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의 민중 봉기

돌과 몽둥이로 탱크를 무찌르다

 

크리스 하먼은 라틴 아메리카를 여러 차례 방문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이고, 국내에 번역 된 저서로는 《쉽게 읽는 마르크스주의》(북막스), 《신자유주의 경제학 비판》(책갈피) 등이 있다.

 

이번 봉기는 지난 9월 20일 군대가 시위대 7명을 살해한 뒤 한 달 동안 계속된 파업과 시위의 정점이었다. 당시 시위대는 신자유주의 정부가 천연가스를 미국으로 수출하려는 계획을 놓고 국민투표를 요구했다.

군대가 발포하자 전국에서 도로 봉쇄가 잇따랐고 볼리비아 노총(COB)이 총파업을 호소했다. 그러나 처음에 시위는 성공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고용주들이 파업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계속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10월 12일에 수도 라 파스 교외의 대규모 노동계급 거주 지역인 로스 알토스에서 군대가 또다시 학살을 저질렀다. 그 뒤 며칠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시위대는 70명이라고도 하고, 다른 이들은 130명이라고도 한다. 확실한 것은 학살 때문에 전체 노동계급과 농민 대중과 도시 빈민이 한데 뭉쳐 대통령인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도를 제거하기 위한 거대한 운동에 나섰다는 점이다.    

로사도는 미국식 교육과 북미식 억양의 스페인어 때문에 “엘 그링고”[미국인]로 불리는 백만장자이다. 10월 17일이 되자, 볼리비아가 억압적 군사 정권이냐 봉기의 성공이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음이 명확해졌다. 전국에서 총파업의 효과가 나타났고, 시위대가 알 알토와 라 파스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상황은 20개월 전에 이웃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IMF의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강요한 대통령 데 라 루아를 쫓아낸 것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이번에 볼리비아에서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단순한 자생적 군중이 아니었다. 운동의 중심부에는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한 볼리비아 광부들이 있었다! 농민연합과 코칼레로스―미국의 “마약과의 전쟁” 때문에 유일한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코카 재배자들―의 조직도 광부들과 함께 행진했다.

 


 

미국은 잔호간 정권을 전폭 지지했다.

 

볼리비아의 민중 봉기는 조지 W 부시에게 한방 먹였다. 로스 알토스 학살 바로 다음 날 미국 국무부는 황급히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도를 변호했다.

“미국 국민과 정부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볼리비아 대통령을 지지한다. 미국은 볼리비아의 헌정 질서가 중단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비민주적 방식으로 수립된 정권을 지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라 파스의 미국 대사관은 “볼리비아 정부가 범죄적 폭력에 기초한 정부로 교체돼서는 안 된다. 돌과 몽둥이는 평화적 저항의 수단이 아니다.” 하고 덧붙였다.

그러나 미국은 어린이도 포함된 비무장 시위대에게 기관총을 발사한 볼리비아 정부를 비판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잡지 〈풀소〉(Pulso)는 볼리비아 정부가 강경 탄압을 자행하는 과정에서 미국 관리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주장했다.

 


 

볼리비아 노동자 투쟁의 역사

 

볼리비아는 칠레뿐 아니라 아르헨티나·페루·파라과이처럼 사회적 격변을 겪은 나라들에 인접해 있다.

1530년대: 볼리비아는 스페인에 정복당한 잉카 제국의 남부 지역이었다. 스페인 정착민들은 대토지를 차지하고 토착민들의 강제 노동을 이용하는 세계 최대의 은광산을 지배했다.

1820년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지만 스페인어를 말하는 엘리트들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착민들의 권리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1880년대: 세계 최대의 주석 광산이 발견됐다. 극소수 상층 가문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토착민 광부들의 평균 수명은 겨우 35세였다.

1920년대: 단결한 광부들은 대규모 파업들을 일으켜 자신들의 힘을 보여 주었지만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그들은 지배 엘리트들에 맞선 끊임없는 저항의 선두에 섰다.

1952년: 혁명이 일어났다. 광부들은 라 파스로 행진해서 군대를 무장해제시켰다. 노동자 시민군이 결성되고, 노동자들이 광산을 통제했으며, 농민들은 대토지를 분할했다. 그러나 광부 지도자들은 중간계급 민족주의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넘겼다. 볼리비아 자본가 계급의 필요에 맞는 개혁 조처들이 시행됐다.

1960년대: 군대가 광부들을 무장해제하고 파업 노동자들을 학살하고 광산 지역에 주둔했다. 군부 독재가 이어졌다.

1961∼71년: 총파업과 함께 새로운 노동자 투쟁 물결이 일어났다. 잠시나마 민중의회가 기존 국가 기구들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운동의 지도자들이 중간계급 정치인들에게 신뢰를 보내면서 1952년의 실수를 되풀이했다.

1970년대: 반세르 장군의 쿠데타가 일어나 잔인한 탄압이 뒤따랐다.

1982년: 총파업으로 나라가 거의 내전 상황에 빠졌다. 군부는 권력을 포기했다. 중도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들은 광산의 일자리를 절반으로 줄이면서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2000년: 코차밤바에서 물 사유화에 반대하는 대중 반란이 일어났다. 시위와 도로 봉쇄로 전국이 마비된 끝에 물 사유화 반대 투쟁이 승리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코칼레로스 운동의 지도자 에바 모랄레스가 광산업 백만장자 산체스 데 로사다를 거의 이길 뻔했다.

 


 

그들은 어떻게 싸웠나

'거리 전투를 준비하기'

10월 16일(목요일)  엘 알토와 라 파스의 거의 모든 하층계급 지구에서 쏟아져 나온 25만 명 이상의 노동자·민중이 정부 청사를 포위했다. 그들은 볼리비아 역사상 가장 강렬한 증오의 대상인 백만장자 대통령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도에게 사임하고 볼리비아를 떠날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산 프란시스코 광장에 모인 민중은 대중 동원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합의하고 사람들에게 탱크와 기관총에 맞선 거리 전투를 준비하라고 알렸다.

볼리비아 노동자센터(COB)의 지도자인 광부 하이메 솔라레스는 “각 블록의 각 지구마다 참호를 팝시다. 자위대를 조직합시다.” 하고 말했다. 대중의 구호는 어제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저마다 몽둥이를 흔들면서 “아오라 씨, 게라 시빌, 아오라 씨, 게라 시빌”(Ahora si, guerra civil, ahora si, guerra civil)(“그래,  이제 내전이다”) 하고 외쳤다.

도시 중심에는 광부, 코카 재배자, 남부에서 온 농민, 학생, 교사, 연금수령자, 노점상, 젊은이 들이 모여들었다. 젊은이들이 아주 많았다. 어떤 거리에서는 충돌이 발생해서, 최루탄, 바리케이드, 불타는 타이어를 볼 수 있었다. 최루가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피를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거리에서는 코카 재배자들과 지역민들이 빵과 음료수를 경찰들과 나누어 먹었다. 이것은 모순되기도 한, 다양한 모습을 가진 민중 봉기였다.

중간계급이 더 많이 사는 지구에서도 대통령의 사임을 바라는 기도회가 교회에서 열렸다. 이러한 저항의 지도자들은 “우리는 사람들이 계속 살해당하는 것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 우리는 상황이 정상화되기를 바란다. 해결책은 대통령이 사임하는 것밖에 없었다.” 하고 말했다.

10월 17일(금요일)  볼리비아 의회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신자유주의 정당들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거리에서 잃은 것을 되찾으려 애를 썼다. 그들은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퇴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여러 도시의 거리들과 전국의 도로들은 노동자와 빈민 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공식 권력을 압도한 진정한 권력이었다.

돌과 몽둥이가 탱크와 기관총을 무찔렀다. 그러나 지도자들 내부에는 카를로스 메사[새 대통령]를 당분간이라도 인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둘러싸고 의심과 논쟁이 존재한다. 의회에서 네 블록 떨어진 산 프란시스코 광장에서는 손에 다이너마이트를 든 광부 수천 명이 대중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10월 18일 (토요일)  대통령[로사도]은 마이애미로 날아갔다. 군대는 거리를 떠났다. 광부, 코칼레로스, 농민 들은 환호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새 정부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