자 리움 미술관장으로 개당 수백억 원하는 미술 작품들을 사들였던 홍라희와, 지금 홍익대학교에서 농성 중인 청소 노동자들은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여성일지 몰라도, 한 명은 자본가이고 나머지는 노동자라는 차이점이 현실에서는 훨씬 더 크고 중요한 효과를 내죠. 이 때문에 우리는 여성 중에서도 여성 자본가가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이 더 일관된 사회개혁의 주체라고 주장해요.

또 다른 뉴레프트 운동인 1960년대 미국 흑인 운동을 주도한 말콤 엑스는 흑인 분리주의자로 세간에 잘못 알려져 있지만, 흑인들 편에 서서 백인에 맞서 싸우는 또 다른 백인들을 보면서, 또한 나쁜 백인들과 함께 인종차별로부터 이득을 보는 다른 흑인들을 보면서 흑백분리를 주장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했어요. 그는 백인이라고 모두 적은 아니며, 나아가 흑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편은 아니라고 주장했고 결국 그 때문에 암살까지 당했어요. 자본주의에 제대로 맞서려면 계급을 중심으로 보는 관점이 필수적이에요.

생산수단을 둘러싼 계급구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해서 ‘소수’자들의 문제들을 덜 중요한 투쟁으로 격하시켜선 안 돼요. 이는 사회주의자들이 착하거나 유난히 불의를 못 참아서가 아니에요. 바로 ‘소수’자 차별이 노동계급을 서로 이간질시키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초창기부터 ‘소수’자 문제에 있어서도 가장 일관되게 싸워 왔어요. “너는 여성이라서, 너는 외국인이라서, 너는 레즈비언이라서, 너는 이슬람교도라서, 너는 소수민족이라서, 너는 비정규직이라서 나와 다르니까, 우리 굳이 서로 불편할 일 없게 섞이지 말고 각자 싸우자”라는 식의 태도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예요.

반대로 자본가들은 이런 분열 덕분에 더 수월하게 노동자들을 지배할 수 있어요. 그래서 주류언론들은 여성들이 애를 돌보지 않아서 문제라거나, 외국인들이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거나, 동성애자들 때문에 성이 타락한다거나, 이슬람이 테러를 조장한다거나, 소수 민족은 열등하다거나,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것은 정규직이라는 식으로 떠들면서 분열을 조장해요. 이런 거짓말들이 노동자들에게 침투하는 것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당사자’들이 아닌 노동자들도 함께 연대하며 싸우는 것이에요. ‘다함께’ 소속 건설 노동자들이 주변 건설 노동자들의 ‘상식’ — 젊고 임금이 낮은 이주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 에 도전하면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단지 용감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단결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알기 때문이에요. (〈레프트21〉 35호, ‘이주노동자와 단결해 싸우는 건설노동자들’)

③지구 상에 사회주의자들이 단 한 명도 없어도 어디선가는 파업이 일어날 것이고 투쟁이 벌어질 것이에요. 역사적으로도 사회주의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노동자들은 싸워 왔고, 이명박과 무바라크의 거짓말과 달리 2008년 촛불시위도, 2011년 이집트 반란도 사회주의자들이나 배후세력이 선동해서 일으킨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대체 왜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하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당연해요. 심지어 그 때문에 일각에서 거부감까지 보인다면 더더욱 그렇죠.

자본주의는 단지 경제 체제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습관, 의식, 심지어 출생과 죽음까지 모두 관장해요. 그야말로 ‘체제(system)’인 것이죠. 이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투쟁들은 — 수백만 명이 참가하는 정권퇴진투쟁, 수십~수백 명이 참가하는 임금 투쟁,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성희롱을 둘러싼 갈등까지— 비록 모양은 다 달라도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어요.

그러나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한국의 문제는 이명박 때문에, 이집트 문제는 무바라크 때문에, 홍익대학교 청소 노동자들의 문제는 총장이 ‘꼴통’이라서, 그리고 성추행 문제는 내 앞에 앉아 있는 “바로 저놈” 때문인 것처럼 보여요. 사회주의자들은 이명박, 무바라크, 홍익대 총장에 맞선 투쟁을 함께 하면서 투쟁 참가자들이 더 거대한 원흉인 자본주의 체제를 보게 하기 위해 주장을 해요. 그러나 막연하게 “세상이 다 썩어서 그래”라는 식의 주장으로는 설득이 될 리 만무하죠. 마르크스는 “만약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 사물의 본질이 일치한다면 과학은 쓸모 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마르크스주의는 바로 여러 현상들을 하나의 본질로 설명해주는 과학이자 혁명 이론이에요.

혁명 이론은 단지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혁명 직전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투쟁에서 사회주의를 주장하면서 그 주장을 입증하려고 해요. 돈과 빽, 경찰과 군대가 있는 지배계급에 비해 모든 것이 열세인 사회주의자들은 가장 일관된 주장과 실천, 설명을 통해 회원들을 확보하고 그들이 단지 눈앞의 ‘나쁜 놈’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전체에 맞서 싸우게끔 하는 것이죠. 조지 부시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서 가입한 저 사람이 낙태 금지 반대 투쟁에 참여하도록 만들고, 파업을 통해 가입한 노동자들이 G20 회담에도 반대하게끔 설득하고 조직하는 게 사회주의 단체의 구실이에요.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고, 우리가 최대한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려 하면서도 핵심 주장인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생략할 수 없는 이유예요.

“너무 길어서 읽다 짜증내면 어떡하지”라는 걱정도 들지만, ‘질문을 대충 건너뛰고 뭉게면서 넘어간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 나름 정리해서 쓰다 보니 길어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