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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차별

때때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차별을 무시한 채 계급의 중요성만 강조한다고 비판받는다. 영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사라 베넷은 노동계급의 단결이야말로 모든 형태의 차별과 싸우고 궁극적으로는 차별을 종식시키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45년 전 동성애는 영국에서 범죄였다. 그러나 이제 동성 결혼은 현 정부 임기 안에 합법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글은 2012년에 발표됐고 영국에서 동성 결혼은 북아일랜드를 제외하고 2014년에 합법화됐다.] 이것은 성소수자, 여성, 흑인 등에 대한 차별에 맞선 투쟁이 성취한 여러 전진의 한 사례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전진에도 불구하고 차별은 여전히 엄연한 현실이다. 2012년 3월 ‘동성애 치료소’를 운영하는 한 기독교 단체는 “게이가 아니에요! 당당하게 탈-게이했어요! 걱정 말아요!”라는 문구로 런던 버스에 광고를 내려 했다. 장애인들은 “꾀병쟁이”나 “게으름뱅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이런 비난은 정부가 이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 중 하나인 장애인들을 공격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런 사례 외에도 로마인·유랑민·싱글맘 차별, 심지어 비만인 사람에 대한 차별 등 이 사회에는 온갖 차별이 존재한다.

차별의 일부는 공공연하게 법에 명시돼 있거나 국가기구에 의해 수행된다. 모국이 아닌 나라에 살면서 일할 권리나 동성과 결혼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그런 예다. 그러나 차별은 국가나 사회가 돌아가는 좀 더 비공식적인 방식에서 비롯할 수도 있다. 예컨대 교도소에는 백인보다 흑인 수감자가 훨씬 많고, 기업 이사회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적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자연스런 일’로 여긴다.

그러나 차별은 저항을 낳기도 한다. 꼭 차별의 당사자만 저항에 나서는 것도 아니다. 트레이번 마틴이라는 청년이 미국 플로리다의 경비가 삼엄한 부자 동네에서 살해당한 것에 광범한 분노가 인 것이 그런 예다. 그는 단지 후드 티를 입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게다가 사람들이 사회주의 정치에 매력을 느끼는 계기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차별의 경험일 때가 많다.

7만 명이 참가한 2019년 퀴어문화축제 성소수자 차별 없는 사회에 대한 대중의 염원을 보여 준다 ⓒ조승진

인간 해방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정신

마르크스주의가 받는 가장 흔한 비난은 마르크스주의가 “경제결정론”이며 계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느라 차별에 관한 까다로운 문제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참말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민족 억압, 인종차별, 성차별 등 온갖 차별을 다룬 사례가 많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공산당 선언》이 말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가 발전하는 조건인” 사회와 인간 해방을 이룩하기 위한 사상이다.

그렇다면 차별이란 무엇인가? 우선, 차별은 압박감이 아니다. 차별은 심리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차별받는다고 해서 꼭 차별을 자각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차별당하지만,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랩댄서[상대 무릎 위에 앉아서 선정적 춤을 추는 사람] 경력을 ‘선택’하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울증 등의 정신적·육체적 질환이 차별과 연관돼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상태와 차별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차별은 어떤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지배당하거나 통제받는다고 느끼는 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차별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다 보면 흑인도 백인을 차별하거나, 여성도 남성을 차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차별이 착취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어떤 활동가들은 계급 차별을 그저 차별의 하나로 보고 성차별이나 인종차별과 나란히 놓는다. 물론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에 의해 차별받는다는 것은 대체로 맞는 말이지만, 이런 진술은 자본주의의 핵심에 있는 계급 관계가 어디에 토대를 두고 있는지를 드러내지 못한다. 계급 관계의 핵심은 착취다. 착취란 노동자를 노동에서 소외시켜 그에게서 잉여가치를 뽑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차별이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게 차별받거나 지배당하거나 통제받는다는 느낌이나 마음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 성소수자 혐오자 등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차별의 역사

마르크스는 차별이 인간 사회의 자연스러운 특징, 따라서 불변하는 특징이 아니라 역사적 발명품이라고 봤다. 물론 어떤 집단이 받는 차별은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동료인 엥겔스는 여성차별의 기원을 계급 사회의 출현에 따른 가족의 형성에서 찾았다. 가족은 수세기 동안 크게 변했지만 체제 유지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에 여전히 존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지금 세대와 이전 세대 노동자를 돌보고 다음 세대 노동자를 기르는 비용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구실을 한다. 그래서 이 나라[영국]에서 노동할 수 있는 여성은 대부분 노동을 하지만, 이들은 가족에서 하는 구실 때문에 저임금을 감내해야 하고 경력을 쌓기도 어렵다.

어떤 형태의 차별은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나타났다. 인종차별은 노예무역과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노동자들을 항상 이간질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19세기 말에는 “동성애”라는 새로운 섹슈얼리티가 발명됐고, 사회와 가족제도의 존속을 위협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그러나 모든 차별은 물질적 기반이 있으며 계급 사회의 구조와 동학에서 출현한다. 차별은 자본주의의 존속을 뒷받침한다.

어떤 차별은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다는 것을 마르크스는 알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별의 성격이 그 이전 사회와 다르다는 점을 포착했다.

봉건제와 노예제 사회에서 압도 다수 대중은 노예(노예 주인의 소유물)이거나 특정한 토지와 영주에 예속된 농노였다. 이런 사회는 위계가 엄격했고 각자 ‘자기 분수’가 있다는 사상을 기본으로 여겼다. 지배자 외의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라는 개념은 거의 없었고 예속 관계가 널리 인정됐다.

새로운 사회가 등장하자 새로운 사상이 생겨났다. 봉건제를 타도하고 자본주의로 가는 길을 연 부르주아적 혁명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우애”와 같은 기치를 내걸었다. 이전 사회에 견주면 이는 인류에게 큰 전진이었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시장에 판매할 상품을 생산하는 형태를 취한다. 모든 것은 상품이 되며 노동력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는 특정한 영주나 주인에게 예속돼 있지 않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사상은 생산을 조직하는 이런 새로운 방식을 반영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인류 압도 대다수에게 자유란 자본가들에게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에 불과하다.(그나마 노동력 수요라도 충분하면 다행이다.) 자본주의는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힐끗 보여 줬지만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누리지 못하게 막았다.

자본주의 생산은 노동자들의 대규모 협업에 점점 더 의존하지만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한데 결집시키는 만큼 분열시키기도 한다. 노동자들은 일자리·잔업·주택, 심지어 더 나은 의료 혜택을 두고 끊임없이 서로 경쟁해야 한다. 차별은 노동자들을 이간질하고 분열의 골을 깊게 판다. 예컨대 대중매체와, 권력자들이 운영하는 정부는 이주 노동자가 정주 노동자보다 열등하다는 시각을 조장한다. 일자리가 많으면 이주민이 노동 인구에 합류하는 것을 용인하지만, 일자리가 줄어드는 즉시 이주민은 일할 자격이 없고 일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소외

이러한 분열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소외로 뒷받침된다. 소외는 무력감을 낳으며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반격하지 않으면 특히 더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노동자는 다른 이들을 깔보고 우월감을 느낌으로써 자기에게 통제력이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백인은 흑인을, 남성은 여성을 깔볼 수 있다. 그리고 꼭 차별받지 않는 집단만이 그런 우월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차별받는 집단도 다른 차별받는 집단을 깔볼 수 있다. 예컨대 “이주민 2세”가 지금 이주한 사람들을, 성소수자가 장애인들을 깔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차별을 유지할 이해관계가 노동계급 일부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모든 차별이 자본주의에 중요한 이득을 제공하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를 존속시킨다는 점을 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남성이 여성 차별에서 득을 본다거나, 모든 백인이 흑인 차별에서 득을 본다고 주장한다. 물론 특정한 차별을 받지 않는 집단은 그 차별을 받는 집단이 겪는 고통을 겪지 않는다. 그러나 그 차별을 받지 않는 이들이 그 차별을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예컨대 여성 풀타임 노동자가 동일 직종 남성보다 15퍼센트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이 남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용자들이 임금 인상을 억제하기가 더 쉬워질 뿐이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가 모두의 임금 인상을 위해 함께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가 직장에서 남성 노동자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한다면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성 노동자는 동료 남성의 성차별적 언행과 제스처를 통해 차별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성차별을 행한 것은 동료 남성일지라도 차별의 원인은 더 깊숙한 곳에 있다. 즉, 자본주의에 토대가 있다. 사회주의자는 계급의 단결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과 싸워야 한다.

소외와 왜곡된 자유와 평등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당하는 차별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차별이 끼치는 해악을 기꺼이 내면화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 전체보다는 개인을 강조하기에 우리는 차별의 가장 해로운 증상을 개인 탓으로 여기게 된다. 이때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해결책’을 들이민다. 이런 식으로 지난 5년 동안 영국의 출판업자들이 자기 개발서로 879억 원을 벌어들였다. “섹시하지 않다”고 자책하는 여성에게 봉춤(폴댄스)을 가르치는 “피트니스 강좌”나 성형 수술이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흑인의 피부색을 밝게 하는 기술도 있다.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는 체제

자본주의는 우리가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 관계가 왜곡되는 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같은 사회에 사는 어떤 평범한 사람들의 집단을 주적으로 삼게 하려고 무척 애쓴다. 대중매체는 이주민·유랑민·싱글맘에게 적대적인 끔찍한 선전을 끊임없이 뿜어낸다. 자본주의는 집단적 힘으로 자본주의를 뒤엎을 능력이 있는 노동자들을 이간질해서 지배력을 유지하며, 이데올로기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무슬림·성소수자·장애인 등 온갖 사람들과 끊임없이 만나고 협력해야 하는 우리 삶의 현실을 뒤틀어야 함을 뜻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자와 함께 차별에 맞서 싸우면서도, 변화의 핵심 주체로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차별은 노동계급뿐 아니라 모든 계급에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차별받는 집단 자체가 차별을 극복하는 데에서 핵심 주체라고 본다. 최근[2012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전(前) IMF 총리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성폭력 미수로 기소됨]의 방문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을 때 시위대가 외친 구호 하나는 “단결한 여성은 패배하지 않는다”였다. 이런 구호가 일부에게 상식처럼 여겨지는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 모든 여성은 성폭행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여성과 단결해야 하는가? 스트로스 칸의 후임자이자 여성인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유럽 전역에서 가혹한 긴축 정책을 추진하는 핵심 인물로, 수많은 여성과 남성의 생활 수준을 나락에 빠뜨리고 있다. 그리고 이는 사람들의 삶을 더 팍팍하게 할 것이고 더 많은 여성을 폭력의 위험에 노출시킬 것이다.

2019년 민주노총 주최의 3·8 세계 여성의 날 전국노동자대회 ⓒ임수현

물론 차별은 노동계급만 당하는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 혐오, 여성차별, 인종차별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해를 끼친다. 그리고 지배계급 여성도 노동계급 여성만큼이나 차별당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부와 권력으로 차별이 주는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 예컨대 부유층 여성은 하녀와 청소부를 고용할 수 있고, 가정 폭력에서 벗어날 물질적 수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급 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차별 문제를 한 켠에 치워 두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차별받는 집단의 자결권을 언제나 방어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가 계급을 강조하는 것은 차별과 소외를 낳는 사회의 진정한 분단선이 젠더, 성적 지향, 피부색이 아니라 계급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의 구실은 전체 노동계급을 최대한 단결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별받는 집단의 단결이 필연적이지 않음을 알아야 하고, 이 체제가 조장하는 인종차별, 성차별, 성소수자 혐오 등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킨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차별받는 집단의 권리를 키우고 지키는 법률을 환영하고, 그런 법률을 도입하기 위해 싸우며, 편견을 깨는 데에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한다. 그러나 차별에 맞선 투쟁은 언제나 계급 투쟁이 고양되는 시기에 도약할 수 있었다. 1960년대 말의 격동이 그런 사례였다. 계급 투쟁이 여성·흑인·성소수자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과 함께 벌어졌고 진정한 성과를 남겼다.

최근 이집트 여성들은 이집트 혁명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방어하면서, 군부의 극악무도한 성추행 위협과 폭력에 맞서 싸울 힘을 얻었다. 그러나 차별에 맞선 투쟁의 역사에서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비견할 만한 사건은 아직 없었다. 10월 혁명 직후 러시아에서는 동성 결혼, 낙태권이 인정됐고 가사의 사회화가 시도되는 등 여러 진보가 있었다. 이런 성과들에 견주면 보수당 정권이 동성 결혼을 양보한 것은 하찮게 보일 정도다.

노동계급의 단결

노동계급은 수십 년 이래 가장 큰 공세에 직면해 있다. 노동계급의 반격이 승리하려면 온 노동계급이 단결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가들은 그저 최상의 계급 투사로서가 아니라 레닌이 표현한 것처럼 “차별받는 사람들의 호민관”으로서 투쟁을 이끌어야 한다. 오늘날 노동계급은 여성의 비중이 커졌고, 인종도 다양해졌으며, 어느 때보다도 성소수자에게 개방적이다. 계급 단결은 지배계급의 긴축 계획을 좌절시키는 데에도 중요하지만, 오늘날 많은 노동자들이 직면하는, 차별에 근거한 가장 심각한 이간질을 극복하는 데에서도 핵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