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븐 오븐든 방한 강연 - 반자본주의운동의 미래

 

영국의 좌파 신문 〈사회주의 노동자〉의 케븐 오븐든 기자가 8월 16일 한국을 방문해 강연했다.

‘[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편집자의 첨가이다.

 

반 전 운동에 대한 어제 토론에    이어 오늘은 반자본주의 운동의 미래에 대해 토론할 참입니다. 물론 이 둘은 매우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세계적 운동이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것을 목격했습니다.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뒤로 아직 4년이 채 안 됐습니다. 지난 주말[8월 9일]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사건만 보더라도 이 운동의 규모를 다시금 실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말 프랑스 남부의 라르작에서는 반자본주의 축제가 열렸습니다. 조직자들은 3만 명 정도 참가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30만 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농민 지도자 조제 보베가 시위에 참가할 수 있도록 그를 감옥에서 풀어 줘야만 했습니다. 그를 계속 가둬놓을 경우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혹자는 이 운동을 반세계화 운동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반세계화”라는 수식어는 이 운동에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운동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세계적인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이 운동의 절정에 해당하는 순간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G8[주요 8개국 회담], IMF, 그리고 여타 국제 회담장 밖에서 줄기차게 일어난 시위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구텐베르크, 피렌체, 바르셀로나, 제노바, 멜버른, 요하네스버그, 퀘벡 등지의 시위 말입니다. 또한 포르투 알레그레와 인도의 카델라바드에서도 커다란 “대항 회담”들이 열린 바 있습니다.

우리의 적들은 이 운동이 제기하는 위협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습니다. 〈파이낸셜 타임스〉 신문은 2001년 7월 제노바 시위 직후에 어느 기사에서 “반(카운터)자본주의의 등장”을 얘기했습니다. 그들은 수천만 명을 아우르는 이 세계적인 정치 운동의 중심부에는 수만 명의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존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프랜시스 후꾸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지 10년이 조금 지난 현 시점에서 세계 자본주의 논리는 다시 한 번 도전받고 있는 듯하다.” 이처럼 새로운 운동의 파고는 자본주의가 너무 막 나간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했습니다. 주식시장의 강요로 극단적인 이윤 추구 논리를 따라야 하는 기업들이 환경을 수탈하고, 생명을 파괴하며, 애초의 약속과는 달리 가난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이 그러한 생각을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기업주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정치인들과 정치 기구들도 그러한 의혹의 대상입니다.

방금 언급한 〈파이낸셜 타임스〉가 반자본주의 운동에 관한 연재 기사를 기획했습니다. 그 처음이자 마지막 기사가 9·11 때 나왔는데, 거기서 그들은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공격과 그에 뒤따를 전쟁이 반자본주의 운동을 살해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는커녕 반자본주의 활동가들은 세계 반전 운동의 중심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반자본주의 운동 자체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현 시기의 특성을 나타내는 운동입니다. 왜냐하면 이 운동은 단지 시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것의 대안에 관한 논의가 전 세계적으로 부활하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승리를 선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현상입니다.

 

부활

 

여러분 가운데 일부는 1990년대 초반에 우익이 얼마나 승리감에 도취돼 있었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당시에는 자유시장 자본주의보다 나은 대안은 없다는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좌파들의 투쟁은 파편화됐습니다. 그 시기는 노동자 투쟁의 오랜 하강 국면의 일부였습니다. 중요한 노동자 부문들이 투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예컨대 1979년에는 이탈리아의 피아트 자동차 노동자들이, 1984년과 1985년에는 영국의 광부들이, 1982년에는 인도 봄베이[현 뭄바이] 섬유 노동자들이 패배했습니다. 물론 모든 투쟁이 패배한 것은 아닙니다. 1980년대 말에 남한에서는 파업 투쟁이 거대한 고양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래도 체제 옹호론자들은 ‘그건 단지 권위주의 정권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향한 이러한 질주가 시작되자마자 1990년대 말에는 그에 대한 반작용이 생겨났습니다. 사유화, 제3세계 외채, 1997년의 동아시아 위기는 모두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을 부추겼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5년 동안 우리는 다양한 쟁점을 가지고 싸우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이 지구적인 운동으로 함께 모이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거에도 여러 차례 일어난 투쟁 물결, 투쟁의 고양기에 견줄 만합니다. 예컨대 그것은 1840년대, 제1차세계대전 전후의 기간,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의 상황에 견줄 만합니다. 우리는 아직 혁명적 시기에 돌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 각지에서 점차 심화하는 급진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전의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반자본주의 운동에도 종종 다른 운동과 구별되는 고유한 언어와 특질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물결들과 비슷한 요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운동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둘러싸고 예전의 운동들이 제기했던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의문은 전 세계의 좌파들에게 던져진 것이었습니다. 좌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즉, 투쟁의 침체기에나 들어맞는 활동 방식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혁신을 통해 투쟁의 새로운 고양 국면에 개입할 것인가. 그나마 장래성 있는 좌파들은 바로 새로운 투쟁에 연루되는 쪽을 선택한 좌파들입니다. 혁명적 정치의 핵심은 주위의 변화하는 사태를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지난 4년간 반자본주의 운동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 의문들을 제기했습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해답에 운동의 사활이 걸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번째 의문은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 의문이란,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무엇인가?’입니다. 운동 내부에서는 문제의 핵심이 과연 신자유주의냐 아니면 자본주의냐를 둘러싼 논쟁이 있습니다. 시애틀 시위에서 미국의 노조 활동가인 제럴드 맥킨지라는 사람은 1960년대의 구호 하나를 재활용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체제의 이름을 밝혀야 한다. 그 이름은 기업 자본주의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명쾌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에서 다수파를 차지하는 세력들의 주장은 사뭇 다릅니다. 그들의 논의는 단지 워싱턴 컨센서스와 자유시장, 즉 신자유주의에서 그칩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이 자본주의의 근본 성격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때는 자본주의 하에서도 좋은 시절이 있었고 그 때는 오늘날의 문제들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제3세계에 있는 혹사 공장의 끔찍한 노동조건에 관한 나오미 클라인 같은 탁월한 저자들의 묘사는 19세기 영국의 상황에 관한 찰스 디킨스의 묘사[《어려운 시절》에서 읽을 수 있는]나 20세기 미국에 관한 업튼 싱클레어의 묘사[《정글》에서 읽을 수 있는]와 거의 일치합니다. 무엇보다 초기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 관한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저작[《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서 같은 그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보다 왠지 더 좋았던 시절로 여겨지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시기인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장기 호황 시기를 살펴봐도 역시 체제의 끔찍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기간에 아프리카 대륙 거의 전체가 경제 발전에서 배제됐습니다. 또한 핵무기 경쟁이 있었습니다. 경제 체제의 안정은 핵무기 개발에 돈을 쏟아붓는 광기에 의존했습니다. 더욱이, 경제 발전을 위해 국가가 경제에 개입한 곳에서도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남한에서는 이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1960∼80년대의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최장의 노동시간과 최악의 노동조건을 경험한 나라에서 국가 주도의 발전 모델이 시장경제 모델보다 낫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조차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 제도가 확장된 시기는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한 복지제도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공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논의하는 대상은 단순히 신자유주의 또는 워싱턴 컨센서스 정책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 성격입니다. 어째서 자본주의가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들을 이윤 추구에 종속시키는지를 말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적을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싸우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단지 몇 가지 정책만을 적으로 여긴다면 그 몇 가지 정책을 바꾸기 위한 전술을 찾게 됩니다. 반면에, 약 1만 명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운영하는 최상위 300개 기업들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경제 체제를 우리의 적으로 본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변혁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 매우 다른 전망이 보일 것입니다. 그들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하게 됩니다.

체제 수호자들은 신자유주의만 문제 삼는 사람들의 불완전한 체제 비판을 이용해 그들의 저항을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흡수하려 합니다. 그들은 특히 운동 내의 NGO들을 겨냥했습니다. NGO들과 대화를 추진함으로써 저항을 완화 · 흡수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밖에 더 세련된 시도들도 있습니다. 2002년 초에 리오넬 조스팽은 여전히 프랑스 총리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내각의 절반을 포르투 알레그레 세계사회포럼에 보냈습니다. 이전의 다섯 개 우파 정부가 사유화한 것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이 사유화한 바로 그 조스팽 정부가 말입니다.

운동의 대다수 세력들은 올바르게도 이런 자들의 추파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황폐화에 맞서 싸우는 우리에게 국가가 동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하여 국가가 과연 무엇이냐는 문제는 반전 운동 내에서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국가를 노동자들의 이익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조차 종종 오류를 범합니다. 일례로, 가장 유명한 반자본주의 도서 《노 로고》[중앙M&B]의 저자인 나오미 클라인은 국가를 길 위에 놓인 바위에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바위를 통과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1백만 마리의 개미떼처럼 바위를 빙 둘러가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제3세계 외채에 관해 아는 것의 대부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수전 조지는 국가를 강제력으로 전복시키려는 논의는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국가

 

반자본주의 운동에 닥쳐온 일련의 사태들은 이러한 논쟁을 명료하고 구체적이게 만들었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2001년 제노바에서 열린 G8[주요 8개국] 회담에 반대하는 시위였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바로 그 곳에서 이탈리아 경찰이 젊은 활동가였던 카를로 줄리아니를 죽였습니다. 그 사건은 매우 비극적인 방식으로 국가의 진정한 성격을 보여 줬습니다. 우리가 국가를 애써 무시하려 해도 우리 운동이 체제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위협한다면 국가는 우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사건은 국가의 핵심부는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무장한 인간들의 집단이라는 오래된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끔찍한 시각 효과로써 확인시켜 줬습니다. 이 문제는 과거의 운동들도 직면해야 했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어떤 행위 주체, 어떤 사회세력이 자본주의와 그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가? 지금껏 이 운동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대규모 시위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 주체가 단순히 대중, 즉 많은 개인들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계급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여러 수준에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초보적이고 열의에 찬 수준에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즉, ‘누구든 상관 없으니 집회에 함께 가자’는 태도입니다. 물론 우리는 누구든지 시위에 함께 참가하길 바라고 또 환영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변화를 쟁취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론화될 수도 있습니다. 자율주의자들인 네그리와 하트가 《제국》이라는 책에서 그러한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그들은 세계의 분열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계급이 아니라 “다중”을 얘기합니다. 나오미 클라인은 “무리”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들 주장의 요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배제당하고 있으며 모든 분야에서 착취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고통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투쟁이 오로지 노동계급 투쟁뿐이며 그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투쟁이라고 반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네그리 등의] 그런 주장은 노동계급이 세계적으로 소멸해 가고 있다는 생각과 연결돼 있다는 점입니다. 계급투쟁, 즉 생산수단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뒤떨어지고 있다는 믿음이 이면에 있습니다. 그러나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위들을 살펴본다면 사뭇 다른 그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애틀·제노바·바르셀로나 등지의 시위가 그토록 장관이었던 이유이자 그 시위들을 특별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활동가들이 수많은 노동자들과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11월 12∼16일에 파리에서 열릴 유럽사회포럼에서 다시 한 번 이러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많은 노조 활동가들이 연금 개악에 맞서 파업과 시위를 계획하는 등 ‘뜨거운 가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노동계급이 사라지고 있다거나 또는 중요한 사회세력이 아니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1995년의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가족까지 포함한 전체 노동계급 규모는 15억 명에서 20억 명에 이릅니다. 이런 계급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물론 아직도 세계 인구의 상대적 다수는 농민입니다. 그 가운데 다수가 인도와 중국 서부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시에 사는 인구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1995년에는 세계 인구의 45퍼센트가 도시에 살았는데, 여러 추정치에 따르면 2015년에는 그 비율이 55퍼센트가 될 것이라고 하며, 인구 75만 명 이상의 도시에서 사는 비율이 다섯 명에 한 명 꼴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더 자세한 수치는 생략하더라도,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는 신화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임시직 노동자수가 증가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본가들이 마음대로 공장을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옮길 수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체제의 압도 다수는 여전히 상시적 임금 노동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영국에서는 지난 10년간 임시 계약직 수가 줄었습니다. 경기 회복이 더딘 탓이기도 하지만 안정적 노동인구에 대한 자본가들의 수요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조직 노동자든 조직 가능한 노동자든 간에 노동계급이 여전히 생산 과정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는 점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최악의 조건에 처해 있는 노동자들조차 역사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마낄라도라, 즉 경제 자유 구역에서는 산업단지 내에 경찰이 상주하고 노조 조직자들이 구타를 당하는 일들이 있는데, 이런 그림은 1970∼80년대 남한의 상황과 매우 닮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이 조직화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습니다. 노동계급은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데에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노동계급은 체제를 박살낼 수 있는 유일한 세력입니다.

 

노동계급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인 것은, 국제 시위에 참가하는 일이 노동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더 힘든 일이라는 점입니다. 누구에게나 쉽지는 않겠지만 아마 노동자 동지들보다는 학생 동지들이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반자본주의 시위들의 진정한 힘은 비행기 타고 날아오는 활동가들이 아니라 시위가 일어나는 도시 대중의 동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자본주의 운동을 노동계급과 결부시켜야 할 전략적 필요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많은 토론과 논쟁이 필요합니다. 노동자들이 특권층이라는 주장을 반박해야 합니다. 또한 활동가들 자신이 ‘반자본주의’의 의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세계 어느 곳이든 노동자들은 사실상 반자본주의적인 쟁점들에 점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연금 개악, 유연 노동, 인력 감축 등 때문에 삶이 점점 각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만연해 있고, 노동자들이 이 모든 현상을 신자유주의적 공세, 즉 자본주의의 일부분으로서 이해하는 일이 점차 흔해지고 있습니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영향은 다른 데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영국에서는 매우 전통적인 노동자 부문인 소방수들이 파업했는데, 그들은 TV에서 본 반자본주의 시위를 모방해 시위 현장에 풍선과 깃발, 폭죽 등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여름에 프랑스를 뒤덮었던 파업 물결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반자본주의 시위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일부 젊은 노동자들이 그러한 에너지를 자신들의 파업 투쟁에 끌어온 것입니다. 바로 이런 종류의 연관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조직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암시해 줍니다. 이 운동의 커다란 장점 한 가지는 다양성입니다. 서로 다른 쟁점에 대해 상이한 관점을 가지고 싸워 온 사람들이 시위와 토론회 등등에 함께 참가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단점은 만장일치에 집착한다는 점입니다. 즉,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합의하지 않으면 어떠한 행동도 결정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대단히 민주적인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한 사람이 1천 명보다 더 큰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처럼 정치적 차이를 무시해도 괜찮다는 태도의 배경에는 그러한 의견 차이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정치적 쟁점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2001년 7월 20일에 카를로 줄리아니가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를 두고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다음 날 시위를 취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시위는 자율주의자들로 이뤄진 시위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다른 세력들은 그 다음 날 대규모 대중 동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결국 다수의 지지를 받긴 했지만 모든 사람이 우리를 지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만장일치가 아닐지라도 우리[대중 행동 주장자들]는 그 다음날 행동을 조직했고 30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논쟁

 

정치 쟁점이 제기될 때면 사람들은 그에 대한 해답을 놓고 의견이 갈리기 마련입니다. 즉, 사람들은 그 문제를 둘러싸고 당(정당)을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계사회포럼과 유럽사회포럼이 정당을 배제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기만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정당의 참여가 금지돼 있지만,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 사람들을 연단에 올려보낼 수 있었습니다. 정당의 개입이 운동에 해롭다는 생각은 얼핏 보기에 급진적이고 아나키스트적이거나 자율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운동 내 우파와 통하는 생각입니다.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이하 ATTAC)의 우파가 “정당은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 정당이란 급진적 정당을 뜻합니다. 막상 본인들은 사회민주주의자, 좌파 민족주의자 들과 협력하면서 말입니다.

이밖에도 많은 논쟁들이 오가고 있으며, 우리는 이 운동에 몸을 던졌듯이 이러한 논쟁에도 온몸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물론 이 운동은 나라마다 발전 수준이 불균등하고, 그 때문에 우리는 최상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끌어 내어 일반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우선순위를 주장해야 합니다. 예컨대 이번 유럽사회포럼에서는 ATTAC의 베르나르 까쌍처럼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완전히 별개의 쟁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커다란 논쟁이 벌어질 예정입니다. 이들은 반자본주의 운동의 초점을 전쟁과 인종차별을 비롯해 자본주의가 양산하는 온갖 만행에 반대하는 급진적 의제로부터 벗어난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합니다. 그들은 모종의 정책 변화를 이루기 위해 유럽연합과, 심지어 프랑스 정부와 대화를 추구하는 쪽을 선호합니다.

이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쟁점과 직결되는데, 제 발제의 마지막 요점인 이 쟁점은 개량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단지 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논쟁이 아닙니다. 개량과 혁명 가운데 어느 관점을 택하느냐에 따라 오늘날의 모든 쟁점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어떻게 하면 대중이 그들 자신의 행동을 통해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을지 조망하지 않는 사람은 현재의 운동에 대해서도 시야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시야는 개혁을 획득하기 위해 개량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으로 한정되거나, 아니면 제노바에서 자율주의자들이 그랬듯이 30만 명을 동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에 경찰과 갖가지 방법으로 충돌을 벌이는 시위 전문가에게 희망을 거는 쪽으로 한정됩니다. 어느 쪽이든 〈파이낸셜 타임스〉조차 올바르게 지적한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즉, 수만 명의 활동가들이 수천만 명의 다른 사람들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대규모 반자본주의 행사들은 단지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기쁨을 나누기 위한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활동가로서 그러한 행사에 참여한 경험을 밑천 삼아 이 운동의 정신을 사회의 구석구석에, 모든 부문의 노동자·학생들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껏 말씀드린 쟁점들은 단지 이번에 뭄바이에 가서 그러한 논쟁을 하실 동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논쟁들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며, 날마다 우리의 실천 속에서 행해져야 할 일들입니다.

 

Q & A

Q. 월든 벨로와 반다나 시바 등은 반세계화 운동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세계화 국제 포럼’에 참여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기업의 세계화 기구인 WTO와 세계은행 등을 개혁해서 UN 산하 기구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이들은 UN을 강화해서 다국적기업과 강대국을 규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개발도상국과 세계 시민운동이 연대해서 다국적기업들과 강대국에 맞서 싸우자고 주장한다. 이 사람들이 제시하는 대안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A. 다양한 활동가들이 세계 기구들을 개혁하기 위한 이런저런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반자본주의 활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조지 몽비오 역시 얼마 전에 새로 낸 책에서 그런 아이디어 하나를 제안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제안은 대부분 실현되기만 한다면 지금보다 좋았으면 좋았지 더 나쁠 것은 없는 제안들입니다. 하지만 거기엔 두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단지 몇 개의 국제기구들만 문제라고 보는 경향입니다. 그런 관점은 세계은행·IMF·WTO 같은 몇 개 기구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기관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이 기구들도 중요한 기관이지만 이들조차 자본주의의 주요 기구인 초대형 생산단위들, 즉 다국적기업들에 견주면 부차적인 존재입니다. 자본주의는 경제 체제이므로 다른 무엇보다 이러한 기업들로 표상되며 기업들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다국적기업들이야말로 무엇이 생산되고, 어떻게 생산되며, 생산된 재화가 어떤 값에 팔릴지에 관한 결정권을 모두 쥐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전 세계의 빈민과 노동계급과 농민 들이 자본주의의 이러한 생산 자원을 손에 넣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생산에 대한 지배력을 다국적기업들에게 맡겨둔 채 단지 국제 기구들만 손보는 것은 지금의 문제들이 또 다른 형태로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WTO나 IMF 같은 기구들도 자본주의의 다른 기구들에 종속돼 있습니다. 그것들은 국가에 종속돼 있습니다. 저는 일반적 수준에서의 국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IMF와 세계은행의 경우 가장 중요하기로는 미국 국가에 종속돼 있고 WTO의 경우는 자본주의의 주요 블록들, 즉 유럽·일본·미국에 종속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국제 기구를 개혁하려 할 때조차 그 기구들의 배후에 있는 국가들을 어떤 방법으로 압도하느냐는 의문에 답해야 합니다. 아마도 그 기구들의 힘을 분쇄하고 그 기구들의 뒤를 봐주는 국가들과 싸워 이기려면 대단히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투쟁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 정도로 전투적인 세력을 동원할 수 있다면 불가피하게 이런 의문이 제기됩니다. 굳이 UN이나 WTO 또는 IMF를 개혁하는 선에서 멈출 필요가 있는가? 더 나아가서 아예 사회를 바꾸지 못할 이유는 뭔가?

구체적인 질문이 하나 더 있어서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무역에 관한 쟁점입니다. 소위 부유한 나라들과 가난한 나라들 사이에 불공정한 무역이 이뤄지고 있음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공정 무역, 혹은 자유 무역이 둘 사이의 격차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세계 생산능력의 75퍼센트는 미국·유럽·일본에 집중돼 있습니다. 선진 블록과 아프리카 사이에 (무역 장벽 따위가 없는) ‘공정한 무역’은 단지 이미 대규모 자본 블록에 유리하게 돌아갈 뿐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제3세계에 불리한 무역 장벽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은 자본주의의 불균등한 발전의 증상입니다. 물건의 교역이 불평등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주범은 부의 생산 과정이며, 그것은 자본주의의 핵심에 존재합니다.

 

Q. 프랑스에서 5월∼6월의 대중파업과 독일 금속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조 지도자들의 타협으로 패배했다. 그 시점은 한국에서 철도 노동자들이 노조 관료 때문에 패배한 시점과 일치한다. 노조 관료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반자본주의 운동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예언까지는 아니라도 전망 정도는...)?

 

A. 저는 발제 부분에서 노동자 운동이 과거에도 오늘날의 것과 비슷한 의문들에 직면했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노조 관료 문제는 가장 고전적인 쟁점입니다. 우리는 먼저 노조 관료가 어떤 집단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노조 관료는 매우 특수한 사회 계층입니다. 그들은 사장들이 아닙니다. 즉, 자본가 계급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근 노조 관료들은 그렇다고 노동자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에 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둘 사이에서 협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투쟁을 이끄는 와중에도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그들의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때문에 노조 지도자들을 싸우게 만들려면 종종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필요합니다. 노조 지도자들의 인물 됨됨이가 근본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독일의 금속연맹 지도자들이나 남한의 철도 노조 지도자들이나 근본 성격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노조 관료 안에서도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차이는 존재하며, 그 차이는 중요합니다. 좌파 지도자들은 변화를 열망하는 현장조합원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경우에 당선되는 일이 많습니다. 영국에서는 지난 5년간 노조 선거에서 이런 현상이 여러 차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파 노조 관료보다는 좌파가 당선되길 바라며 노조 선거에서 좌파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매우 훌륭한 좌파 지도자들조차 타협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사장들로부터, 그리고 노조 관료 계층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타협하라는 압력에 시달립니다.

 

압력

 

이 때문에 현장 노동자들은 그 반대의 압력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노조 관료들을 행동하게끔 강제하는, 위쪽으로 향하는 압력이 필요합니다. 영국에서는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그 필요성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상이한 부문의 노동자들이 기층 신문을 중심으로 조직화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영국의 우체국 노조에서는 좌파 지도자가 선출됐는데 그는 전국적 파업 찬반 투표를 실시하겠다고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처음에는 경영진과 대화하면서 투표를 연기하려 했습니다. 사정이 이렇기에 노조 지도자의 한계를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우체국 노동자들은 〈체신 노동자〉라는 신문을 제작해 아래로부터의 행동을 주장했습니다. 그 신문은 호마다 8천 부가 팔립니다. 전체 우체국 노동자 수는 18만 명입니다. 판매되는 부수는 8천이지만 독자 수는 더 많습니다. 이것이 현장 노동자 조직 건설의 출발점입니다. 우체국 노조와 관련한 상황의 진전을 살펴보면 그런 조직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체국 노조 지도자들이 공식 파업 투표를 선언한 유일한 이유는 노조 현장 대표자들이 회의를 소집해 공식 투표를 일정에 올리지 않을 경우 어차피 자신들은 파업하겠다고 결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조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투자가 필요하며 현장 노동자들의 자신감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직이 필요하다는 원칙은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오래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 근원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 스코틀랜드 서부 글래스고의 클라이드사이드 직장 위원들이 외친 구호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들은 “우리는 노조 지도자들이 우리의 이익을 올바르게 대표하는 한에서만 그들을 지지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독립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노조 지도자들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하려면 대단한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일터로 돌아가서 지도자가 뭐라 하든 무조건 파업하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항상 현장 조직 건설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방향으로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노조 지도자들이 파업을 선언해 놓고 ‘피켓 라인의 인원 수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어쨌든 그것은 공식 파업이니 우리는 당연히 지지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파업을 노조 지도자들의 말에 따르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노려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피켓 라인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피켓을 우리 작업장에만 한정할 이유가 뭐 있나? 다른 곳으로 행동을 확산시키자. 그게 곤란하다면 최소한 다른 노동자들과 접촉이라도 시도하자’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몇몇 동지들이 최근에 남한에서 있었던 파업 사례를 말해 줬습니다. 처음에 전교조 교사들과 조흥은행 노동자들은 서로의 투쟁에 대해 모른 채 동시에 파업하고 있었습니다. ‘다함께’는 비록 조직 규모가 작지만 한 쪽의 파업 노동자들을 다른 쪽 노동자들의 농성장으로 데려옴으로써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의 이니셔티브야말로 노조 관료에 대한 반대편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현장 조직의 규모를 건설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간혹 대규모 투쟁이 일어날 때면 노동자들은 현장 조직을 대규모로 건설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에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비록 파업은 중단됐지만 노동자들, 특히 교사들은 기층에서 조직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또한 바로 그 교사들이 가을에 파업을 재개하자고 강력히 요구하는 세력입니다. 매우 일반적인 수준에서 답변을 드렸는데, 어쨌든 우리가 그러한 원칙을 갖고 있다면 개별 작업장의 상황에 따라 진전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Q. 현재 자본주의는 미국의 주도 하에 있다. 제3세계와 각국의 노동자들은 여기에서 배제돼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북한이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북한이 제3세계와 함께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A. 제가 질문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질문하신 동지는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상정하셨습니다. 부분적으로 맞는 그림이지만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분명 군사력으로는 세계 1위입니다. 미국이 군사력에 투자하는 비용은 그 다음 16개 국의 군비를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 군사적으로는 미국이 단연 최강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그림이 사뭇 다릅니다. 1950년대 초반에 미국의 제조업 생산은 세계 제조업 총생산의 절반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 경제는 규모 면에서 유럽 경제와 대략 비슷해졌습니다. 세계 총생산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대 말에 이르러 4분의 1로 떨어졌습니다. 1990년대를 거치는 동안 미국은 다른 지역보다 강력한 호황을 겪은 덕에 그 비중을 30퍼센트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1950년대의 절반 수준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제 제3세계에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만이 아닙니다. 유럽 자본주의 또한 전 세계에 발을 뻗치고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그 지역에 이윤을 찾아 몰려오는 투자자들은 주로 프랑스의 물 회사, 스페인 은행, 그리고 프랑스 은행 등입니다. 따라서 미국만이 유일한 제국이고 다른 모든 국가들이 미국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유럽연합·일본 사이에서는 치열한 경제적 경쟁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소위 제3세계로 분류되는 지역의 나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단지 경제적 차원에서만 봐도 이들 나라는 서로 천차만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나라들은 거대한 고통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그 지역의 사회와 경제는 퇴보했습니다. 반면, 종종 제3세계로 여겨지는 인도 같은 나라의 산업은 부분적으로 세계 시장에서 일정한 역할을 확보했습니다. 예전에 식민지였던 나라들에서는 이제 모두 독립 정부가 수립됐으며, 그들만의 독자적인 이해관계가 형성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계 체제의 일부분이라고 여깁니다. 비록 세계 체제의 하위 부분일지는 모르나, 그럼에도 자신을 세계 체제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나오미 클라인은 아카폴코처럼 세계 곳곳에 있는 백만장자 전용 관광지들의 모습을 탁월하게 묘사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온 지배계급 구성원들이 골프를 치면서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단지 미국과 유럽의 지배계급만 눈에 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3세계 나라들이 단합해서 체제를 변혁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그 나라들은 내부적으로 계급에 따라 분할돼 있는 데다가 그 나라들 사이에서 서로 경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컨대 아프리카에서 기니와 나이지리아는 둘 다 라이베리아의 위기 상황을 틈타 서로 더 큰 이익을 챙기려 애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북한을 살펴봅시다. 경제적으로 북한은 40년 동안 스탈린주의 블록에 속해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현재 북한의 외화수입은 연간 15억 달러입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북한 지배계급이 구상하고 있는 대책은 여타 다른 나라에서 채택했던 것들과 똑같습니다. 즉, 세계 경제에 통합된 다음 운이 좋으면 생산의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확보하는 길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과정은 현대가 북한에 투자한 것을 필두로 이미 시작된 듯합니다. 따라서 저는 북한을 예외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반도 주변 동북아시아 지역을 마치 세계 경제와 제국주의 체제로부터 동떨어진 것처럼 이해하는 좌파 민족주의의 관점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은 반자본주의 운동의 세계적 의식이 발전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리 발언

 

저는 그저께 자본주의의 해괴한 본성을 한 눈에 보여 주는 사건을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미국 동부 연안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혼비백산한 정부 관계자들은 처음부터 테러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사실은 발전소 한 곳에 벼락이 떨어진 것이 직접적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력 체계 전체가 작동을 멈춘 진정한 원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미국의 어느 주지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제3세계 수준의 전기 공급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러니까 스텔스 폭격기와 B-52 폭격기를 보유한, 세계 최대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에서 배전 시스템은 제3세계 수준의 것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낭비

 

물론 이 체제의 낭비와 파괴는 그것보다 훨씬 심합니다. 외채 때문에 하루에도 1만 9천 명의 어린이들이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죽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도시에 따라 열 명 가운데 한 명이나 네 명 가운데 한 명 또는 세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에이즈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약 회사들은 특허권을 이용해 높은 의약품 가격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여기서 들은 무시무시한 통계에 따르면 남한에서 매일 36명이 자살한다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평생 동안 일만 해 온 사람들이 앞으로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 이유인 즉슨, 뭔가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랍니다. 그 문제란 다름이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이런 추세를 매우 훌륭한 문장으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모종의 진보가 이뤄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명이 너무 비대해지고 진보가 너무 많이 이뤄진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문명을, 진보를 파괴해야만 한다.” 이러한 파괴 또는 잠재적 파괴를 우리는 이미 세계적 규모에서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에서 이미 저질러진 파괴를 볼 수 있습니다. 점점 확대될 듯한 전쟁에서 파괴의 잠재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라크 민중에 대한 대량 학살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세계 인구의 절반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한 48명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저항에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저항을 강화하고 반자본주의 운동을 강화해야 합니다. 아까 나왔던 질문 가운데 하나가 ‘반자본주의 운동의 전망은 어떠한가’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답변은 이것입니다. 이 운동의 전망과 세계 변혁의 전망은 우리가 그것을 활용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수백만,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체제 자체가 극단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의견들은 현재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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