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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굳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고수할 필요가 있을까?

이 글의 요지는 제목과 같다. 오랫동안 마음 한 켠에 간직해온 의문이었는데, 〈레프트21〉 50호 온라인 독자편지로 실린 종환 씨의 글 ‘신입생과의 진땀 빼는 토론 후기’를 읽으면서 다시 터져 나왔다.

“우리의 정치를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종환 씨의 주장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종환 씨와 토론한 새내기 분의 요지는 사회주의 정치의 ‘내용’을 솔직히 밝히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라는 ‘표현’에 거부감이 든다는 쪽인 것 같다.

굳이 그 표현을 고수하는 것이 우리의 잠재적 청중에게 “고민을 던져주는” 데 더 효과적일까? 나는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우리가 청중으로 삼는 진보적 대중의 대다수가 (예컨대 1980년대의 학생 운동가들이 그랬듯이) 모종의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면 우리도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써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사상의 원래 이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는 편이 우리의 청중에게 다가가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즉 ‘접근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사회주의’와 그들의 ‘사회주의’가 내용상으로 큰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사회주의자’라는 타이틀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그들과 대화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적어도 한국에서는) 진보적 대중의 다수는 의식적 사회주의자들이 아니다. 일부 극좌파 PD 활동가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라는 말은 기껏해야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더 많은 경우에는 소련 또는 북한식 스탈린주의를 연상시킬 것 같다. 뭔가 과거의 ‘실패한 길’을 짙게 연상시키면서 미래적 상상력은 자극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주장을 끈기 있게 경청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련과 북한이 어째서 사회주의와 전혀 무관한지를 설명할 기회라도 있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애당초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마이클 앨버트가 ‘파레콘’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듯이 우리도 사회주의 대신 다른 용어를 내세움이 현명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미 사회주의의 동의어로 심심치 않게 사용하고 있는 ‘민주적 계획 경제’에서부터 (다소 진부하지만) ‘노동자 민주주의’, ‘경제 민주화’, ‘무계급 무국가 사회’, ‘돈 한 푼 없이 살 수 있는 사회’ 등 다양한 표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대뜸 “그거 사실상 사회주의 아니냐?”고 지적할 것이다. 우리는 당당히 그렇다고 말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왜 북한식 ‘사회주의’와는 전혀 다른지, 늘 해왔던 대로 설명하면 된다. 하지만 그 때쯤이면 우리는 이전보다 현격히 더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