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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혁명과 제국주의

서구 열강은 오랫동안 중동에서 만행을 저질러 왔다. 리차드 시모어가 최근 중동 혁명 발발에 대응해 서방 열강이 이 지역을 계속 지배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전략을 짜고 있는지를 고찰한다.

알 카포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친절한 말보다는 친절한 말에 총을 더했을 때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미국 정부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2009년 미국 상원의원 조지 미첼은 튀니지를 방문해 독재자 벤 알리에게 오바마의 따뜻한 안부의 인사를 전했다. 같은 해 오바마는 하원에서 벤 알리에게 무기를 판매하는 것에 대한 허가를 얻으려고 노력하면서 자기 말을 뒷받침하려 했다.

2010년 11월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호스니 무바라크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면서 미·이집트 관계가 “안정과 안보의 초석”이라고 평가했다. 몇 달 뒤에 이집트에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됐을 때, 미국 부통령 조셉 바이든은 무바라크가 미국의 “동맹”이지 “독재자”가 아니라고 우겼다. ‘중동 평화 4자 회담’(유엔, 유럽연합, 미국, 러시아)의 특사인 토니 블레어는 이 독재자를 가리켜 “매우 용감하며 선한 자”라고 평가했다.

1978년 캠프데이비드협정을 체결한 뒤부터 이집트 국가는 미국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지원금, 무기와 고문 기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 협정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다시 말해 이집트와 미국 사이에 동맹관계가 확립됐다.

이런 지원 덕분에 무바라크는 1981년부터 쭉 이집트를 통치할 수 있었다. 그는 IMF의 처방전도 수용해 급격한 고용의 비정규직화와 농촌 노동자들의 빈곤 사태가 발생했다. 미국과 서방 동맹국 정부들이 보기엔 그것이 아랍이 바랄 수 있는 최선의 상태였다.

그러나 ‘배은망덕한’ 튀니지인과 이집트인 들은 자국 독재자들을 뻥 차버렸다. 이 두 나라 항쟁에서 노동계급은 두드러지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벤 알리 정권의 일부분이었던 노동조합들은 정권과 노동자들 사이의 사회적 협약이 무너지자 튀니지 혁명에서 지도적 구실을 했다.

이집트의 경우 마할라 방적 공장 투쟁으로 시작된 노동계급 반란은 2011년 1월 항쟁을 낳은 배양액 구실을 했다. 석유 산업, 정부 각 부처, 수에즈 운하 공사, 철도, 청소 노동자 들로 파업이 확산된 것이 무바라크 정권을 마비시키고 그의 지지자들을 분열시키는 결정적 구실을 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파업들이 경영진에서 부패한 집권당 인사들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는 등 정치적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힐끗 보여 주는 정치조직들이 나타난 것도 놀랍다.

이집트 카이로 메이데이 시위 진정한 리비아 혁명의 동맹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은 완벽하게 작동하는 도시 안의 도시이자 무바라크의 이집트에 맞서는 살아 있는 대안으로서, 21세기판 코뮌으로 변모했다. 지역 조직화와 치안을 위해 방방곡곡에서 민중위원회들이 구성됐다.

미국 정부가 이 독재 정부들을 무너지기 직전까지 지지했음에도,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무너졌다. 곧이어 오바마가 자유에 관해 일장 연설을 한 것은 정말 관대하게 말해 허둥지둥 태도를 바꾼 것으로, 전혀 그럴듯해 보이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자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긴 중동 패권을 잃고 있었다.

리비아 민중의 무장 항쟁

한편, 리비아에서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2011년 1월 부패와 주택 부족에 항의해 벵가지와 다르나 등 주로 동부 연안 소도시와 도시 들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웃 국가들의 눈부신 혁명에 영감을 받은 일부 정치 활동가들은 더 과감한 행동을 요구했다. 2월 초에 언론인 자말 알하지와 변호사 파티 테르빌 같은 중간계급 출신 인권 활동가들은 정치적 자유 확대를 요구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리비아 반란이 시작된 2월 15일 저녁, 경찰들은 벵가지에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보통 때는 감히 저항에 나선 사람들을 위협과 탄압으로 손쉽게 고립시킬 수 있었겠지만, 타흐리르 광장 투쟁의 여파로 시위가 알바이다같은 전통적인 친카다피 지역까지 확산됐다. 리비아 치안 기구에 고용되는 경우가 많았던 바라사 부족은 정부 진영에서 이탈했다. 심지어, 일부 지역 보안군과 경찰 들도 정권에게 등을 돌렸다.

리비아야당국민회의 소속의 망명 인사들은 리비아 내부 반정부 세력과 손을 잡고 2월 17일 ‘분노의 날’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이날 카다피 정부의 저격수들은 시위대를 상대로 무차별 발포했고 덕분에 정치적 투쟁이 순식간에 무장 투쟁으로 변했다.

벵가지의 반카다피 시위

2월 25일 반정부 세력이 수도 트리폴리와 카다피 고향인 시르테를 제외한 리비아 대부분을 통제하게 된 듯이 보였다. 주로 엘리트와 카다피 정부 이탈 인사 들 ― 군장교, 기업인, 학자, 기타 전문직 종사자 들 ― 로 구성된 과도위원회가 형성됐다. 과도위원회는 항쟁에 참가한 다양한 사회세력들을 하나의 기구로 통합하려 했다.

지금까지 카다피는 자기 정권에 맞선 모든 저항을 탄압해 왔다. 따라서 리비아 시민사회 진영에는 저항을 주도할 노조나 정당이 없었다. 리비아 전역에서 민중위원회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은 파편화된 형태의 민중권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잘 조직된 엘리트들이 공백을 메우려 들었다. 리비아 전국을 포괄하는 대표단들을 초청하겠다는 이들의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들은 반란을 독점적으로 대변하는 구실을 할 수 없었고 동부 연안 지역 근거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과도위원회를 구성하는 인사들은 여전히 주로 엘리트들에서 충원됐고, 이들은 전략을 둘러싸고 서로 의견이 상이했을 뿐 아니라 사적인 권력투쟁 ― 대표적으로 카다피의 사유화 정책을 지휘했던 마흐무드 지브릴, 전 법무 장관 무스타파 압델 잘릴, 전 내무 장관 압둘 파타 유니스 사이의 ― 을 일삼았다.

나중에 미국에서 칼리파 헤프타가 돌아와 반란군 지휘자 구실을 하자 이런 분열은 더 심해졌다. 헤프타는 한때 카다피의 동맹이었지만 1987년 정부에 등을 돌렸다. 그는 CIA와 오랫동안 협력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정부 세력이 초기 군사적으로 승기를 잡았지만, 오래지 않아 카다피가 다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고 반란 세력의 약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처음에 반란 세력을 지지했던 와르팔라 부족은 다시 정부 쪽으로 넘어갔다. 이제 미국과 일부 유럽 동맹국 정부들은 그때까지 불가능해 보였던 전략을 놓고 서로 단결할 수 있었다. 그들은 리비아 투쟁을 통제하면서 이것을 자신의 이익에 맞춰 이용하기 시작했다.

미제국주의와 중동 패권

중동 통제 문제는 영국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뒤부터 미국 정책 입안자들을 괴롭혀 온 문제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영국 자본주의는 대단히 약해졌고 식민지 당국들은 곳곳에서 펼쳐지는 반식민지 반란에 대처하느라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종종 이런 영국의 약점을 이용했다. 예컨대, 미국 정부는 이집트에서 나세르가 주도한 자유장교단의 반(反)영 반란을 묵인했다. 반대로, 1969년엔 리비아왕립군의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까지 또 다른 친영 국왕인 이드리스를 지원했다.

미국 정부가 1952년과 1969년에 다르게 대응했던 것은 그동안 중동 독립국들이 천연자원, 특히 석유 자원 국유화를 추진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를 더 곤란하게 만든 것은 베트남 전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영국 제국이 ‘수에즈 동쪽’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걸프 지역에서 영국 화폐를 사용하는 종속국들의 네트워크를 지원해 온 영국 해군을 철군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해군이 영국이 해 온 제국 군대의 의무를 대신 실천하기 시작했고, 달러 외교가 영국 통화 후원 체제를 대체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우익들은 주요 도전자가 없는 틈을 타 중동 지역을 미국 이익에 맞게 재편하려 했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파괴하고 그 잔해 위에 친미 ‘자유시장’ 국가를 세우려는 계획을 중심으로 단결했다.

이런 모험의 결과로 미국 정부의 중동 패권이 처음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미국·유럽 동맹에 처음으로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러시아가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오바마의 임무는 이런 피해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미국 제국이 역사상 가장 심각한 도전 중 하나에 직면하기 직전에 대통령직을 맡았다.

미국 정부는 오랫동안 경제 제재와 폭격 등을 통해 리비아 국가를 약화시키려 노력했다. 2000년대 들어서자 미국 정부는 카다피 정부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 이후 카다피 정부는 보수적 농촌 엘리트, 석유·은행·수입 부문의 기업인, 국가 전문 관료 들을 매수해 지지기반으로 확보했다. 카다드파, 와르팔라, 마르가르하 등 3대 부족들이 정권의 핵심 지지자 구실을 했고, 보안군의 대다수가 이들에서 충원됐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2009년의 한 전문을 보면, 어떤 미국 외교관은 카다피가 자기 아들들을 경쟁시킬 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세력들에 대한 후원 관계를 이리저리 바꾸는 것을 본 뒤 카다피의 “탁월한 전술적 감각”을 칭찬했다.

따라서 경제 제재의 대가가 너무 크다 ― 1990년대 대략 3백억 달러 ― 고 판단한 카다피가 미국 정부와 관계 개선에 나섰을 때, 미국 정부는 뒤통수를 맞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2004년 부시와 블레어는 두 팔 벌려 카다피를 환영했고 리비아 엘리트들은 유럽과 미국 엘리트 들과 활발히 교류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런던정경대를 졸업한 카다피 아들 알이슬람은 앤드류 왕자와 피터 만델슨의 절친이 됐다.

리비아 혁명의 목을 조르기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끝내 카다피 정권을 버리지 못할 정도로 리비아 정권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반카다피 세력의 대변자 구실을 자임하는 전 카다피 정부 인사들은 미국과 유럽연합 정부와 동맹관계를 맺는 데 적극적으로 임했던 자들로, ‘친서방’으로 알려져 있다. 과도위원회의 일부 인사들은 처음부터 미국 정부와 손을 잡고 카다피를 무너뜨리려 했다. 예컨대, 압둘 파타 유니스 장군은 3월 1일에 지상군은 안 되지만 서방이 카다피 군대를 폭격하는 것은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리비아 반란 세력의 기층을 구성하는 세력들은 이런 주장을 즉각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미국 정치인과 안보 전문가 들이 리비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논의할 때, 반란군 통제 지역에는 ‘외국 개입 반대한다’는 영어 현수막이 걸렸다.

과도위원회의 하피즈 고가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외국 개입에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리비아 민중이 리비아 나머지 지역을 해방할 것이고, 그들이 카다피 보안군을 일소할 것입니다.” 3월 6일 벵가지에 도착한 영국 특수부대원들은 바로 체포당했다. 반란 세력은 카다피가 반란을 제국주의의 음모라고 주장하면서 지지를 회복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자위야 같은 주요 도시들에서 반란 세력이 군사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하고서야 제국주의 개입을 요구하는 주장들이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반란 세력은 트리폴리와 시르테로 반란을 확산시키고 정권을 철저히 분열시킨다는 생각을 포기했고, 제국주의 국가의 지원이 반군 동맹의 약점과 과도위원회의 권위 부족을 보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리비아 개입을 놓고 분열한 듯이 보였다. 한편에는 개입에 반대하는 ‘현실주의자’인 국방부 장관 로버트 게이츠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유엔 주재 미국 대사인 수전 라이스 같은 호전적 자유주의자가 있었다.

초기 나토 폭격을 지휘한 미국 아프리카사령부(Africom)의 사령관인 카터 햄 장군은 원래 미국의 개입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미국 정부보다 리비아 개입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3월 17일 미국 정부는 유엔의 지지를 받은 호전적인 개입안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CIA 첩보원과 특수부대원 들은 반란 세력과 협상하려고 리비아 땅을 밟았다. 서방 열강은 만약 카다피가 벵가지를 점령하면 엄청난 대학살을 저지를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공중 폭격을 정당화했다.

납치 당한 혁명

물론, 카다피는 잔인한 반격을 지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란 세력으로 이탈한 전 대사인 이브라힘 다바시가 주장하듯이 ‘인종 청소’를 낳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리비아 개입을 ‘인도주의적’ 근거로 정당화하면서 이것의 정치적 측면은 감춰졌다. 만약 대량 살상을 막는 것이 개입의 목표였다면 ‘적대 행위 중단’을 위한 협상을 벌이는 방법도 있었다. 카다피는 자신이 리비아를 정치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조건으로 휴전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따라서 진정한 쟁점은 리비아 혁명이 승리해 민중 세력이 리비아를 통치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닐지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바레인과 예멘에서 반혁명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전에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리비아에 대한 서방 개입은 이 지역 혁명들에 대한 서방의 모든 대응을 보면서 평가해야 한다.

미국 정부는 오랫동안 혁명적 상황에 개입해 왔고, 자신에 의존하는 지역 엘리트들을 통해 민중의 주도권을 뺏으려 했다. 일단 사실상 나토가 리비아 투쟁의 속도를 결정하고, 나토의 첩보원과 특수부대원 들이 현장 전략을 좌우하게 되면서 리비아 민중은 반카다피 항쟁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리비아 혁명은 납치당한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 정부가 중동에 적용해 온 ‘해방’의 모델은 이라크에서 볼 수 있는 대형 무덤과 고문실이었다. 오바마 정부는 혁명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모델을 만들려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협상에 의한 해결 가능성이 부상하고 있다. 이 협상안에서 카다피는 배제될 것 같지만 카다피 정권의 틀은 유지될 것이다.

이것이 오바마,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과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가 서명한 ‘평화를 향한 길’이 제시하는 길이다. 만약 이 계획이 현실화된다면, 이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에 의한 국토 분열이 될 것이다. 그것은 리비아 혁명의 승리가 아니라 패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