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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년 아랍의 봄에서 최근 중동 반란까지: 전개 과정과 의미

필자 박이랑은 중동 문제 전문지 《미들이스트 솔리대리티》 공동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학 대학(SOAS)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 ] 안의 내용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노동자 연대〉 편집팀이 넣은 것이다.

튀니지의 한 청년 노점상이 생활고를 비관하며 분신한 사건을 계기로 ‘아랍의 봄’ 혁명이 발발한 지 10년이 흘렀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은 이집트, 리비아, 예멘, 시리아, 바레인 등지로 번지며 중동 전역의 부패한 지배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1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아랍의 봄’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것인가? ‘아랍의 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튀니지에서 출발한 혁명이 다른 아랍 나라들로 확산하자, 당시 일각에서는 이제 중동에 민주주의가 찾아왔다는 식의 낙관론을 펼치는가 하면, 이슬람주의가 지역의 패권을 장악할 것이라고 보는 비관적 견해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고, 둘 다 틀렸다. 혁명은 부침을 겪고 있으나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10년 동안 일어났던 아랍의 반란들을 돌아보고자 한다면, 이 반란들이 일어난 원인을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먼저 복잡한 종교 갈등, 각종 종파 갈등 등을 걷어내고 나면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선은 계급 분단선이다. 주류 지배계급이 세속주의자였든(이집트, 튀니지, 알제리 등) 이슬람주의자였든(수단 등) 간에, 혁명이 일어난 배경에는 경제 위기가 있었다.

2008년 경제 위기와, 그에 앞서 길게는 수십 년간 지속된 신자유주의 공격으로 인해 지배계급에 대한 민중의 분노와 반감은 쌓여 왔다. 아랍 지배계급들은 제국주의 세력과의 협력과 비호 속에 오랫동안 권력을 누리며 온갖 부패를 저지르고 부를 축적했다. 때때로 일어난 반란은 무자비하게 진압됐고 지배자들은 시위대를 서슴지 않고 학살했다.

하지만 2011년 많은 아랍 민중은 임계점에 달해 있었다. 평소라면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 민중의 거대한 분노와 만나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튀니지에서는 과일 수레를 압수당한 청년이 분신했다. 시리아에서는 한 지방 도시의 아이들이 반정부 낙서를 벽에 했단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당했고 일부는 살해됐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유명한 ‘아랍의 봄’ 의 구호인 “빵, 자유, 사회정의”가 이렇게 탄생했다.

생활고로 인해, 혹은 정치적 자유를 위해 시작된 반란의 배경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가 있었다. 거리는 시위대로 가득 찼고, 주요 도시 중심부와 광장은 점거됐다. 평생 동안 한 명, 많게는 두어 명의 독재자 하에서 자라 온 아랍 청년들은 제 목소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 물결은 작업장으로 번졌고 이집트와 튀니지 등지에서는 노동쟁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11년 1월 25일, 이집트 혁명의 첫 시위를 이끄는 청년들 ⓒ출처 호쌈 엘하말라위

노동계급

노동계급의 투쟁은 ‘아랍의 봄’에서 결코 빠트려서는 안 되는 요소다. ‘아랍의 봄’ 이전에도 엄혹한 정치적 탄압 속에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영역은 노동운동이었고, ‘아랍의 봄’과 함께 찾아온 정치적 자유의 시기에 노동계급은 전진했다. 반란이 일어난 곳 중 노동계급이 가장 전진했던 곳은 이집트였다.

1월 25일 대규모 시위가 시작된 지 18일 만에 이집트의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가 물러났다. 무바라크 퇴진 후 작업장에서 독립 노조 결성과 파업 등의 노동쟁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혁명에 참가한 평범한 노동계급은 여전히 자신들의 직장에서는 “꼬마 무바라크들”이 권력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임금 인상, 고용 안정, 부패한 경영진 퇴진 등을 걸고 수많은 작업장이 파업과 점거에 들어갔다.

일례로, 혁명 당시 카이로 북부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 의사, 청소 노동자 할 것 없이 단결해 구 정권과 결탁했던 병원장을 말 그대로 병원에서 쫓아냈다. 뒤이어 병원 노동자들은 민주적으로 대표를 선출하고 다른 병원들의 노동자들과 연대에 나섰다. 각지에 설립된 이런 독립 노조들을 한데 묶고 혁명의 노하우를 전수, 전파하는 데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하지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아직 소수였고 조직의 규모는 급진화한 수많은 청년과 노동자들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노동계급의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상황에서 치러진 2012년 첫 민주적 대선에서는 오랜 기간 탄압 속에서 야당 생활을 하며 지지 기반을 다져 온 이슬람주의 단체인 무슬림형제단의 ‘자유와 정의당’이 승리했고 무함마드 무르시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대개는 중간계급, 지식인, 일부 자본가 계급이 중심인 주류 이슬람주의 정당들의 지도부는 혁명의 요구인 근본적인 사회 변혁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이집트에서 (그리고 튀니지에서도) 혁명 후 집권한 이슬람주의자들은 온건한 개혁주의자들답게 혁명의 요구와 자본주의 국가 발전이라는 모순된 두 지향점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고 친시장, 긴축 정책을 펼치며 민중의 삶을 공격했다.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지지는 빠르게 실망으로 변했다. 이집트에서는 군부가 이런 불만을 이용해 2013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켜 압둘팟타흐 시시(이하 엘시시)가 집권하고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반대 세력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노동계급의 운동이 더 급진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고, 집권한 이슬람주의자들은 반혁명 세력의 반격 앞에서 취약했다.

엘시시가 집권한 후 무슬림형제단은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찍혀 혹독한 탄압을 받고 있다. 2013년 무르시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이던 카이로 ‘라바아 광장’에 군대가 들어가서 2천 명을 살해했다. 무르시는 재판을 받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고 활동가 수만 명은 여전히 수감돼 있다.

탄압의 화살은 이슬람주의자들만 겨냥하지 않았다. 수많은 세속 인권운동가, 좌파 활동가들도 ‘SNS상 가짜 뉴스 유포’, ‘거짓말로 시위 선동’, ‘무슬림형제단과 테러 모의’ 등 터무니없는 죄명으로 구속돼 있다. 한국에서도 석방 캠페인을 벌인 바 있는 이집트 사회주의 활동가 마히누르 엘마스리, 하이탐 모함메딘 등도 다시 구속됐다.

상황이 엄혹하게만 보이지만, 정권의 히스테리적인 탄압의 이면에는 위기감도 분명히 존재한다. 지속되는 경제 위기 속에서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에 양보할 수 있는 한도는 정해져 있다. 이미 이집트 정부의 공공지출 삭감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직장 폐쇄에 항의하는 철강 공업 노동자 수백 명의 점거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저항은 계속 벌어질 것이고 어느 순간 다시 반란의 물결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구실이 앞으로 더욱 중요할 것이다.

제국주의

한편, 제국주의 세력의 각축장으로 변해 비극으로 고통받는 곳들이 있다. 바로 시리아와 리비아, 예멘 등이 대표적 경우다. 지난 10년 동안 중동에서 제국주의 갈등의 양상은 표면적으로는 과거와 다소 상이한 모습을 띠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오바마 행정부 이후 미국 제국주의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고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을 외치면서 대외 정책의 무게 중심을 옮겼기 때문이다.

1990년 걸프전,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2003년 이라크 침공 등과 같은 직접적인 대규모 군사 개입이 아니라 무인기 폭격, 공중 지원, 소규모 특수부대 투입, 훈련 교관 파견, 현지 동맹을 활용한 간접 개입 등이 주된 방식이 됐다. 이처럼 대규모 군사 개입을 자제하는 한편 미국은 현지의 동맹들을 강화하는 방향을 추구했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개입 방식 변화는 어느 정도의 정치적·군사적 공백을 낳았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유지돼 온 미국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 질서에 균열을 낸 ‘아랍의 봄’이 찾아오자 러시아는 물론 터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역내의 아류 제국주의 세력들이 그 공백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42년간의] 카다피 독재를 무너트린 리비아, [33년 독재자] 살레를 내쫓은 예멘, [세습 대통령] 아사드를 궁지로 몰아넣은 시리아 등지에서 혁명 세력과 민중이 처한 오늘의 비극은 이런 제국주의 경쟁의 안타까운 결과물이다.

평화적 시위로 시작한 시리아 혁명은 아사드 정권을 무력화하며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시리아에 해군 기지를 두고 있는 러시아는 아사드 정권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재빠르게 개입하며 전세를 바꿔 놓았다. 지역 내 영향력 확대를 노린 이란도 직간접적으로 아사드를 지원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걸프 왕정들은 수니파 반정부 민병대를 지원했고 종파 갈등을 부추기며 러시아와 이란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 한다.

애초에 소련에 맞설 용도로 미군이 훈련시킨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이들이 만든 알카에다 조직원들, 미국의 점령으로 일자리를 잃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군대 출신 장교들 등이 주도해 만든 조직이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이하 아이시스)다. 이들은 시리아 혁명이 유혈 탄압으로 위기에 봉착하자 대안을 잃은 이들, 서방과 러시아 등의 폭격에 대한 분노 등을 자양분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아이시스는 그 뿌리부터 제국주의가 낳은 끔찍한 괴물이었다.

평화적 민중 봉기로 시작한 시리아 혁명 세력은 종파에 따라, 지원받는 제국주의 세력에 따라 갈갈이 분열했고 인구의 절반은 난민으로 전락했다. 현재 아사드 정권은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고 터키의 지원을 받는 일부 반정부 세력이 시리아 북부에서 간신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리아 민중이 다시 저항의 목소리를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리비아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 등 서방 제국주의 세력이 직접 개입했고 카다피가 시위대에 살해당한 이후에도 석유 이권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게끔 협력할 수 있는 세력을 지원했다. 친서방 망명 인사들로 구성된 리비아통합정부(GNA)는 아래로부터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자국의 경제적·지정학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걸프 왕정들과 이집트 등의 지원을 받는 군벌 세력으로 인해 리비아는 오랜 기간 내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예멘에서는 장기 집권을 한 독재자 살레가 반정부 시위로 쫓겨난 이후, 각자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의 대리전이 지속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한 걸프 왕정의 지지를 받는 새 내각이 지난달 들어섰지만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과의 휴전과 개전을 반복하며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예멘인 수백만 명이 아사 위기에 처하고 많은 이들은 난민이 됐다.

정세가 복잡해 보일지 몰라도,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제국주의 경쟁의 희생자는 민중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등을 내세우며 “서구적 가치”를 위해 개입이 필요하다는 서방 제국주의의 패권이 지속되는 한, 이권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지역의 아류 제국주의 세력 간의 경쟁이 지속되는 한, 이집트 군사감옥과 리비아의 인신매매 시장과 지중해 한복판의 가라앉는 보트에서의 비극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시, ‘아랍의 봄’

하지만 혁명은 단기성 이벤트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지난 2년은 아랍 민중이 이를 현실에서 보여 준 기간이었다. ‘아랍의 봄’이 다소 비껴갔던 지역에서 반란의 물결이 다시 일어났다. 알제리와 수단에서 수십 년 집권한 독재자들이 반란으로 인해 물러났고, 이라크와 레바논의 민중은 대규모 시위 속에서 뿌리 깊은 종파·종단 갈등을 초월한 단결을 보여 줬다.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 지역마다 2011년 당시 주목받았던 광장 점거 방식의 시위 형태가 다시 등장했다. 수단 하르툼, 레바논 베이루트, 이라크 바그다드 등 도시 중심의 광장을 시위대가 길게는 수개월씩 점거하며 정권에 맞섰다. 마치 2011년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처럼, 시위대는 종파, 종교, 인종, 성별 구분 없이 단결하며 아름다운 연대를 과시했다.

"민중은 정권 퇴진을 원한다" 2011년 11월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에 운집한 인파 ⓒ출처 기기 에브라힘

동시에 10년 전 ‘아랍의 봄’ 혁명을 촉발한 물질적 조건이 변함없이 존재하며 여전히 새로운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억압된 민주적 권리,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신자유주의 긴축 정책 등으로 인해 축적된 민중의 불만이 작은 불씨에도 큰 반란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여기에 가속화되는 기후변화와 최근의 팬데믹 위기는 가뜩이나 빈곤과 불평등에 신음하는 중동 민중을 더 곤궁한 처지로 몰아넣고 있다.

수단과 알제리

2019년에 일어난 반란 중 가장 전진한 곳은 수단이었다. 빵 가격 인상으로 인해 급식이 중단되자 거리로 뛰쳐나온 초등학생들의 시위로부터 반란이 시작됐다. 30년 동안 수단을 통치했던 오마르 알바시르가 퇴진했고 군부는 강력한 대중 운동에 권력을 일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수단 민중은 노동조합 연맹인 수단직능인협회(SPA)를 중심으로 대규모 거리 시위, 총파업, 광장 점거를 조직했다. 지역마다 ‘투쟁위원회’가 세워지고 각종 생필품을 공급하는 것은 물론, 언론과 인터넷을 통제하는 군부 정권에 저항했다.

수단에서 시위대를 가득 태우고 파업에 참가하는 철도 노동자들 ⓒ출처 MENA Solidarity Network

물론 한계도 존재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충분히 사용하려 하지 않고 오직 군부와의 협상을 위한 지렛대 정도로 제한했다. 노동계급의 투쟁을 전진시킬 수 있는 좌파가 부재한 탓도 있었다. 수단공산당(SCP) 등은 오랜 탄압으로 세력이 약화돼 있었다. 결국 군부와 권력을 나눠 갖기로 합의한 이후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군부의 불편한 동거가 지속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7월에는 지연되는 개혁에 대한 불만, 군부에 대한 분노 등으로 인해 수십만 규모의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수단의 혁명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알제리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20년 동안 정권을 잡았던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가 5선 출마를 선언하자 불평등, 실업, 인플레이션, 긴축 정책에 쌓여 온 불만이 폭발하며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일어났다. 많은 작업장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되고, 노동자들이 친정부 어용노조 관료들을 내쫓고 파업에 돌입한 곳들도 생겼다. 결국 부테플리카는 대선 출마를 포기해야만 했다.

알제리 군부와 구 정권의 인사들은 코로나 사태 덕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제리인들은 혁명이 멈추지 않을 것이며, 구 정권 체제의 모든 것을 갈아엎기 전까지 혁명은 지속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앞선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혁명을 통해 근본적 변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군대와 공권력이라는 장벽을 넘어 국가기구를 완전히 분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계급이 조직돼야 하고, 개혁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적 정치가 필요하다.

총파업 행진 중인 알제리 노동자들과 학생들 ⓒ출처 Cosyfop

레바논과 이라크

한편 2019년 10월, 레바논과 이라크에서는 전례 없는 종파·종단 간 연대와 단결이 각각 꽃피었다. 오랜 제국주의 개입과 내전으로 인해 종파·종단 간 불신과 갈등이 뿌리 깊은 두 지역에서는 결코 보기 쉬운 풍경이 아니었다. 두 나라의 시위대 모두 실업, 불평등, 그리고 부패한 지배자들에 분노했다. 수도 중심의 광장을 점거한 시위대는 수니파, 시아파, 기독교를 구분하지 않고 음식을 만들어 나누고 부상자를 치료했다. 시위대는 지배자들이 강요하는 종파에 따른 줄 세우기를 거부하고 종파·종단 간 차이를 뛰어넘는 계급적 단결을 보여 줬다.

동시에 이 두 지역을 통해 기후변화가 신자유주의와 만나 민중의 삶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으며, 투쟁의 배경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9년 레바논에서 건조한 기후로 인해 역대 최악의 산불이 발생해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하지만 정부는 단 3대뿐이던 산불 진화 비행기를 이미 팔아 치운 상황이었다. 결국 시위 진압용 물대포까지 동원해 산불을 진화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레바논인들은 분노했고 산불 발생 불과 며칠 뒤 대규모 시위가 시작됐다.

이라크의 경우 여름 최고 온도가 매년 최고치를 갱신 중이다. 2020년 여름은 역대 최고인 51.8도를 기록했다. 하지만 매일 전기가 들어오는 시간은 2~3시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부유층들은 집에 자가발전기를 설치하거나 비싼 민영 전기를 구매한다. 2019년 거리로 뛰쳐나온 이라크 시위대는 “집에서 더워서 죽으나 거리 시위에서 총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레바논과 이라크 모두 시위로 인해 총리가 퇴진했다. 하지만 2019년 시위에 참가했던 이들은 요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레바논인의 절반이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이라크 청년 3분의 1이 실업자다. 지난해 10월 이라크에서는 점거시위 1주년을 기념해 대규모 거리 행진이 전국적으로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끊임없이 낳는 경제 위기, 기후 위기 그리고 팬데믹은 저항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과 한국

그렇다면 아랍 민중의 저항은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2011년 ‘아랍의 봄’이 그랬듯이 아래로부터의 반란은 지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집트 혁명은 무바라크와 같은 오랜 친미 독재자를 몰아냈고, 이스라엘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시리아의 혁명가들은 러시아군 폭격 속에서 아사드와 맞섰으며 이라크 시위대는 이란의 내정 간섭 중단을 요구했다.

미국의 대외 정책이 중국 견제로 중심을 옮겨갔지만, 중동에서 완전히 발을 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는 군사 개입은 최소화하더라도 중동의 패권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아랍 지배자들과 이스라엘을 화해시켜 이란과 러시아,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했다. 최근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수단, 모로코 등이 이스라엘과 국교를 정상화한 배경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막후 작업이 있었다.

미국의 이런 방향은 새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이미 바이든은 트럼프가 예루살렘으로 옮긴 미국 대사관을 다시 이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바이든은 오바마 시대의 대외 정책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지만, 오바마야말로 이라크, 시리아를 공습하며 민간인을 살해한 장본인이다. 미국은 중동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개입할 것이고 지역의 부패하고 억압적인 지배자들을 지원할 것이다.

한국 지배계급 또한 미국의 하위 파트너로서 중동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얼마 전 호르무즈 해협에서 한국 유조선이 이란 혁명수비대에 나포된 사건은 한국 정부가 미국의 대이란 제재에 동참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한국 지배계급은 나름의 이해관계를 위해 중동 지배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바란다. 한국의 에너지, 건설, 방산 기업들이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지에 진출해 있는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한국에서의 반제국주의 투쟁은 그렇기 때문에 아랍 민중의 저항과 연결돼 있다. 한국 군대의 호르무즈 파병에 반대하는 것, 그리고 이란을 전쟁으로 위협하고 한반도를 위험으로 몰아넣는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국주의 경쟁 속에서 희생당하는 쪽은 한국으로 피난 온 예멘, 시리아 난민들과 같은 민중이기 때문이다.

2011년의 ‘아랍의 봄’과 2019년의 반란들을 촉발시킨 이 지역의 물질적 조건은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계속 대규모 저항을 불러올 것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경제 위기, 기후변화, 제국주의 경쟁, 팬데믹을 낳기 때문이다. 혁명이 부침을 겪는 곳에서도 아래로부터의 저항은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혁명의 무풍지대였던 새로운 지역들이 저항의 대열에 가담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 대규모 저항으로부터 배우고 영감을 얻고 연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