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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세상의 뒷골목에 웅크린 성매매 여성들

그날, 영등포의 성매매 여성들은 마스크를 쓰고, 혹은 기괴한 분장을 하고 타임스퀘어 앞을 내달렸다. 어떤 여성은 분신을 하겠다고 하다가 석유를 들이마시고 병원에 실려갔고, 어떤 여성은 분장이 엉망이 되도록 울음을 터뜨렸다. 이들은 자신들을 쫓아내지 말라고, ‘성노동’을 직업으로 인정해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녀들이 거리로 뛰쳐나올 만큼 성매매 단속이 강화된 건 ‘집창촌’ 일대를 패션전문단지로 개발하겠다는 ‘디자인 서울’의 야심찬 계획 때문이었다. 그녀들의 ‘성노동’ 언급에, 누군가는 창녀 주제에 어디 성스러운 노동의 이름을 들먹이냐면서 욕을 퍼부었고, 누군가는 직업으로 인정받고 싶다면서 얼굴도 못 내놓느냐고 빈정거렸다.

성매매는 고된 일이다. 많은 성매매 여성들이 질병에 시달리고, 온갖 위험한 요구에 직면한다. 사실 고된 일을 하면서도 그녀들은 일상적으로 자신을 깔아뭉개는 시선에 노출된다. 그녀들은 ‘바닥’이고 ‘창녀’로, ‘걸레’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 왔다. 자신의 삶을 ‘노동’으로 인정받는다면 더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될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노동’이라는 규정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섹스를 매매한다는 건, ‘어디까지가 매매 대상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성매매는 섹스 그 자체가 목적이다. 성을 구매하려는 남성은 상대 여성이 A건 B건 상관이 없다. 이 경우, 성적인 만족은 인간에 대한 특별한 감정보다 우선한다. 양자가 동의한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존엄성을 파는 것이 합당한가? 오태석의 희곡 〈심청이는 왜 인당수에 몸을 두 번 던졌는가〉에서 윤세명은 사람들에게 얻어맞으며 놀이기구가 되어 돈을 번다. 그는 가슴에서 피를 토하며 돈을 받는다. 이것을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매매는 음성적이다. 그런만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삶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한국 성매매 산업의 연간 매출액이 20조 원이 넘는다. 수요자가 연간 3백20만 명에 달하고, 성매매 여성만 1백만 명이나 된다는 통계도 있다. 최근 자발적으로 성매매에 나서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건 빌어먹을 물가상승, 청년실업과도 관계가 깊으리라.

빈곤

대부분의 성매매 여성들은 ‘당연하게도’ 성매매를 평생직장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성매매는 그녀들에게 다른 직업에선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돈을 쥐어 준다.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부양가족이 딸려 있는 성매매 여성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가 살기 위해서, 삶을 개선시킬 작은 사다리라도 놓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매매였다.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그녀는 매일 항생제를 먹어야 하는 현재를 견딜 수 있었다.

이들의 빈곤을 앞에 두고 여성가족부는 ‘여성들을 위한’ 성매매 단속을 말한다. 그리고 한 쪽에서는 기업들이 이들의 삶을 저당잡고 신나게 재개발 계획을 짜고 있다. 나는 성매매를 ‘성노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봐야 할 것은 그녀들의 삶이다. ‘성노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살 만한 세상과 내가 원하는 살 만한 세상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길에는 성매매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리들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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