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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사회가 직면한 위기와 모순

2011년 4월 쿠바 공산당은 쿠바를 시장에 개방하는 내용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마이크 곤살레스는 이런 변화를 낳은 쿠바의 모순을 분석한다. 마이크 곤살레스는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책갈피)의 저자다.

2011년 4월 쿠바 공산당은 당대회를 열었다. 이것은 1997년 이후 최초의 전당대회이자 피델 카스트로가 의장 구실을 하지 않은 최초의 전당대회이기도 하다. 카스트로는 공산당 총서기이자 국가평의회 의장이자 군 최고 통수권자였다. 4년 전 카스트로는 이 권한을 자기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 피델 카스트로보다 다섯 살 어리고 1959년 혁명 때부터 국방부 장관이었다 ― 에게 넘겼다.

사회주의자라면 형에서 동생으로 권력을 이양한 것이나, 이들이 50년 동안 혁명을 절대적으로 통제해 온 것에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다. 청년 지도자들이 등장해, 이들이 잠시나마 최고 지도자들의 지위를 계승할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외무부의 로베르토 로바이나나 경제부의 카를로스 라르고가 대표적 사례였다. 그러나 이들은 지도부의 결정으로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형식적인 투표를 빼면, 새로운 지도부가 성장할 기회를 주거나, 현 정권이 정말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판단하려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선거는 단 한 번도 당 조직 내에서 실시된 적이 없다.

물론, 라틴아메리카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역사적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끈 투사로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의 개인적 인기는 높다.

그러나 그에 대한 숭배(그만이 숭배 대상이다)와 제국주의에 대한 형식화된 비난은 큰 한계가 있다. 그것이 자기해방에 근거를 둔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진정한 대중적 정치 토론과 논쟁, 진정한 선거나 대안적 정치 관점을 제기할 실질적 기회 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숭배

지난달 전당대회에는 대표 1천 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리 정해진 후보들 명단을 놓고 당내 기관들에서 실시된 선거들을 통해 뽑혔다. 2010년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가 쿠바를 방문했을 때, 그는 2011년 전당대회에서 통과될 결의문과 결정 들을 미리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내부 토론 과정도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말이다.

지난해 말 연설에서 라울 카스트로는 이번 전당대회의 목표가 “쿠바 사회주의를 지속 가능하고 역진이 불가능하게 만들려면 경제 운영 방식의 전략적 변화를 시급히 도입해야 하는 현 실정에 비추어 … 쿠바 경제 모델을 완벽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 ― 이 중 상당수는 이미 적용 중이었다 ― 에는 경제를 외국 자본에 개방하기, 국유 부문 일자리 50만 개 삭감, 대다수 쿠바인들이 생계를 유지하려고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 지급 중단 ― 쿠바 월 평균 임금은 20달러밖에 안 된다 ― 등이 포함돼 있다.

이 계획을 보면, 국유 부문에서 일하다 실업자가 된 사람들은 민간 부문으로 유입될 것이고 민간 부문의 규모는 계속 커질 것이다. 독자적 경제 활동이 허용될 것이고 더 많은 세금이 부과될 것이다. 대규모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획득하는 것도 허용될 것이고 일부 국유자산은 개인에게 매각될 것이다. 29만 5천 명이 이미 민간 부문에서 일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수는 늘어날 것이다. 한 연구를 보면, 민간 부문이 이미 전체 경제의 6분의 1에 이른다.

평범한 쿠바인들에게는 매일매일 삶이 힘겨운 투쟁이다. 페소로 임금을 받는 사람들 ― 관광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 은 입에 풀칠을 하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쿠바 소설가 레오폴도 파두라 푸엔테스는 그 결과로 도둑질과 부패가 쿠바 곳곳에 스며들게 됐다고 말한다.

쿠바 농업 정책은 비효율적이고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쿠바는 많은 식량을 수입한다. 쿠바가 대대로 의존해 온 사탕수수 산업은 가격 폭락과 토양 오염으로 몰락 직전이다.

대다수 쿠바인들은 이렇게 힘들게 살지만 광범한 부패의 수혜자인 국가의 소수 특권층, 미국에서 송금되는 돈을 받는 사람들, 관광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달러화 상점과 쇼핑몰에서 ‘쇼핑’(언제나 영어로 표현된다)에 탐닉한다.

2011년에 한 연설을 마치면서 라울 카스트로는 다음과 같은 잔혹한 대안을 제시했다. “우리가 잘못을 고치지 못하면 우리는 망할 것이다.” 2005년 피델 카스트로는 혹독한 조처를 실행하지 않으면 부패 때문에 혁명이 내부에서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1986년 [반부패] 정화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라울 카스트로는 똑같은 말을 한 바 있다.

그러나 부패는 소수의 정치 관료들이 나라를 통제하는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들은 1959년 풀젠시오 바티스타 정부를 전복시킨 뒤부터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1959년 쿠바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반식민지 혁명이었다. 대다수 쿠바 노동자들은 이 혁명에 공감했지만 방관자의 위치에 있었다. 오늘날 평범한 쿠바인들은 이 소수의 특권 집단과 하루하루 삶이 전쟁인 대다수 사람들 사이의 갈수록 커지는 격차에 분노를 토한다.

물론 이런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반복되는 반론이 있다. 쿠바가 1959년부터 큰 어려움 ― 많은 부분 쿠바 혁명을 파괴하려는 미국 정부의 끝없는 노력이 초래했거나 그것 때문에 증폭된 ― 을 겪어왔지만, 교육과 의료를 중심으로 모든 쿠바인이 생활수준을 높인 중요한 사회적 개혁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라울 카스트로가 발표한 조처들 속에는 노동자가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돕는 보조금과 장학금 삭감이 포함돼 있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고등교육 기관에 입학할 수 있지만, 이제는 교육비를 알아서 내야 한다.

다른 나라로 파견된 쿠바 의료진에 관해 얘기가 많다. 예컨대, 베네수엘라의 바리오 아덴트로는 쿠바 의료진 2만 명을 고용했고 젊은 베네수엘라 의사들이 쿠바에서 훈련받고 있다.

아쉽게도, 이것은 단순한 국제 연대 사례가 아니다. 쿠바 의료진과 교육자들은 쿠바의 중요한 수출품이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쿠바는 의료진을 보내는 대신 석유를 받는다. 아마 이것이 20세기 말 쿠바가 힘들었을 때 쿠바 경제를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덕분에 쿠바 의료서비스의 질은 하락하고 있고 교사도 부족한 실정이다. 외국으로 나가지 않은 사람들(외국에 나가면 달러로 보수를 받는다)은 관광산업에 진출해서 택시를 몰거나, 관광 안내원을 하거나, 심지어는 성매매를 하면서 달러를 벌려고 한다.

쿠바 경제의 위기는 199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거의 30년 동안 쿠바 경제를 지탱해 준 소련의 지원이 갑작스레 끊겼다. 1990년대 말에 관광산업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쿠바 경제도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성장은 쿠바 경제의 근본적 전환과는 상관없는 것이었기에 기반이 취약한 성장이었다.

비록 오바마 정부 들어 약간 숨통을 틔워 주긴 했지만, 역대 미국 정부가 지속해 온 범죄에 가까운 경제 제재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 세계적 불황, 태풍 피해, 사탕수수와 니켈 가격 폭락이 결합돼 쿠바의 위기는 깊어지고 있다. 게다가, 2008~2009년 동안 관광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 뒤로 회복됐지만 수입은 기대보다 느리게 늘고 있다.

소수 특권층

이 모든 상황이 결합돼 사무엘 파버가 “사회적 쇠퇴”라고 부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즉, 대다수 쿠바인들은 열악한 삶을 산다. 그러나 고급차를 몰고 아바나의 말레콘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소수 특권층도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야 콩나물 버스를 타고 집에 간신히 갈 수 있는데 말이다.

또, 최근 외국계 회사들에서는 자신들도 국가와 경제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것을 조금이라고 얻고 싶은 심정에 임금을 페소가 아니라 달러로 지불해 달라고 요구하는 저항들이 일어났다. 이렇게 심각한 소외 현상은 《더러운 아바나》 3부작을 쓴 페드로 후안 구티에레스나 〈코모 비비레〉(어떻게 살라고)를 부른 페드로 루이스 페레르 등 쿠바 문화인들의 단골 소재가 됐다.

쿠바에서 오랫동안 보기 힘들었던 이런 저항의 몸짓과 시위는 지난 2~3년 동안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래서 힙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전국 대학들에서 집회가 열렸다.

라울 카스트로는 사회주의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故) 셀리아 아르트(1959년 혁명을 이끈 ‘7월 26일 운동’ 창립자의 딸)가 과감하고 용기있게 지적했듯이 “사회주의가 다른 사회체제와 다른 점은 부가 약간 더 공정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자신을 생산수단의 작동자로, 운영자로, 소유자로 인식하는 새로운 의식과 함께 새로운 생산관계가 나타나야 한다.”

사실, 쿠바의 현실은 아르트가 말한 것과 거리가 멀다. 부의 분배는 갈수록 불공평해지고 있고, 그가 말한 노동계급이 통제하는 직접 민주주의와 눈곱만큼도 닮지 않았다. 2010년 발표한 일련의 글들에서 기예르모 알메이라는 당대회에 제출된 많은 양의 문서들이 노조나 민중권력 기관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을 지적했다. 오히려, 이제 당과 국가가 공식 통합될 것이다. 국가기구에서 독립된 정치 영역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게 됐다. 물론, 이 통합은 이미 존재한 것을 공식적으로 추인한 것일 뿐이다. 만약 공산당 외부에 아무런 정치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실제로 허용되지 않는다), 실질적인 민중권력이 행사되고, 비판적 토론이 벌어지고, 권력이 도전받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쿠바에 이런 것이 존재하는가? 라울 카스트로는 무슨 의미로 “쿠바 사회주의를 지속 가능하고 역진 불가능하게 만들자”고 말한 것인가?

이번 전당대회가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추진하려고 소집된 것은 분명하다. 경제는 자유화될 것이고, 쿠바 경제는 느리지만 분명히 세계경제에서 제 위치를 찾으려 할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50년 동안 진행된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해 달라는 요구가 미국 중서부 식량 생산업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장하는 쿠바 시장에 접근하고 싶어 한다. 또, 전당대회에서 발표된 새로운 조처들이 도입되면, 쿠바 인구의 20퍼센트가 민간 부문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지금 쿠바에서 생산된 물품들은 국가를 통해 판매된다. 이것은 쿠바 국가 관료를 강화하고 그들이 더 많은 부패 행위를 저지를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신생’ 민간 기업인들의 대다수는 바로 그 관료들의 가족과 친구 들일 것이다. 사실, 지난 15~20년 동안 이 과정이 이미 진행돼 왔다.

라울 카스트로가 추구하는 이른바 ‘사회주의 모델’은 사실 강력한 정치 통제와 경제 자유화가 결합된 중국 모델이다. 이런 모델은 당연히 민간과 국가의 자본가들에게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것이다. 말로는 노동자들의 이름 아래 이런 정책을 진행한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노동자들을 희생시킬 것이다.

이런 주장은 추상적이거나 학술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쿠바의 경제적 생존을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받는 쿠바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전략에 관련된 것이다. 쿠바 노동자들은 쿠바 국가가 강요하는 잔인한 정책에 맞서 어떻게 자기 이해관계를 보호하고 대응할 것인가? 두 가지가 필요하다.

먼저, 사회주의자들은 오랫동안 쿠바에 고통을 가져다 준 제국주의 경제 봉쇄를 폭로하고 비판해야 한다. 오바마 정부를 포함해 역대 모든 미국 정부가 카스트로의 쿠바를 포위·봉쇄한 것은 심각하고 포괄적인 피해를 낳았다.

다른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쿠바 국가의 반제국주의 미사여구가 쿠바의 심각한 모순을 감추는 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 국제연대의 이름 아래 쿠바 정부나 쿠바 혁명의 한계에 대한 모든 비판은 반혁명적인 것으로, 혹은 미국의 반카스트로 로비 집단에게 이득을 주는 것으로 취급받아 왔다.

그러나 만약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면, 쿠바 노동계급이 갈수록 권력에서 소외당하고, 독립적 계급 조직의 결성이 허용되지 않고, 50년 동안 권좌를 지켜 왔고 이제 새로운 조처들을 도입하려는 쿠바 지배계급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도 쿠바가 여전히 사회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쿠바에서 실제로 사회주의의 불꽃을 지피는 사람은 사회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사람이자, 라울 카스트로 정권 아래 갈수록 심각해지는 비판적 목소리에 대한 억압을 폭로하는 사람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자기 형제의 정권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는 고비 때마다 자기 형제의 정권을 옹호해 왔다.

피델 카스트로, 우고 차베스,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가 리비아의 카다피를 옹호한 것을 보고 전 세계 사회주의자와 활동가 들은 곤혹스러움과 우려를 느꼈다. 물론, 리비아의 저항세력은 오늘날 쿠바의 저항운동처럼 그 정치적 성격이 불명확하고 다양하고 때로는 모순적이다. 거의 50년 동안 두 나라 모두 정치적 비판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웠고, 독립된 정치 활동을 조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명확한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혁명이라는 학교”는 그런 운동이 자랄 수 있는 최고의 토양을 제공한다. 카다피에 대해 피델 카스트로가 모순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가 1959년 혁명 이래로 정권과 쿠바 민중을 연결해 온 반제국주의적 시각을 버리기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쿠바 국가가 독점권을 주장해 온 민중권력을 현재의 중동과 북아프리카 민중처럼 자신의 집단적 힘을 발견하기 시작한 쿠바 노동계급이 되찾으려 노력하고, 자본주의 그 자체를 자신의 이익을 해치는 적으로 인식한다면, 그만큼 쿠바 혁명은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셀리아 아르트가 지적했듯이, “굶주림, 위협, 봉쇄, 미국 해군과 핵미사일이 무너뜨리지 못한 것이 이제 우리 자신의 모순 때문에 무너지려 하고 있다. 최초로 인간의 행동이 시장을 극복할 수 있게 됐다. 그것이 사회주의의 핵심이다. 시장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우리의 (집단적) 통제 아래 두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