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선진국이 아닌 곳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할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한 세기 동안 몰두해 온 이 문제를 닐 데이비슨이 살펴본다. 2005년 12월에 쓰인 이 글은 오늘날 아랍혁명의 전망과 과제를 고민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0세기 초 러시아(1905), 터키(1906), 페르시아(1909), 멕시코(1910), 중국(1911), 아일랜드(1916)에서 있었던 일련의 혁명들을 보면, 식민지 주민들은 역사 속의 수동적 방관자가 될 마음 따위는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들을 옭아맨 거대 권력의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속박을 끊어내는 것을 넘어 이 혁명적 운동이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는 모호했고 심지어 모순적이기까지 했다. 

아랍 혁명은 제3세계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 줬다.

새롭게 해방된 국가를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시키는 것이 목표였을까? 아니면, 대중을 위한 더 근본적인 자유를 성취하는 것, 즉 사회주의 건설이 목표였을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조차 오직 전자만이 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식민주의적·전자본주의적 지배를 끝낼 때까지 사회주의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온 트로츠키는 사회주의가 더 가까운 전망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두 가지 개념을 발전시켰다.

첫째는 ‘불균등결합발전’ 이론이다. 여기서 ‘불균등’이란 사회가 각기 다른 역사적 시기에 특정 발전 단계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결합’이란 특정 조건 아래서는 사회가 그런 단계 중 일부의 양상을 건너뛰고 새로운 잡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서면서 자본주의의 앞선 생산양식이 전자본주의 사회에 이식돼 긴장을 낳았다.

특히 자본주의가 불러온 산업화로 노동계급 운동이 출현했다. 피지배 국가의 노동계급 운동은 그 형성 과정이 워낙 격렬했기 때문에 전투성이란 측면에서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계급 운동보다 더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이 새롭게 탄생한 노동계급 운동은 국가와 자주 갈등을 빚었는데, 이들이 상대한 국가기구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그것보다 훨씬 취약했다.

둘째는 연속혁명 전략이었다. 연속혁명은 불균등결합발전 덕분에 가능했다. 개발도상국의 노동계급은 비록 전체 인구에서 소수일지라도 머릿수 이상의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 트로츠키는 바로 이 점 때문에 노동계급이 다른 억압받는 계급을 이끌고 곧장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전략이 노동계급 운동 내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었던 때는 1917년 러시아혁명이 유일하다. 그밖에 이 전략이 적용될 수 있었던 모든 상황에서 다른 전략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그 결과는 최악의 경우 완전한 패배였거나(1920년대 중국) 기껏해야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의 극히 일부만을 획득한 부분적 승리(1990년대 남아프리카)였다. 연속혁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상당한 규모의 혁명정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런 실패를 낳은 결정적 이유였다.

1917년 당시 식민 지배는 모든 지역을 지배하지는 못했고, 전자본주의 체제도 여전히 존재했다. 그 뒤로 일련의 혁명을 거치며 식민 지배와 전자본주의 체제는 대부분 사라진 지 오래다.

1949년 중국, 1959년 쿠바, 또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 있었던 사회적 격변은 공산주의 혁명의 모양새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국가자본주의 발전의 시녀 노릇을 했다. 사실 중국은 현재 세계 자본주의에서 가장 역동적인 곳 중 하나다.

그동안 제3세계 노동계급은 거듭거듭 투쟁에 나섰지만, 어느 곳에서도 권력 획득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 말이 곧 노동계급의 혁명적 구실에 대한 트로츠키의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인가?

제3세계는 여전히 존재하는가?

우리가 우선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제3세계, 즉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에 저개발 상태로 남은 한 무리의 나라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화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오늘날 제3세계의 존재를 부정하긴 마찬가지다. 그들은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제3세계로 통칭되던 나라들의 사회경제적 발전 패턴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아이티 같은 “실패한 국가”와 인도 같은 경제·군사 대국을 비교할 수 있는가?

둘째, 전 세계 국가들이 점점 균질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제국》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라는 공간적 구분은 점점 뒤죽박죽이 돼서 우리는 거듭 제3세계 안에 제1세계가, 제1세계 안에 제3세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제2세계라는 건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셋째, 반자본주의자들 중에는 세계를 지역에 따라 구분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 위로부터의 세계화가 세계 인구를 점점 동일한 착취 방식 아래 종속시키고 있다는 인식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그럼에도 제3세계를 다음 특징의 일부 또는 전부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첫째, 인구 다수가 상대적 빈곤이 아닌 절대 빈곤에 노출돼 있다. 둘째, 많은 경우 국가가 불안정해서 내부적으로는 경찰 억압에, 외부적으로는 군사적 모험에 의존한다. 셋째, 대다수 저개발 국가 경제는 계속해서 제국주의 체제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될 것이다. 넷째,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할 노동계급이 비록 성장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인구의 소수만을 차지한다.

이 점은 심지어 저개발국 중 가장 크고 가장 빠르게 산업화하고 있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농민·독립 생산자·소규모 사업체 들이 대규모로 존재하기 때문에 노동계급이 홀로 권력을 잡고 행사할 만한 역량은 안 된다. 따라서 여전히 모종의 계급연합이 필요하게 된다.

오늘날 개발도상국 인구의 다수가 노동계급인가 하는 점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핵심은 노동계급의 규모가 크다는 것, 특히 트로츠키가 활동하던 시기보다 더할 나위 없이 크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수의 제3세계 노동자들이 산업 부문에 종사하게 됐다. 남반구 산업 노동자의 수는 1980년 2억 8천5백만 명에서 1994년 4억 7백만 명까지 늘어났다. 1994년 당시 전 세계 산업 노동자의 수는 5억 명이었다. 

노동계급이 제3세계에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기각하는 이들 중 다수는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와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의 선거 승리를 대안 전략으로 칭송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 또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차베스와 모랄레스의 선거 승리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들이 대통령으로 당선하고 또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노동계급 운동이 핵심을 이룬 대중 동원이 있었다. 예컨대, 모랄레스 이전의 볼리비아 정부는 천연가스 공급권을 민간 기업에 팔 계획이었다. 그러나 먼저 농촌 주민들이 수개월에 걸친 봉쇄와 점거로 정부에 맞섰고, 다시 이 운동은 성장하고 있던 도시 노동자들의 저항에 불을 지폈다. 결국 정부의 사유화 계획은 좌절됐다.

국제적 성격

그러나 불균등결합발전의 불균등성이 늘 긍정적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지역 전체가 자본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아프리카가 대표적이다. 이곳의 노동계급은 성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줄고 있다. 게다가 자원 부족으로 사회가 영토 전쟁, 종족 분열로 얼룩지면서 노동계급도 갈수록 원자화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콩고, 아프가니스탄, 또는 아이티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가 그 나라의 노동계급이라고 주장한다면 비웃음만 살 것이다. 그래서 연속혁명의 국제적 성격이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위기의 해결책을 내부에서 찾아선 안 된다. 주변 나라의 노동계급 운동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그러나 강력한 노동운동이 존재하는 나라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새로운 사회 발전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 발전의 정치적 성격은 아직 결정돼 있지 않다. 연속혁명의 원래 정식은 노동계급이 다른 억압받는 집단을 지도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억압받는 집단의 다수는 농민이었다. 오늘날 농민은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 중요성은 현저히 줄었다. 제3세계 거대 도시 주변부에 슬럼이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잉여 인구의 특징을 가졌고 어쩌다 보니 한 곳에 모여 살게 된 이 거대 인구 ─ 마이크 데이비스가 자신의 저서 《슬럼》에서 소름 끼치도록 상세히 묘사한 ─ 는 휘발성이 아주 강하다. 비공식 부문으로 규정된 곳에 주로 고용돼 일하는 이 사람들과 조직 노동자의 관계는 대개 미약하다. 이들은 특별히 혁명적인 세력이 될 잠재력이 있지만(우리는 그 가능성을 볼리비아에서 봤다) 동시에 우익의 악선동을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도 있다.

거의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속적 민족주의의 다양한 변종들과 스탈린주의가 제3세계 정치를 지배했다. 이 정치의 신봉자들은 대중 동원이 필요할 때 조직 노동자들을 박수부대로 활용하곤 했다. 스탈린주의와 세속적 민족주의 정치가 갖는 한계는 그동안 곳곳에서 드러났고, 특히 중동에서 그 점은 아주 분명했다. 

이 양대 경향이 붕괴하면서 정치적 공백이 생겼다. 제국주의와 빈곤에 맞선 운동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수백만 명이 단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세우는 것을 넘어 투쟁을 심화시킬 수 있는 사상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논점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계속 투쟁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단지 물질적 생활수준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확대하고자 싸울 것이다. 우리는 최근 이란, 이집트와 중국 등에서 이 사실을 확인했다. 남은 물음은 이 투쟁이 과연 국가 권력에 도전하는 데까지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닐 데이비슨은 2003년 아이작 도이처 상을 공동 수상했고 《연속혁명 1백 주년》의 공동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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