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샤갈 전시회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예술가, 작품, 세계를 복잡한 연관을 가진 하나로 바라본다. 그런 의미에서 여섯 주제 아래 구성된 샤갈 전시회는 만족스럽지 않다. 차르 러시아의 유대인 억압, 1917년 러시아 혁명, 파시즘과 전쟁 등의 세계와 그, 그의 작품은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전시회 웹사이트는 그가 1915년 혁명적 시인들과 조우했고, 1917년 혁명 문화부 산하 미술담당으로 지명됐고, 1918년 미술위원으로 그의 고향 비테프스크(Vitebsk)에 미술학교를 설립한 것을 나열한다.

3월 1일 덕수궁 미술관에서 전시가 끝난 〈피카소와 모던 아트〉는 근대 미술의 변화를 시대 변화와 함께 보여 주는 도표를 복도 한쪽 벽에 붙였는데, 이 도표는 19세기 중반 마르크스·엥겔스, 1968년 사회운동, 1924년 러시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언급한다.

하지만 이것은 1917년 혁명으로 영감을 받은 많은 러시아 예술가들이 후에 유럽 예술을 이끄는 견인차 구실을 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반혁명군과 제국주의 간섭군 때문에 황폐화된 러시아에서 고개를 내밀었고, 1924년 당시에는 아직도 많은 혁명가들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대해 투쟁했다는 것도 모른 척한다. 심지어 전시의 일부인 칸딘스키와 샤갈이 러시아 혁명을 환영하고 혁명 러시아에서 새로운 세계 건설에 동참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는 비겁한 생략이거나 더러운 왜곡이다.

1924년 트로츠키는 국가가 다양한 예술가 그룹·경향들을 “친혁명/반혁명의 잣대로 재지 말고, 예술적 자기 결정의 완벽한 자유를 줘”야 한다고 진술했다. 나중에 솔제니친처럼 러시아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쫓겨난 소설가 네크라소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우리가 자랑스러워 해야 할 사람들을 쫓아낼 정도로 지극히 ‘자유’롭지 않았는가? … 솔제니친은 쫓겨났고 … 미술가 샤갈,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도 … KGB 스파이들이 우리를 위해 책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심포니를 작곡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1917년 혁명 이후, 10년 동안 서로 다른 예술 사조들이 경쟁하고 논쟁했다. 옷, 가구, 영화를 포함해 삶의 모든 측면이 혁신됐다.

샤갈은 민속 이야기, 전통, 상상 속에서 영감을 발견했다. 차르 러시아의 체계적인 반유대주의와 러시아 혁명은 그의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페체르스부르크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시절(1906 ~ 1910)을 회상하면서는 “유대인뿐 아니라 다른 많은 러시아인들도 살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썼다.

1914년 파리에서 고향 비테프스크로 돌아온 그는 1차 세계대전으로 고통받는 군인, 거지, 유대인과 가족을 그리기 시작한다. 비테프스크는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 있는, 오늘날 벨라루스의 한 지역으로 전쟁의 최전선에 있었다.

전쟁 중 페체르스부르크에 있던 샤갈은 당시 혁명적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군인들이 전선을 떠나고 있다. 탄약과 이(lice), 모든 것이 참호 속에 버려지고, 그들의 입에서 자유가 포효하고 있다. 나도 그대로 앉아 있지 않았다. 나는 사무실과 잉크와 기록들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선을 포기했다. 나는 즈나멘스키 광장, 라테니와 네프스키(1917년 혁명당시 민중의 거점들)로 달려갔다 … 무언가 막 탄생하고 있었다.” 이것이 혁명을 경험하는 노동자와 예술가들의 사고였다.

샤갈은 1918년 비테프스크에서 미술학교와 미술관을 세우고, 전시회, 토론회, 예술행사를 조직했다. 또 혁명 1주년 기념식을 조직했다. 그는 도시 전체를 거대한 배너, 아치, 깃발들로 장식했다. 그는 이것이 그의 가장 커다란 캔버스라고 보았다.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그의 작품을 소장할 것 같은 은행가들은 두려움에 떨겠지만, 샤갈은 전 은행장의 저택에 미술학교를 열어 3백 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비테프스크 신문은 “수많은 민중의 피와 땀, 고통과 눈물로 지워진 은행장의 집에서 새로운 문화의 새벽이 자라고 있다”고 선언했다.

말레비치와 엘 리시츠키와 같은 미래주의·절대주의 예술가들이 그와 동참하기 위해 비테프스크로 왔다. 그러나 말레비치는 절대주의가 진정한 혁명적 예술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이들을 공격했다. 절망한 샤갈은 학교를 사임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1933년 나치가 그의 작품 일부를 공개적으로 소각했다. 1937년 나치 독일의 모든 미술관에서 샤갈 작품이 내려지고, 59점이 나치에 압수되며, 그중 3점이 퇴폐미술전에 전시됐다.

1941년 미국으로 갔으나, FBI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샤갈에 대한 한 전기에 따르면, 스탈린에 대한 그의 태도는 나찌와의 전쟁에서 소련군의 구실과 그의 고향 비테프스크를 해방시킨 것 때문에 혼동되었던 것 같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의 그림은 보라, 노랑, 파랑의 눈부신 색채로 가득하다. 그것들은 러시아 혁명과 유대·소수민족 해방이 미술과 나눈 대화다. 트로츠키는 “과학이나 예술은 명령을 쫓지 않고, 오히려 그 근본에서 그것을 거부한다. 예술적 창조는 심지어 그것이 사회운동에 봉사할 때조차 그 자신의 법칙을 갖는다. 진정으로 지적인 창조는 거짓, 위선, 순종의 정신과 함께할 수 없다. 예술이 그 자신에 진정으로 충실하면 그것은 혁명의 강력한 동맹자가 될 수 있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마르크 샤갈과 같은 예술가들은 러시아 혁명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