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지난 3월 말 재벌 기업의 초과이익을 하청 중소기업들과 나누자는 정운찬 전 총리의 이른바 초과이익공유제 제안에 대해 “누가 만든 말인지,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자본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공산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고 강하게 반발한 바 있다. 그런데 그 한 달 뒤인 지난 4월 말에는 MB의 책사 곽승준이 “거대 권력이 된 대기업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대기업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며 삼성을 압박하자, 이건희는 “공개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환영한다”고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친재벌, ‘기업 프렌들리’ MB가 정권 말기가 되자 ‘공정사회’와 ‘동반성장’ 노선으로 선회한 것일까? 초과이익공유제와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가 어떻게 다르기에 이건희는 이들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였을까? 정운찬이 제안한 초과이익공유제는 오래전부터 자본 자신도 기업 성과 향상 방안으로 도입 시행해 온 이윤분배(profit sharing)의 한 방식이다. 

다만 초과이익공유제는 대기업의 이윤을 중소기업에게 나누어 주자는 기업 간 이윤 재분배 방안으로서, 자본의 이윤을 성과급 임금 지불을 통해 노동자와 나누어 분배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원래의 이윤분배 제도, 즉 기업 내의 계급 간 이윤분배와는 다르다. 하지만 초과이익공유제는 자본 상호간의 이윤분배이기 때문에 계급 간 분배인 본래적 의미의 이윤분배보다 더 분배적이고 더 반자본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한편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소액주주운동 등 시민운동뿐만 아니라 일부 진보진영에서도 이른바 ‘연기금 사회주의’ 구상의 한 요소로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안적인 진보적 경제전략의 하나로 간주돼 왔다. 실제로 곽승준의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예컨대 현재 국민연금의 삼성전자 지분이 5퍼센트로 이건희의 지분(3.4퍼센트)보다도 많은 점을 감안한다면, 재벌 기업의 경영권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연기금 사회주의’ 구상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건희가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서는 반발하면서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환영한다고 한 것은 좌우도 구별 못하는, 혹은 정운찬의 주장처럼, 경제학의 기본도 모르는 무지를 드러낸 것일까? 또는 밖에서는 애플한테 터지고 안에서는 심화되는 빈부격차와 대기업-중소기업간 양극화, 격화되는 지배계급 내부 갈등과 여론 악화에 몰려 좌충우돌하고 있는 것일까? 세계 최정상급 싱크탱크라는 삼성경제연구소까지 거느리고 있는 이건희가 그렇게 단순 무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지

코즈(R.Coase)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는 위계적 명령 조직인 기업이라는 섬과 이 섬들 간의 시장 교환이 이루어지는 바다에 비유할 수 있다. 이 경우 이윤이 생산되는 장소인 기업, 즉 섬 안에서는 교환이 아니라 자본의 전제가 지배한다. 반면, 기업, 즉 섬들 간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 즉 바다에서는 이윤의 재분배가 이루어진다. 시장에서 이윤의 재분배는 기업 간 경쟁과 이에 기초한 이윤율 균등화 과정에서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낮은 중소기업에서 생산된 이윤의 일부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은 대기업으로 이전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균등 발전, 양극화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원래 의미의 이윤분배는 대기업이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 착취를 통해 얻은 이윤과 중소기업이 취득한 이윤을 재분배한 것으로부터 얻은 이윤을 내부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어 대기업에서 임직원들에 대한 스톡옵션 제공, 노동자들에 대한 성과급 임금 지불과 우리사주제 등의 실시 등이 이에 해당된다. 자본은 이런 이윤의 기업 내 분배는 자본의 전권에 속하는 것으로 용인한다. 실제로 대기업은 이윤 극대화, 기업 성과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이윤의 기업 내 분배를 앞장서 추진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운찬이 주장한 초과이익공유제는 기업 간 이윤 재분배, 즉 대기업이라는 큰 섬이 취득한 이윤의 일부를 다시 주변의 다른 작은 섬들, 즉 하청 중소기업들과 다시 나누자는 기업 간 이윤 재분배로서 동일 기업 내 이윤분배와 구별된다. 자본은 이와 같은 기업 간 이윤 재분배 요구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의 경제법칙, 즉 착취와 시장 경쟁을 통해 취득한 이윤을 다시 내놓으라는 제3자의 부당한 개입으로 여길 수 있다. 즉 자본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한 이윤의 기업 간 재분배나 자율적인 기업 내 분배는 자본의 논리와 부합되는 것으로 여기지만, 국가 개입에 의한 이윤의 기업 간 재분배는 시장 경쟁의 법칙을 거스르는 반칙으로 간주할 수 있다.

반면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요구는 다름 아닌 ‘1원 1표’의 원칙, 즉 주주자본주의 원칙의 명실상부한 실행을 요청하는 것으로서, 자본의 논리와 상충되기는커녕 자본의 논리의 철저한 관철 요구다. 따라서 일부 진보진영이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요구를 연기금 사회주의 구상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이론적 역사적 근거도 없다. 오히려 노동자의 지연된 임금인 연기금이 주식·채권 등 투자 확대를 통해 금융화 과정에 편입되는 것은 주주 자본주의 원칙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강화로 귀결될 뿐이다. 이건희가 곽승준의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요구를 환영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초과이익공유제가 대기업, 재벌의 이익과 상충되는 측면이 있다고 해서 이것이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요구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초과이익공유제는 이윤의 기업 간 재분배 요구로서 그 자체로 사회적 총자본, 자본 일반의 이익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노동자계급과 국가가 이윤의 기업 간 재분배 과정에 개입하여 이를 평등화, 민주화하는 방향으로 조정할 수 있다면, 이는 자본의 논리를 넘어가는 대안적인 이행기 경제전략으로 기능할 수 있다. 1970년대 스웨덴 사회민주당과 LO(노총)가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난 임금노동자 기금은 그 예다. 

임금노동자 기금

실제로 마이드너(Meidner)가 입안했던 임금노동자 기금안에 따르면, 매년 스웨덴의 주요 기업들은 이윤의 20퍼센트를 갹출해 신주를 발행하고 이를 임금노동자 기금에 적립하도록 강제됐고, 신규 발행 주식의 형태로 적립되는 임금노동자 기금은 머지않아 주요 기업들을 소유·관리하는 지배주주가 될 것이었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 스웨덴의 임금노동자 기금안이야말로 연기금 사회주의 구상과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운찬이 주장한 초과이익공유제에는 연기금 사회주의 구상의 기초가 되어야 할 노동의 관점, ‘자본의 사회화’ 플랜은 완전히 빠져 있다. 

한편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요구 역시 연기금의 금융화와 증권화, ‘노동의 자본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연기금 사회주의 혹은 ‘자본의 사회화’ 방안과는 거리가 멀다.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 주듯이 연기금의 금융화, 증권화가 임금노동자 기금 플랜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임금노동자 기금안이 실패한 후 연기금의 금융화, 증권화, 즉 스웨덴 복지국가의 해체와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 급속하게 진전됐다. 초과이익공유제가 자본의 사이비 사회화 방안이라면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요구는 자본의 전면적인 사회화 요구일 뿐이다. 

삼성이 초과이익공유제에 반발했다고 해서 초과이익공유제가 뭔가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오해인 것처럼,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혹은 같은 동전의 양면일 뿐인 소액주주운동, 즉 ‘시장 포퓰리즘’과 ‘저항의 시장화’ 현상을 연기금 사회주의 구상과 동일시하는 것도 몽상이다. 주식과 MBS, CDO, CDS 등 각종 신용파생상품에 대한 투자 확대를 포함한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즉 연기금의 금융화, 증권화는 실은 2007~2009년 서브프라임 세계경제 위기의 주요 촉발 요인의 하나였다. 최근 우리 나라 일부 진보진영이 관심을 갖는 연기금 사회주의 구상은 서브프라임 세계경제 위기 후에도 글로벌 차원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 연기금의 금융화, 증권화를 비롯한 ‘사회의 자본화’를 거부하고, 1970년대 스웨덴의 임금노동자 기금안과 같은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자본의 사회화’ 전략과 결부될 경우에만 탈자본주의 이행기강령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정성진 교수는 오는 7월 21~24일에 열리는 맑시즘 2011에 연사로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