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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 용어를 꺼려선 안 된다

김종환 씨가 쓴 ‘신입생과의 진땀 빼는 토론 후기’와 그 토론 당사자인 임승현 씨의 답변, 그리고 김종환 씨의 재답변을 재미있게 읽었다. 임승현 씨와 비슷하게 20년 전 이맘때 《전태일 평전》을 읽고 밤잠 설쳤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던 나처럼, 신선한 자극을 얻은 독자들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앞으로 활동에서도 건설적인 토론과 논쟁으로 사고를 가다듬으며 서로 배워 가기를 기대한다.

나는 그 토론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는 했어도 새로운 쟁점으로 불거진, ‘사회주의’를 다른 표현으로 바꾸자는 천경록 씨(‘굳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고수할 필요가 있을까?’)의 의견에 반대 주장을 펴 보겠다.

우선 ‘접근성’이 논란인데, 사회주의자들이 급진화하는 청중과 접촉할 때 마르크스주의를 전제조건처럼 내세우거나, 사회주의 원칙을 모두 받아들여야만 함께하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에 저항할 진지한 태세가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토론하고 함께 활동하면서 거리를 좁혀 갈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사회주의자가 되겠다고 이마에 써 붙인 사람만 만나겠다고 한다면, 그런 단체는 앞날이 캄캄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 주변에 그런 지각 없는 사회주의자는 별로 없다. 오히려 지금 토론의 초점은 사회주의적 주장을 듣고 이미 그것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표시한 사람에게 사회주의 정치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보인다.

엉뚱한 논점

나는 사회주의자가 자신의 정치를 설득할 때 지나치게 수줍어하거나 쓸데없이 우회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감과 긍지, 열정이 없는 선전·선동이 매력적일 리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피하자는 천경록 씨나,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할 필요 없다는 이민규 씨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내가 볼 때 임승현 씨가 청중의 ‘접근성’과 거부감을 얘기한 맥락은 사회주의라는 대안은 지지하지만 단지 표현을 문제 삼은 것이라기보다는 내용 그 자체에 대한 이견이었던 듯하다.

자본주의 폐해의 해결책이 정말 사회주의인지, 다른 억압받는 부문에 비해 왜 특별히 노동계급이 중요한지에 관한 물음이 핵심이었음은 김종환 씨의 글에 대한 임승현 씨의 답변 글에서도 나타난다. 운동을 막 시작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던질 법하고 던져야 할 물음이다.

우리는 이런 물음을 던지는 진지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잘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김종환 씨의 성실한 답변을 인상적으로 본 나는 이 대목에서 사회주의 용어를 쓰지 말자는 얘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사실 좀 엉뚱하다고 생각했다.

접근성

대중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사회주의 용어를 쓰지 말자는 천경록 씨의 주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대안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 급진화하는 진지한 청중과 접촉할 때 더 좋다는 생각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운 ‘미니맑시즘’에 상당수 새내기들이 참가했고, 벌써 10년째 매년 여름 다함께가 주최하는 ‘맑시즘’ 행사에도 수백 명의 새로운 청중이 몰리고 있다. 이것만 봐도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워서 진지한 젊은이들의 접근이 어려워졌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를 부각하지 않는 제목을 붙인 다른 좌파단체들의 비슷한 강연회에 비해 맑시즘 행사가 비할 데 없이 성황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임승현 씨와 김종환 씨의 토론을 보면 사회주의에 대한 주장을 에두르지 않고 명확하게 펴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새삼 알 수 있다.

임승현 씨가 참여한 ‘미니맑시즘’을 주최한 대학생다함께와 〈레프트21〉이 토론 중에 분명하게 사회주의적 대안을 소개한 덕분에 참가자들의 문제의식도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든, 반대든, 유보든 어느 방향이든 명확해졌을 것이다.

덕분에 임승현 씨와도 왜 사회주의가 대안인지에 관한 더 깊은 토론이 가능했고, 천경록 씨의 생각과는 반대로 ‘설명할 기회’가 오히려 더 확장됐다. 그 결과 참석자 가운데 진지한 일부 새내기들이 우리와 함께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개방적인 분위기

또 다른 쟁점은 사회주의 용어가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 같은 실패한 대안을 연상시켜 잠재적 청중과의 대화에 방해가 되니 다른 용어로 바꾸자는 것인데, 내가 볼 때 이는 임승현·김종환 씨의 애초 토론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천경록 씨가 새롭게 제기했고 이민규 씨도 일부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1980년대에 비해 지금의 진보적 대중이 사회주의에 더 큰 거부감을 갖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구 소련과 동유럽 몰락 이전 시기에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던 활동가들 상당수가 모종의 사회주의에 열린 자세였다가 1990년대 초엽 이후 사회주의를 부정하게 됐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활동가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개방적인 분위기가 있었던 당시조차 그들 중 다수가 “의식적 사회주의자”였다고 보는 것은 과장이다. 군사독재 타도를 염원하는 다수 대중은 김대중·김영삼 같은 야당 정치인을 대안으로 봤고, 일부는 급진 자유주의 사상에 이끌렸고, 좀더 왼쪽의 적은 일부는 민중주의나 신디칼리즘(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정치를 추구했으며, 구 소련이나 북한 사회를 대안으로 삼는 급진 좌파 사이에서는 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선전·선동하기가 녹록치 않았다. 스탈린주의의 강한 유산이 방해가 됐고, 국가보안법을 내세운 극심한 국가 탄압으로 훨씬 은밀하고 수공업적 방식으로 활동해야 하는 제약도 컸다.

오히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 정치를 드러내 놓고 토론할 여지가 확장됐다고 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같은 진보정당(넓은 대중 사이에는 모종의 사회주의자로 여겨지기도 한다)이 제도권에서 활동하는 요즘, 더구나 2008년 위기 이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물음이 광범하게 던져진 이때, 사회주의자들이 왜 명확한 용어로 자신의 견해 밝히기를 꺼린단 말인가!

나는 국제적 맥락에서든 한국 사회에서든 스탈린주의의 폐해가 진정한 사회주의 대안 건설에 끼치는 장애 정도는 예전에 비해 약화됐다고 본다.

실용적 발상

오늘날 진정한 사회주의 정치는 스탈린의 핍박에 맞서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를 옹호한 트로츠키의 용기와 지성, 지칠 줄 몰랐던 투쟁에 빚지고 있다. 유럽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는 물론, 그들의 몰락과 후퇴기에도 사회주의 전통을 공개적인 방식으로 꿋꿋이 고수해 왔다. 공산당의 몰락과 노동당의 배신 속에서 영국 사회주의자들은 성장해 오지 않았던가. 스탈린주의나 사회민주주의에 따른 오염을 걱정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다른 말로 바꾸자는 얘기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끝으로, 사회주의를 다른 표현으로 바꾼다는 실용적 발상 자체가 문제다. “노동자 민주주의”나 “민주적 계획경제”, “무계급 무국가 사회” 같은 말이 미래 사회의 운영원리를 소개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혁명가에게 있어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노동계급이 쟁취할 미래 사회를 단순히 묘사하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제1인터내셔널 첫 문장에 쓴 대로 “노동계급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자본가계급을 위한 국가가 아닌 완전히 다른 종류의 국가 건설, 노동자평의회를 통한 노동계급 권력 장악을 뜻한다.

이 과정이 성공하려면 노동계급의 선진부위가 미리 결집해 변혁 정치조직을 만들고 국제 노동계급의 투쟁 경험의 정수를 배워 장차 근본적 사회변혁을 성공으로 이끌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마르크스와 레닌, 트로츠키 등으로 이어져 온 진정한 사회주의 전통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는 근본적 사회변혁을 쟁취할 수단과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따라서 다른 용어로 대체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