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마르 카다피는 40년 동안 리비아를 통치했다. 그는 아랍 세계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권좌를 지켰다. 동시에, 카다피는 서방 정부가 언제나 거래를 할 수 있는 자였다. 

1969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을 때, 카다피는 자신을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같은 진보적 지도자로 내세웠다. 

미국에서 열린 리비아 혁명 연대 집회

1950대와 1960년대에 아랍 세계는 나세르가 급진 개혁을 도입하고 서방 제국주의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것에 열광했다. 

카다피가 이른바 ‘사회주의 공화국’을 내세웠지만 그의 체제는 사실 ‘줄서기’와 부패가 만연한 체제였다. 그는 새로 발견된 대형 유전을 이용해 부족들을 매수하고 잔인하게 반대파를 탄압했다. 

카다피가 자금을 제공한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조직들은 부패, 범죄행위와 잔인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과거에 미국과 영국 정부가 카다피와 갈등을 빚은 것은 그의 국내 정책 때문이 아니다. 그가 서방에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1986년 카다피를 암살하려고 전폭기를 파견했다. 전폭기가 쏜 미사일은 카다피를 맞추지 못했고 트리폴리의 주거지역에 떨어져 무고한 시민 1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미국은 1986년 스코틀랜드 로커비에서 발생한 팬암 항공기 폭발 사고를 포함해 카다피가 테러 사건들의 배후에 있다고 비판했다.

레이건은 카다피를 “미친 개”라고 비난하고 리비아에 대한 전 세계적 경제 재제를 시작했다. 

그러나 카다피는 애초에 있지도 않은 것으로 드러난 대량살상무기 계획을 ‘폐기’한 대가로 서방과의 냉랭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로커비 폭발 사건으로 고통받은 유가족들에게 보상금도 지급했고 이 폭발 사건의 범인으로 누명을 쓴 압델바셋 알메그라히에 대한 잘못된 판결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2004년 당시 영국 총리 블레어는 석유 기업 경영자들을 대동하고 리비아를 방문해 카다피와 “사막의 만남”을 갖고 대규모 사업을 벌일 계획을 논의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카다피의 굴복을 이라크 전쟁이 낳은 대표적 순효과로 선전했다.  

블레어와 회담한 다음부터 서방 진영은 카다피를 “미친 개”가 아니라 “지역의 실력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유럽 정부 지도자들은 앞다퉈 그를 환영했다. 카다피, 그의 아들들과 측근 인사들은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다.

그러나 이런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카다피 치하에 살고 있던 평범한 사람들은 잊혀졌다. 

서방 정부들은 카다피에 대한 태도를 다시 한 번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리비아 민중의 운명에는 별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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