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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럿 워크’ 운동:
“여성의 NO는 NO다”

올해 초 한 캐나다 경찰관은 대학 강연에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여성은 ‘헤픈’ 여성(slut)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여성의 옷차림이 성폭력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분노한 캐나다 여성들은 경찰의 발언에 항의하며 ‘야한’ 옷차림을 하고 시위에 참가했다. ‘슬럿 워크’(slut walk, 헤픈 여성처럼 입고 걷기)라고 불리는 이 시위는 “우리가 무엇을 입든, 어딜 가든, 예스(YES)는 예스(YES)고, 노(NO)는 노(NO)”라고 외쳤다. 이 시위는 유럽과 호주로까지 번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성폭력을 여성 탓으로 돌리는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6월 11일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반성폭력 시위 “우리가 무엇을 입든, 어딜 가든, 예스(YES)는 예스(YES)고, 노(NO)는 노(NO)

최근 한 판사가 피해 여성의 행실을 문제 삼으며 ‘성폭행 가해자가 무고한 것 아니냐’는 취지로 심문을 했다. 피해 여성은 모멸감에 괴로워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려대 의대생 세 명이 동기 여학생을 집단 성추행한 사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고려대 측은 신속한 징계는커녕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시험을 보게 하는 등 기본적인 피해자 보호 조처조차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를 징계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왜 먼저 술을 먹자고 했냐’, ‘왜 남자들이랑 같이 MT를 갔냐’ 등 피해자를 비난하는 말도 들린다.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14년 동안 일한 사내 하청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는 소장과 조장의 반복적인 성희롱을 참다 못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지만, 보호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보복 해고를 당했다.

2004년 밀양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여중생을 수차례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경찰은 피해 여학생에게 되레 “밀양 물을 흐려 놨다”고 비난했다. 피해자가 지역의 명예를 훼손한 가해자로 둔갑한 것이다.

편견

이처럼 그동안 한국 경찰과 법정은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퍼뜨리는 구실을 해 왔다. 피해자는 성폭력을 당한 고통이 치유되기도 전에 ‘성폭력을 당해도 싼’ 행동을 했다는 비난까지 받는 끔찍한 경험을 해야 했다.

여성이 성관계 경험이 많거나, 야한 옷을 입거나, 술을 먹거나, 늦은 밤에 돌아다닌 경우, 또는 가해 남성과 친한 관계이거나, 사귀는 관계에서 벌어진 성폭력은 흔히 여성 탓으로 돌려진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성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여성이 어떤 차림을 하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그것이 곧 성폭력을 해도 좋다는 의사표현은 아니다. 어떤 여성도 성폭력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여성의 노(NO)는 노(NO)”라는 반성폭력 운동의 구호처럼 성폭력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은 여성의 의사여야 한다. 즉, 성폭력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행동으로 정의돼야 한다.

한편, 성폭력을 여성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에 반대하는 행동을 ‘슬럿(slut)’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관한 논쟁도 있다. 무슨 옷을 입든 그것이 성폭력 피해 여성을 비난할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슬럿 워크’ 시위의 핵심 메시지는 타당하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 시위를 지지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슬럿’은 ‘정숙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함부로 해도 되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을 구별하는 엄연히 여성차별적인 말이다. 따라서 이런 차별적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운동의 정당성을 표현하는 데 더 이롭다.

뿐만 아니라, 이 말에 담긴 모욕적인 의미 때문에 더 많은 여성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길 수 있다.

성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남성의 폭력적 본성이나 제어할 수 없는 성욕 때문이 아니다. 성폭력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남성은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는다.

성폭력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에 대한 왜곡과 소외, 그리고 여성차별의 산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동등한 주체로 여겨지지 않고 성적 대상화되고, 여성의 성은 사고파는 상품으로 취급된다. 대중매체는 여성을 눈요깃거리로 만들고, 성적 이미지를 이용해 상품을 판매한다.

성폭력의 뿌리

사회 지배층은 이런 경향을 부추긴다. 권력층 남성들이 여성들의 성접대를 즐겨 받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못생긴 마사지걸이 서비스도 좋다”는 이명박이나 “아나운서가 되려면 모든 걸 다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국회의원 강용석의 발언은 이들이 여성차별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보여 준다.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가 여성차별적 기반 위에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늘었지만, 여성은 여전히 어머니, 아내로서 가족에 헌신할 것을 요구받고, 양육의 주된 책임자라는 굴레에 묶여 있다.

여성이 가족 내에서 하는 구실 때문에 여성은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고 온갖 여성차별이 합리화된다. 여성의 평균 임금은 여전히 남성의 60퍼센트 대에 머물고 있고, 여성들은 불안정한 저질 일자리를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시위들처럼 여성차별적 발언과 판결 등에 맞선 저항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성폭력이 발생하고 정당화되는 현실을 근본에서 바꾸려면 여성차별의 근원인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는 더 심대한 투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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