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103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
오늘날 여성의 삶과 해방을 향한 투쟁

1908년 3월 8일, 미국 섬유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대부분이 이민자이자, 10대 여성이었던 이 노동자들은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은 캄캄한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심지어 18시간 동안 일했다.

견디다 못한 여성 노동자들은 더 나은 작업조건과 임금, 노동조합 결성권과 투표할 권리를 위해 폭력적인 탄압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섰다. 이에 영감을 받은 독일의 사회주의자 클라라 체트킨은 국제사회주의 회의에서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삼아 해마다 기념하자고 제안했다.

지난해 11월 7일 4만 명이 결집한 노동자대회에 참가한 여성 노동자들 여성의 다수가 노동자인 오늘날, 여성 차별적인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투쟁의 잠재력은 더 커졌다. ⓒ사진 임수현

그 후로 수많은 투쟁 덕분에 여성들의 삶과 의식이 향상됐지만 오늘날에도 여성들을 괴롭히는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49일간의 투쟁 끝에 승리한 홍익대 미화 노동자들의 외침은 오늘날 여성 노동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 줬다.

“요즘엔 여자들도 몸이 성할 때까진 일해야죠”, “우리가 아줌마라고 해도 부업이 아니고 가장입니다”라는 미화 노동자들의 말처럼 수많은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노동자로 살고 있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남성의 63퍼센트밖에 안 된다. 단적으로, 여성 노동자의 70퍼센트가 임금도 적고 불안정한 비정규직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에서 비롯한 성희롱, 폭언에도 시달리곤 한다. 현대차 하청업체, 홍익대학교 등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관리자들에게 “이년, 저년” 소리를 들으며 멸시받는다.

정부는 ‘여성 인력 활용’을 말하지만, 정작 여성들이 맘 놓고 일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보육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명박 정부는 ‘무상 보육’ 대상을 늘리고, 육아휴직비를 더 받을 수 있다고 홍보했지만, 노동자들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거나, 필요에 너무나 못 미치는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반쪽짜리

무엇보다 여성이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시설 자체가 너무 부족하다. 정부가 지난 수년간 민간 보육시설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온 결과, 값이 싸고 보육의 질도 상대적으로 좋은 국공립보육시설 비율은 겨우 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기업들은 직장 내 보육시설을 갖추지 않아도 별 제재를 받지 않는다. 남녀 임금 격차 때문에 여성들이 주로 육아를 전담하게 되는 현실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가 여성들이 ‘일도 하고 애도 볼 수 있다’면서 내놓은 유연근무제는 여성에게 반토막짜리 일을 하고 임금도 반토막만 받으면서 육아도 병행하라는 뜻이고, 불안정한 일자리만 늘릴 뿐이다.

여성을 얼굴과 몸매로 평가하는 세태는 더 노골화되고 있다. ‘꿀벅지’, ‘베이글녀’처럼 여성의 신체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며 ‘섹시한’ 몸매를 강조하는 모멸적인 단어들이 판치고 있다.

오늘날 여성은 뭘 하든 예쁘고 날씬해야 한다. 획일적인 미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수많은 여성들이 수술대 위에 오르고, ‘살과의 전쟁’을 벌인다. 그러지 못하면 기죽어 지내야 한다.

대중매체에서 여성의 섹시한 이미지와 벗은 몸은 상품 판매의 주요 수단이다.

지난해 말 28세의 프랑스 모델 이사벨 카로가 마른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다 결국 거식증으로 목숨을 잃은 사건은 이른바 ‘당당한 여성들의 시대’의 현주소를 보여 줬다.

여성의 몸이 온전히 여성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는 낙태다. 여성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출산 결정권이 필수적이다. 출산은 여성의 삶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낙태를 처벌하는 시대와 상황에서도, 불리한 환경에서 자신을 보호하고자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들은 계속 있어 왔다.

한국 정부는 지난 수십 년간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이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낙태를 묵인했다. 그런데 ‘저출산’ 현상이 지속되자 이명박 정부 들어 갑자기 낙태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와 같은 낙태금지론자들의 낙태 고발 소동 때문에 한때 낙태 시술비가 수백만 원으로 치솟아 여성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심지어 법원이 낙태한 한 여성에게 벌금형을 내리기까지 했다.

낙태 공격은 여성들의 애 낳는 구실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보수적 관념을 강화하고, 여성들을 위축시키고 있다.

3월 8일 여성의 날 집회는 여성을 옭죄는 이런 현실에 맞서 투쟁을 다짐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

왜 여성차별은 사라지지 않는가?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어났지만, 왜 차별은 또 다른 얼굴로 여성들 앞에 놓여 있을까?

그것은 현재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현재와 다음 세대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안정적인 틀이다.

수많은 여성 노동자과 남성 노동자 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아끼고, 장시간 일하고, 헌신한다. 여성들은 무보수로 아이와 남편을 뒤치다꺼리한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가 하고 있듯이 경제 위기 시기에 국가는 알량한 복지마저 축소하곤 한다. 이것은 가족에서 주로 돌봄 노동을 하는 여성들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만약 이런 부담을 국가가 완전히 책임진다면 많은 비용이 들 것이다. 자본주의는 여성을 집안일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물질적 풍요를 창출했지만, 그런 풍요를 여성 대중의 해방을 위해 사용하려 하지는 않는다. 국가와 기업들은 가사노동을 사회화하는 데 드는 부담을 책임지지 않으려고 개별 가정의 여성들에게 고통을 전가한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는 가족에서 여성이 하는 구실을 강조하고, 양육과 집안일을 여성의 본업으로 여기게끔 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노동을 부차적으로 취급하고 차별하는 것도 정당화된다. 온갖 여성 천대의 싹이 여기서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차별의 뿌리, 즉 자본주의 운영 방식 자체에 도전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질적 풍요를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해방시키는 데 사용해야 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이윤이 아니라 필요에 기초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러시아는 지금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가난한 상태였지만, 노동자평의회는 동네마다 무료 탁아소와 공동식당, 세탁소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비록 국제적 고립과 엄청난 궁핍 속에 이런 실험은 중단되고 혁명은 변질했지만, 러시아의 경험은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혁명이 여성의 삶을 뒤바꿀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21세기 여성해방

얼핏 보면 세계는 성별로 나뉜 것 같고, 성별로 따로 뭉쳐서 싸우는 게 최선일 것 같다. 물론 여성이라면 누구나 받는 억압이 있다. 하지만 모든 여성이 똑같은 억압을 겪지는 않는다. 부자 여성들은 돈으로 억압을 완화할 수 있고, 저임금과 육아 문제로 고통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사회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여성들은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것에서 큰 이득을 얻는다. 반면, 남성의 대부분인 노동계급 남성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희생양이다. 여성 주식 부자 1등인 ‘신세계’ 회장 이명희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를 혹사한다. 반대로, 주로 남성인 전북 버스 노동자들은 홍익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연대했다.

혁명에 나선 이집트 여성들 혁명은 여성을 둘러싼 조건도 변화시킬 수 있다. ⓒ사진 출처 Al Jazeera English

여성차별의 뿌리가 자본주의에 있기 때문에 그것에 맞서 싸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노동계급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날 여성 다수가 노동계급이다. 여성들은 뿔뿔이 흩어진 가정에서는 할 수 없는, 노동자 고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를 뒤흔들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정몽구야 수개월 동안 해외에서 놀다 와도 생산에 아무런 차질이 없지만, 현대차 노동자들이 일손을 며칠만 멈춰도 당장 일간지 1면이 파업 손실 액수로 뒤덮인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집단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집단적으로 행동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노동계급은 “뭉쳐야 사는” 집단이다.

자본주의는 성·성지향·인종 등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키지만, 중요한 순간에 노동자들은 단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투쟁은 이런 과정을 촉진시키고 서로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지름길이다.

이번 이집트 혁명에서 타흐리르 광장을 지키던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혁명 과정은 여성인 나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저는 지난 2주 동안 매일 24시간을 거리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성차별적인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집단적 기억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무언가가 발생했습니다. 모든 이가 그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지금 무바라크가 물러난 뒤에도 계속되고 있는 노동자 파업 물결 속에는 여성 노동자들도 있다. 이들이 함께 투쟁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여성차별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최근 몇 년간 대학가를 휩쓴 여성 미화 노동자의 투쟁과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성 노동자가 더는 나약하게 웅크리고 참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줬다. 특히 홍익대 미화 노동자들의 점거 투쟁은 성별을 뛰어넘는 노동자·학생들의 연대 속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런 투쟁 속에서 자본주의에 도전할 때,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103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 집회

노동과 삶의 권리를 위해 ― 여성, 이제는 행동이다!

3월 5일 (토) 오후 3시, 시청광장

※집회 후 교과부 앞까지 행진 예정 (변경될 수도 있음)

공공노조 서울경인지부 파업 출정식

(고려대, 고려대 병원, 연세대, 이화여대)

3월 5일 (토) 오후 2시, 시청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