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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의 탄소국경세 추진:
노동자와 빈국에 책임 떠넘기는 보호무역 정책

유럽연합이 탄소국경세를 추진하고 있다. 유럽연합 밖에서 생산된 상품을 수입할 때 생산지의 온실가스(탄소) 부과 비용이 유럽연합보다 낮으면 그 차액만큼을 탄소국경세로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2023년부터 철강, 시멘트, 비료, 전력, 알루미늄 등을 대상으로 시범 시행하고 (이 기간에는 조사만 하고 비용을 부담시키지는 않는다) 2026년부터 본격 시행하겠다고 한다.

유럽연합 지도자들은 이것이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탄소국경세를 통해 탄소 배출 축소가 얼마나 이뤄질지는 불분명한 반면, 이 정책이 유럽 기업들의 이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유럽의 철강, 화학업계 등은 대표적 보호무역 조처인 세이프가드(수입 제한 조치)와 함께 탄소국경세 도입을 요구해 왔다. 중국, 러시아 등의 값싼 철강 때문에 유럽의 기업들이 어려워지고 있다면서 말이다.

적극적으로 유전 개발 중인 노르웨이 석유 회사 다른 나라에 책임 떠넘길 게 아니라 이런 기업에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출처 Equinor

표리부동하게도 유럽연합은 유럽에서 탄소배출권거래제를 시행할 때 기업들에게 무상으로 배출권을 제공하는 제도는 (그 규모를 축소하겠다고는 했지만) 2035년까지 유지할 계획이다. 기후 위기 대처를 말하면서도 자국의 기업들에게는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제도가 주로 중국, 러시아 등 신흥개발국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세계에서 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 중 하나인 미국의 바이든도 유럽의 시도를 반대하지 않고 있다.

위선

그러나 산업화 이후 오랫동안 많은 탄소를 배출해 기후 위기에 큰 책임이 있는 유럽연합이 다른 나라들에 기후 위기의 책임을 묻는 것은 위선적이다. 온실가스의 역사적 누적치를 따지면 미국은 25퍼센트, 유럽연합은 22퍼센트, 중국 13퍼센트이다.(‘선진국 주도의 ‘녹색 전쟁’ ... 개도국은 넘지 못할 ‘신무역장벽’인가?’, 〈한겨레〉)

2015년 체결된 파리기후협정에서는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의 기후 변화 대처를 돕기 위해 매년 1000억 달러(약 117조 원) 이상을 지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선진국들은 지금까지 이것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은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량 제로를 달성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순배출량 제로는 아직 검증되지 않는 탄소 흡수 기술들과 나무 심기 같은 정책들로, 탄소 배출량과 흡수량을 같게 만들겠다는 아주 미심쩍은 개념이다.

그런데 유럽연합은 이런 정책을 추진하면서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도 줬다.

바이오 연료(곡물이나 그 잔여물로 에너지를 만드는 것) 확대가 대표적이다. 유럽연합은 신재생에너지의 하나로 바이오 연료를 강조했고, 유럽의 에너지 생산에서 그 비율은 증가해 왔다.

그러나 바이오 연료가 친환경적이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바이오 연료 생산을 위해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에서 산림을 파괴하고 플랜테이션 농장을 만들어 농민들을 토지에서 몰아내는 일들이 벌어졌다.

게다가 막대한 곡물이 바이오 연료에 사용되면서 곡물 가격이 상승해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순배출량 제로를 위해 유럽의 기업들은 세계 곳곳에서 나무 심기 사업을 벌이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 땅에서 살던 지역 주민들이 쫓겨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의 석탄 발전소는 온실가스 배출을 상쇄하기 위해 우간다에 2만 헥타르의 토지 구입 비용을 지불했는데, 막상 나무가 심어진 면적은 600헥타르에 불과했고, 거기에 살던 농부와 목축업자 수백 명이 땅에서 쫓겨났다.(권상철, ‘자연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비판적 검토’)

유럽연합의 지배자들이 친환경 포장을 하며 자신들의 산업 경쟁력 강화 정책을 뒷받침하는 것은 그린워싱의 일종일 뿐이다.

불평등

게다가 이런 정책은 유럽연합 내의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탄소국경세는 탄소세를 확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탄소세는 도입한 나라 대부분에서 탄소 배출량 1톤당 얼마 하는 식으로 부과되는데, 흔히 석유·석탄 등 화석연료에 부과된다.

그런데 각국 정부는 산업 경쟁력을 보호한다면서 기업들에게는 탄소세를 감면해 준 반면, 평범한 사람들이 주로 쓰는 가정용, 건물용, 수송용 연료에는 높은 탄소세를 부과했다.(예를 들어 스웨덴의 탄소세율은 산업부문 23달러, 일반 104.8달러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큰 부담을 져야 하는 방식으로 시행돼 온 것이다.

2018년 프랑스에서는 탄소세 인상에 맞서는 노란조끼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2014년에 탄소세가 도입됐는데, 2017년 기준으로 이산화탄소를 1톤 배출할 때마다 30.5유로(3만 9150원)씩 부과하던 세금을 2030년까지 계속 올려 1톤당 100유로로 인상할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가 휘발유와 경유에 부과하는 세금을 인상하자 프랑스의 노동자와 평범한 사람들이 반발한 것이었다.

당시 노란조끼 시위대는 부자에게 막대한 감세를 하면서 노동자와 서민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정부에 분노를 터뜨렸다. 그들은 “서민 세금 올린다고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없다” 하며 싸웠고, 결국 유류에 부과하는 탄소세 인상 조처를 철회시켰다.

갈수록 더워지는 여름에 에어컨이 없어서, 또는 겨울에 이상 추위로 인해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유가와 전기료 인상 등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가난할수록 기후 위기로 인한 고통도 큰데, 그 비용도 더 많이 부담하라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진정으로 기후 위기에 대처하려면 탄소국경세 같은 방식이 아니라 화석연료 사용 기업들에 대한 직접적 규제 조처를 강화해야 한다. 석탄화력발전소를 폐쇄하고, 화석연료 사용 설비를 전환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 비용은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화석연료 산업에서 막대한 이윤을 거둔 기업과 부자들이 내야 한다.

이윤 경쟁을 위해 굴러가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부가 이런 대안을 알아서 추진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이윤 논리에 도전하는 아래로부터 대중 투쟁의 전진에 기후 위기를 멈출 진정한 동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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