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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복지 ②:
사회투자국가론과 ‘제3의 길’

 [편집자] 무상복지와 재원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한창이다. 박근혜는 한국형 복지를 내세우고 이명박은 ‘복지 포퓰리즘’을 비난하는가 하면 민주당은 무상복지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일관된 좌파적 관점이 필요한 때다. 다섯 차례에 걸쳐 한국 사회와 복지에 대한 기사를 연재한다.

 
① 무상복지가 경제 위기를 낳는다?
② 사회투자국가론과 제3의 길
③ 보편적 복지와 고전적 사회민주주의
④ 복지국가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⑤ 좌파적 대안

1998년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제3의 길》이라는 이름의 책을 내놓았다.

기든스는 세계 자본주의가 ‘지식기반경제’로 완전히 탈바꿈했고, 따라서 새로운 시대에 맞춰 사회민주주의의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제3의 길’ 전략이다.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의 길도 아니고, 1970년대 후반부터 득세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의 길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제3의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천에서 ‘제3의 길’ 전략은 명백히 신자유주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1996년에 집권한 영국 노동당 토니 블레어 정부는 이미 이른바 ‘신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노동당의 우경화를 꾀하며 전임 보수당 정부들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던 터였는데, 사실 ‘제3의 길’ 전략은 이런 정책을 이론화해 표현한 것이었다.

기든스 자신도 “좌파는 이제 시장을, 부를 창출하는 과정에서의 기업의 역할을, 사적 자본이 사회적 투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로 ‘제3의 길’ 전략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래서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의 최선의 이데올로기적 외피” 노릇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제3의 길’에는 “신자유주의적 우파의 정책들이 … 서툴게 숨겨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제3의 길’ 전략이 지향하는 복지국가 모델이 사회투자국가다.

사회투자국가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복지 지출도 투자적 성격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수익성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즉, 고용이 너무 ‘안정’돼 있기만 하면 기업들의 이윤이 압박을 받으니 ‘유연성’을 도입해야 하고(자유로운 해고, 비정규직 고용 확대), 복지 혜택을 받는 만큼 개인도 노력해야 하고(실업 급여의 대가로 구직 활동 증명과 저임금 일자리 강요), 복지를 너무 많이 주면 근로 의욕이 감퇴하는 등 ‘복지병’이 생기니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적정한’ 수준으로 지급해야(급여 축소, 보편주의 폐기, 엄격한 자산조사 시행)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회투자국가는 ‘지식기반경제’에서 핵심인 교육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럴 때조차 교육은 권리가 아니라 ‘투자’의 일환이었으므로 문제를 낳았다.

연구 성과에 따라 국고 지원에 차등을 두면서 대학 간 경쟁이 심화했다. 이는 교수 간, 교원 간, 학생 간 경쟁 심화로 이어졌고, 학내 민주주의도 후퇴했다.

이처럼 1990년대 영국에서 사회투자국가의 논리는 현실에서 노동계급과 저소득층에 주는 복지를 줄이는 결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제3의 길’, 사회투자국가 정책을 도입했다. 영국과 달리 한국의 복지가 워낙 꾀죄죄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정책이 한편에서는 일부 복지 지출을 늘리는 효과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보험료를 대폭 인상하고 연금을 절반 가까이 삭감했다. 노동자와 서민의 삶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고 김대중·노무현 10년 동안 되레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

현재 국민참여당의 유시민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사회투자국가 정책을 거의 그대로 계승해 주장한다.

문제는 진보진영의 일부 논자들도 사회투자국가의 논리를 일부 수용한다는 점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대표적인데, 복지를 대폭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사회투자국가 논리와 다르다.

유용한 무기?

그 이면에는 한국에서 복지 확충은 ‘현실적으로’ 지배 엘리트의 일부 분파까지 설득해야 가능하고, 그러려면 복지 지출이 경제성장에도 이바지할 수 있음을 보여야 한다는 사고가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진보 정당이 아직 독자 집권할 만큼의 세력이 안 되는 한국 상황에서는 복지 확충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서 사회투자국가의 논리가 유용할 수 있다고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사회투자국가론은 경제성장 논리를 받아들인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복지를 확충하는 데서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없다.

첫째, 경제성장 논리를 받아들이면 ‘복지병’, ‘복지 의존성’ 등 복지 확충에 반대하는 주장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어렵다. 이는 불필요하게 요구 수준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국민참여당은 “시민들의 … 모럴 해저드”를 이유로, 노동자들의 보험료를 대폭 인상해서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자는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의 제안조차 반대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 이상이 교수는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를 이끌고 있는데 그는 그리스의 재정 위기가 ‘과도한’ 복지 지출 때문이라는 보수파의 논리를 일부 수용했다.

둘째, 좀더 중요하게는, 복지를 대폭 확충하려면 노동계급의 강력한 투쟁이 필요한데 경제성장 논리는 이윤에 타격을 주는 노동자 투쟁을 군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이나 스웨덴 복지국가의 역사를 봐도, 한국 역사를 봐도 복지가 대폭 확충되거나 개선되는 배경에는 강력한 노동자 투쟁이 있었다. 특히 요즘처럼 경제 위기 시기에 지배계급은 강력한 투쟁에 직면하지 않고서는 스스로 복지를 확대할 리 없다.

지배계급의 거짓말과는 달리 복지를 대폭 확충할 수 있는 돈은 충분하다. 부자들을 위해서만 쓰이는 돈을 노동자·민중을 위한 복지 확대로 이전시키려면, 경제성장을 약속하며 저들을 설득하려 할 것이 아니라 이윤 체제를 위협하며 단호하게 투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