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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에 참가한 사회주의자에게서 듣는 1987년 6월 항쟁:
“6월 항쟁은 우리의 역사로 삼아야 할 위대한 계급의 기억”

올해는 6월 항쟁 20주년이다. 당시 항쟁에 참가한 최일붕 동지('다함께'국제연락 간사)에게서 항쟁의 생생한 전개 과정과 제기되는 논점들을 들어 본다. 당시 최일붕 동지는 트로츠키주의자로서 정치 활동을 했다. 그는 군포의 한 민중교회 노동야학 활동을 하면서 분신 택시 노동자 박종만 열사 추모사업회 활동을 지지했고 사회주의 써클 활동도 하고 있었다.

6월 항쟁의 사회적·경제적 배경은 무엇입니까?

원인과 배경으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첫째 원인은 두루 알다시피 정치적 억압이 너무도 혹심하고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광주학살로 집권한 정권이라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고 있었어요. 정치적 억압의 극치가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 씨 고문 살인 은폐·조작, 6·10 항쟁 전날 이한열 씨가 최루탄에 맞아 사경에 빠진 일들이죠. 그밖에도 많은 의문사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당시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었어요. 1987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 설문조사에 따르면, 9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사회가 불평등하고 소득격차가 심하다고 답변했어요. 셋째, 부패와 비리가 극심했어요. 이철희·장영자 사기 어음 사건, 명성 사건 등 엄청난 권력형 비리와 부패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6월 항쟁은 첫째, '3저 호황'이라는 굉장한 경제 호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감이 많았습니다. 둘째,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 전환, 국가통제 자본주의에서 요즘말로 신자유주의로 전환이 세계적 규모에서 일어나고 있었죠. 1960년대 말 서구의 68항쟁도 그런 배경이 있었고, 한국보다 몇 년 늦은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동유럽의 변화도 그런 배경 아래 벌어졌습니다. 말하자면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경제를 다국적화해야 한다는 필요, 그걸 통해 경제 전반을 고도기술 경제로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필요 때문에 지배계급 안에서 개혁 필요성을 느끼고 강조하는 분파들이 있었던 거죠. 일부 민간 자본가들, 대체로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일부 중소자본들이 그랬죠. 6월 항쟁은 전반적 경제 구조조정과 지배계급 내의 분파 투쟁 격화와도 관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1986년 '5·3 인천 사태'를 빌미로 전두환 정권은 탄압을 강화했는데, 이 탄압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고, 이 투쟁 평가를 둘러싼 좌파 내 논쟁은 어땠습니까?

1983년 말 유화조치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정권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져서 그런 거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권력 기반이 어느 정도 안정됐기 때문이라는 거죠. 저는 그런 측면보다는 다른 사실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항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거든요. 이게 상당히 두드러졌어요. 그래서 달래는 측면이 강했다고 봐요.

어쨌든 1985년 들어 정권이 탄압으로 돌아섭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학원안정법 제정 시도를 유화국면이 끝나는 시점으로 봐야 합니다. 이런 데는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반란이 시작됐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1985년 초에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고, 6월 초여름에 대우어패럴 등 구로연대 파업이 있었습니다. 그밖에도 작지만 많은 노동쟁의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정권으로서는 상당히 당혹스러웠던 거죠. 둘째 1985년 2·12 총선에서 정권이 야당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전투성이 고무되던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더는 안 되겠다'싶었던 거죠. 정권은 야당을 총선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대화를 시도해 체제 내로 포섭하려 했는데 여의치 않았어요. 정권의 얄팍한 떡고물로는 야당이 넘어가지 않았던 거죠.

그런 상황에서 '5·3 인천 사태'가 있었던 것입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문익환 목사가 미국에 대해 유화적인 발언을 해 오해를 자아낸 일이 있었어요. 그 때문에 좌파 내부에서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민통련이 상당히 전투적으로 5·3 투쟁에 임했어요. 화염병도 직접 만들고 시위를 주도해서 주안역 5거리에서 전투를 벌였거든요. 그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판한 것이 주체사상파였어요. 이들은 1985년 여름부터 부활하기 시작해서 세력을 넓혀 오다가 '5·3 인천 사태'평가를 내놨습니다. 이 투쟁에서 불필요한 급진주의를 채택했다고 비판을 하면서 강령적·전략적 입장을 내놨거든요. 대충 '반국적 관점에 서지 말고 한반도 전체를 보는 전국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예비군 훈련·산별 노조 문제 등 강령적 입장에 전략적 입장까지 내놓으면서 '5·3 인천 사태'를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활동가들에게 먹혀 들었어요. 왜냐하면 추상적 원칙을 내놓는 것을 넘어서 강령적이고 전략적인 입장을 내놓으니까 사람들이 흡족하게 느낀 것이죠. 그래서 순식간에 수많은 활동가들이 주사파로 바뀌는 상황이 벌어졌죠.

1986년 탄압 강화로 건대 사태가 벌어지고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 고문 살해 사건 등이 벌어졌는데, 당시 좌파들은 사태를 어떻게 봤습니까?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 이인영은 학생운동이 다시 침체에 빠졌다고 보기도 했다는데요?

그런 단견에 기초한 일면적 평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특히 충격적 탄압 사건을 접할 때는 더 그렇죠. 건대 사태도 그래요. 처음에는 단순히 집회를 봉쇄하고 해산시킬 줄 알았는데, 경찰이 학생들을 토끼몰이 하듯이 건물로 몰아넣고 물·전기 끊고 식량 반입도 끊었죠. 또 북한의 금강산댐에서 방류하면 남한 전체가 물에 잠긴다는 방송이 나온 게 건대 점거 중이었거든요. 그러고는 1천 몇 백 명의 학생들을 구속시킨 엄청난 사건이었는데,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런 평가가 나온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때 그 평가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대중에게 다가간다는 입장을 더 분명히 정리했죠. 그게 당시 상황에서는 주효했던 전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대중운동이 고양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약간 귀에 거슬리는 듯한 급진성을 완화하고, 선진적 대중에게 다가가는 언어를 사용하고, 불필요한 폭력도 삼가는 전술 방침이 유효했던 거죠. 그런데 6월 항쟁 때는 그것이 또 나쁘게 작용하기도 했어요. 경찰이 최루탄으로 마구 공격을 해대자 선진적 대중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돌을 들고 싸우려 했는데, 그런 것까지 '비폭력! 비폭력!'하면서, 마치 비폭력이 원칙이나 되는 양 사람들을 말리는 부정적 상황으로 나타난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6월 항쟁까지 가는 기간 동안에는 그것이 약이 됐죠.

1986년에는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가 민중항쟁으로 물러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당시 활동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또, 이것이 미국의 지배 전략에 미친 효과는 무엇입니까?

1986년 2월 필리핀 '피플 파워'혁명은 단지 좌파만이 아니라 민중 전체에게 말할 나위 없이 고무적인 충격을 주었어요. 사람들은 '여기도 끝장이다', '전두환은 마르코스보다 더 불행한 운명을 맞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인 줄 알아야 한다'며 사기가 하늘을 찔렀죠. 반대로 전두환은 공포에 떨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탄압을 강화하려고 했죠.

미국 레이건 정부의 입장은 필리핀에서 좌충우돌했어요. 최후 순간까지도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번복하려 했고, 레이건은 기자들 질문에 막 신경질내고 그랬거든요. 필리핀 사태 이후 미국 정부는 기회주의적인 입장으로 변했어요. 그 전까지는 노골적이고 일방적인 독재 정권 지지 입장이었는데, 필리핀을 겪고 나서는 친미의 범위 안에서라면 될 성싶은 자들을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약간 바뀐 것이죠. 이 게 효과를 보게 된 것은 이후 1987년 6월 한국 상황에서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군대를 투입하려 하자 미국은 '군대를 투입하면 내전 상황으로 간다', '제2의 필리핀 꼴 난다'해서 그걸 막게 됩니다.

6월 10일 이후 항쟁의 규모가 급속하게 커졌는데 당시 분위기를 전해 주시죠.

1985년 하반기는 '유화국면'이 끝나가던 상황이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위축되지 않았어요. 상당한 자신감과 전투성을 느낄 수 있었어요. 1987년 박종철 사건이 났을 때도 사람들은 격분과 동시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2월 초 서울대에서는 정부가 탄압했는데도 고문 치사 은폐·조작에 항의하는 추모제가 있었습니다. 저도 추모제에 참가해 함께 행진했는데,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위축되지 않았어요.

6월 10일 상황에서는 '이번에는 정권을 타도할 수 있다', '제2의 4월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이 있었죠. 적어도 선진 부문에서는 이 점이 분명했다고 할 수 있어요. 당시 학생 투사들도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등 유연한 전술을 구사했는데, 그게 전반적으로 보면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엄청난 국민적 지지가 있었습니다. 전경들이 비무장 학생들을 두들겨 패면 거리의 시민들이 전경한테 달려들어 삿대질하면서 야단을 치기도 하는 등 사람들의 지지가 많았습니다. 잡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요.

6월 항쟁이 학생과 이른바 중산층의 투쟁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또, 이들이 7월에 시작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에는 등을 돌렸다는 평가가 있는데 이런 평가에 어떤 정치적 맥락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항쟁에서 노동자들이 한 구실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중산층은 사무직 노동자들이나 상인들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소위 중산층이 6월 항쟁에 가세한 것은 6월 항쟁 초기가 아니었습니다. 중산층이 주도 세력은 아니었죠. 사무직 노동자들과 영세 상인들은 나중에 합세했는데, 그것은 오히려 대중운동이 엄청 강력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항쟁 초기부터 날품팔이·비정규직·미조직 노동자 등 평범한 노동자들이 거리 시위에 많이 참가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조직이라는 게 가능하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점은 지방 도시에서 더 분명했어요. 성남·안양에서 그랬죠. 부산에서도 처음부터 사상공단·사하공단 노동자들이 대거 참가했죠. 당시 저는 군포에서 활동하고 있어 안양으로 집결하곤 했는데, 안양에는 전문대가 하나 있는 정도라 [소수 학생을 뺀] 나머지는 전부 다 안양이나 군포의 노동계급이었어요. 따라서 '중산층 중심'이라는 말은 많이 과장돼 있습니다. 중산층이라는 개념이 모호하기도 하고요.

학생과 중산층이 7월∼9월 노동자 파업을 외면했다고 하는데, 먼저 학생들은 준비가 안 돼서 그랬어요. 학생들은 당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이나 '민족민주 혁명'등 모종의 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했지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스탈린주의의 유산 때문에 1980년대 새로운 좌파 사상을 재발견해서 흡수했던 청년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노동자들이 그토록 대규모로 일어서리라는 것을 예상도 못했고 당황했다고 말할 수 있죠.

상인들이 노동자 투쟁을 외면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계급 성격으로 봤을 때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노동운동이 조직적으로 강력해져야만 노동자 쪽에 호의적이게 될 테니까요. 사무직 노동자들은 민주주의 기본권 문제에서는 상당히 선진적이었지만 계급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8월 말 9월 초 들어서는 그들 자신이 파업을 하고 노조를 만들었거든요. 따라서 '중산층의 외면'이란 말도 과장돼 있다고 할 수 있죠.

6월 항쟁은 사회적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국민적 투쟁이었어요. 단지 학생, 소위 중산층,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정말 다계급적인, 그야말로 독재정권의 학정에 반대하는 사람들,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들은 다 지지했을 정도였죠. 거기에 노동계급 사람들이 대거 참가한 것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군대 투입을 고려했지만 미국이 군 투입을 막았는데 그때 주된 요인 중 하나가 노동자들의 참여였죠. 노동자들은 거리의 투쟁에서 축제 분위기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탄압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죠. 당시 막강한 국가권력 앞에 사용자들도 절절매던 시대였는데, 그 국가권력이 후퇴하니까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얻어 사용자들에 맞서 싸울 수 있던 거죠.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정치 투쟁과 경제투쟁의 상승적 상호작용이 그때 일어난 것입니다.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은 어떤 세력이 주도했고 그들의 정치는 무엇이었습니까? 또, 오늘날 한미FTA저지 범국본과 비교해 본다면요?

당시 국본은 명백히 김영삼과 김대중이 포함돼 있었어요. 그리고 민통련이 있었죠. 말하자면 주축 세력이 자유주의적 야당과 좌파 세력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계급적 성격에서도 모종의 인민전선, 즉 국민연합적 성격이 분명했죠. 그런데 당시에는 그런 방식으로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술적으로도 그것을 거부한 채 싸운다는 것은 효과가 없을 뿐더러 심지어 고립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국본에 참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삐걱거리는 측면이 있었어요. 6월 항쟁이 대략 6월 18일에서 26일까지가 고비였는데 18∼19일에는 특히 군대가 투입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때 국본 내에서 [자유주의 야당과] 아주 심각한 언쟁이 있었어요. 또, 7월∼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넘어갔을 때 국본 내 자본가 계급에 기반을 둔 세력이 이 투쟁에 부정적이었죠. 8월 중순 경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매우 부정적이었죠.

오늘날 한미FTA 저지 범국본과 비교하면, 범국본에는 두드러진 자본가 세력이 참가했다고 보이지는 않아요. 좌파 세력이 더 주도적이고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 점은 제국주의 문제에도 반영됩니다. 당시 야당은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이 없거나 문제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게 강했죠. 당시 국본 내에서는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자유주의 야당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국본 내 좌파도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않았어요. 그에 비해 오늘날의 범국본은 제국주의 문제도 당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명하게 의식을 하고 있죠.

당시 자유주의 야당이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대중에게 분노의 초점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종종 투쟁을 억제하려는 시도도 했던 것 같은데 야당이 민주화 투쟁에서 했던 구실은 무엇이었습니까? 좌파는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했을까요?

후자부터 답변을 하자면, 당시 좌파는 NL과 CA가 있었습니다. 당시 CA는 자유주의 야당 세력을 '주적'이라고 규정하지는 않고,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야당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데 많이 할애했어요. '정치적 독자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전술적 제휴라는 점은 완전히 실종돼 있었어요. 전술적 유연성이 없었죠.

나중에 전두환 회고록 같은 게 공개됐는데, 전두환이 '자민투(NL)가 유연한 것 같지만 그들이 당면한 적이다. 민민투(CA)는 야당 밀어주는 것을 반대하고 자신들이 직접 [권력을] 잡겠다고 하지만, 그들은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정권 입장에서는 당면한 적이 자유주의 야당과 동맹하고 있는 주류 좌파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력은 암묵적으로 전술적 제휴를 거의 원칙 수준으로 격상시켰어요. 인민전선론이었던 거죠. 따라서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야당이 어떤 역할을 했느냐는 물음으로 넘어갑니다. 6월 항쟁 직전까지는 야당이 대중운동을 억압하거나 해체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대중운동이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반정부 분위기는 강력했지만 그것이 6월 돼서야 대중운동이 됐으니까요. [항쟁이 시작되자] 야당은 운동을 은근슬쩍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맞추려 했는데, 그게 직선제였어요. 사실 운동의 구호 자체는 분명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민주 쟁취'이런 거였거든요. [운동 차원에서는] 직선제 요구가 기조로나 요구로나 명확하게 정식화된 바가 없어요. 그런데 은근슬쩍 좌파 세력은 자신들이 직선제를 지지하고 있다고 착각한 거죠. 물론 일부는 명확하게 그것을 구호로 외치기도 했어요. '직선제로 독재 타도'구호를 외치는 식으로요. 그런데 그것은 국본 안에서 정식화된 적은 없거든요. 그러니까 암암리에 야당이 원하는 대로 맞춰진 거죠. 자유주의 야당이 운동을 일정 수준에서 통제하려는 모습이 분명해진 때가 6월 18일∼19일 군대 투입 얘기가 흉흉하게 나돌 때입니다. 그때는 책상을 치면서 언쟁하던 그런 상황인데, 당시 미국이 절대 군대를 풀어서는 안 된다고 개입했습니다. 군 투입이 오히려 더 큰 사태로 발전할까 봐 두려웠던 거죠. [그래서] 야당은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자유주의 야당이 아래로부터 운동을 정말로 두려워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통제하려 했던 때는 노동자 대투쟁이 고양된 8월 중순이었습니다. 이 때는 정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고 반노동자 언사를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자유주의 야당의 비위를 맞추던 언론들도 다 돌아서던 상황이었죠. 또 하나의 사례로, 8월 어느 날 고려대에서 열린 집회 때였습니다. 김대중의 연설 시간이 있었어요. 그는 연단에 올라가더니 군중 쪽에서 휘날리던 삼각형 빨간 깃발, 민중민주라고 적힌 깃발을 보자마자 대뜸 '그 깃발 내리세요'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나이 40∼50대의 깡패처럼 보이는 우락부락한 야당 지지자들이 청년들을 위협했습니다. 위축된 젊은 청년들은 깃발을 내려야만 했어요. 이런 자유주의 야당의 계급적 본질은 오히려 6월 항쟁 이후 계급투쟁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죠.

노태우의 6·29 선언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당시 국본이나 좌파는 이 선언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했을까요?

대체로 좌파는 노태우의 6·29 선언이 굴복인 동시에 기만이라고 봤어요. 즉,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국본의 공식 성명은 환영에 무게가 실려 있었고 CA 같은 초좌파적 입장에서는 기만이라는 측면, 운동이 체제에 포섭되기 시작했다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죠. 제가 볼 때 둘 다 잘못된 입장이죠. 밀려서 후퇴한 것이자 동시에 시간 벌기라는 두 측면을 다 봤어야 맞는 것입니다.

6·29 선언 이후 김대중과 김영삼은 따로 대선에 출마했고 결과적으로 노태우가 당선했습니다. 당시 좌파들의 대선 전술은 어땠습니까?

두 김 씨가 각각 대선에 출마한다는 것은 너무 뻔한 예측이었어요. 군사 정권 측에서 6·29 선언으로 양보했을 때 이 점도 계산에 있었거든요.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다른 지역 자본가들에 기반을 둔 정치 세력이었다는 점이 이들의 독자 출마를 예상할 수 있는 근거였죠. 운동 쪽에서는 이들에게 단일화하라고 압력을 넣을 필요는 있었습니다. 다만 그럴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자본가 세력들이 단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봐요.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하게 되니까요.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두 김 씨가 단결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폭로하고, 설사 '이번 대선에서 정권 교체가 안 돼도 너무 절망할 필요 없다. 운동은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갈등은 더 첨예해질 것'이라는 점을 내다보고 사람들에게 준비시키는 게 필요했죠. 대선에서 자유주의 세력으로 군부를 패퇴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조급한 생각이자 선거주의로 빠질 위험성이 있었어요.

그리고 두 김 씨가 대선에 따로 나가는 게 확정됐을 때, 운동의 대부분과 노동계급의 더 큰 부분이 김대중을 지지하니만큼 사회주의자들은 김대중에 비판적 투표를 하는 것 외에 대안은 없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비판적 지지'라는 말과 달리 갈수록 '무비판적 지지'였다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1986년 들어 학생운동에서 이른바 주체사상이 급속하게 영향력을 넓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점에서 1960년 4월 혁명이나 1970년대 민주화 투쟁에 참가한 학생들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급진화한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요? 또, 당시 좌파의 사회변혁 전략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시는 냉전 체제였잖아요? 물론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는 등 옛 소련에서는 변화가 시작됐지만, 아직 그것을 눈치채기에는 냉전이 가하는 무게가 강했습니다. 냉전 상황에서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사고가 횡행하기 쉬웠고, 한국 좌파에게는 북한과 소련이 진정한 친구처럼 비치기가 십상이었죠. 따라서 [1986년에 주체사상과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확산된 것은]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주체사상이나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좌파들에게 대거 수용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급진화가 진행될수록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봐요. 운동의 급진화, 정치적 급진화가 냉전 상황과 맞물린 것이죠.

당시 NL과 CA는 한국이 결코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위한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입장이었어요.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 때문에 그렇다', '종속 문제 때문에 그렇다'는 입장이었으니 [전략이] 모종의 민주주의 혁명이었죠. 그런데 그것이 6월 항쟁 자체에 미친 [악]영향은 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6월 항쟁이 날마다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날마다 전쟁 상태였는데, 갑자기 6월 30일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거리가 깨끗해졌습니다. 그 후 7월 9일은 이한열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1백만 명이라는 말도 있는데 적어도 50만 명에서 1백만 명 사이 모였다고 봐요. 하여튼 엄청난 인파가 시청에 모였죠. 당시 시위 지도부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이 모일 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청와대로 진격합시다'해서 수십만 명이 코리아나호텔쯤 갔지만, 경찰이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하자마자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졌어요. [이 모습은] 청년 학생 좌파들이 준비돼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했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진일보를 내딛었다는 낙관과 기대가 광범한 대중의 더 주된 정서였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 좌파들이] 7월 이후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게 문제이지 6월 항쟁의 도상에서 큰 문제는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술·전략 문제에서 NL이라는 주류 좌파가 자유주의 정치 세력에게 너무 경계심을 풀고 독립성을 세우지 않았던 문제점은 있었을지언정 혁명적 이론의 문제 때문에 재앙적 결과가 빚어지는 문제는 없었다고 볼 수 있죠.

그 점에서 이한열 장례식 투쟁이 전술적 목표가 불분명한 투쟁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 투쟁을 계기로 6월 항쟁은 끝물로 갔다는 평가도 있고요.

목표가 불분명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했어요. 당시 저는 트로츠키주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투쟁은 민주주의 요구에서 머물지 않고 노동계급 투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점을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에서 '6월 항쟁에서 승리했으니까 이제 노동계급 차례다'이렇게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죠. 7월 9일 몇 일 뒤쯤에야 노동자 투쟁이 범상치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말할 나위 없었죠. 트로츠키나 룩셈부르크는 금기시하고 스탈린주의만이 알려져 있던 우리 나라 좌파 이데올로기 속에서는 그냥 민주주의 투쟁만 있었거든요. 그래서 6·29 선언에 직면했을 때 승리의 도취감이 지배적이었던 것이고, 이후 무엇을 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던 거죠. 승리의 도취감 때문에 [장례식 투쟁에] 대중도 광범하게 나왔는데, 이것은 6월 항쟁보다 큰 규모였거든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왔지만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청와대로 가자는 것도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6·29 선언으로 뭔가 달라진다는데 좀 봐야지'하는 관망의 분위기였죠. 오늘날의 눈으로 과거를 투사하는 식은 그리 정확한 인식이 아닙니다.

87년 항쟁 이후 '개혁 정부'들이 등장했습니다. 어쨌든 민주화 세력이 집권했지만 개혁은 실패했고, 게다가 신자유주의 공세가 본격화됐습니다. 이 때문에 더는 '87년 체제'가 의미 없다는 주장이 많아졌습니다.

'87년 체제'가 의미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상부구조만 본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나 1987년 항쟁은 1945년 이래 남한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항쟁을 계기로 권위주의 정치 체제가 '자유민주주의'정치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계급의 조직, 노조 같은 일상 조직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정치 조직도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게 본격화된 것은 10년 후의 일이지만 어쨌든 그 단초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적 자유권이 신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밖의 많은 변화들 예를 들어 자유주의 자본가들이 점점 보수화하기 시작한 점, 문화적 개방도 시작한 점 등 모든 변화들이 1987년을 전환점으로 합니다. 따라서 '87년 체제'의 종말을 일면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래로부터 관점에 서 있지 않은 걸로 보여요.

'87년 체제'의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은 중 상당수는 1997년 IMF 위기를 기점으로 국가에서 시장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 이는 일면적입니다. 왜냐하면 전두환 정권도 상당히 시장주의적이었거든요. 일관된 신자유주의가 아닌 국가통제가 강하게 결합된 시장주의였지만, 집권하자마자 전두환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은행들을 통폐합하고 민영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농산물 수입 개방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1997년을 기점으로 그 이후에야 신자유주의로 전환됐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민주화 항쟁 이후 국가와 자본간의 관계가 변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역설적으로 민주화 항쟁이 시장 권력을 강화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죠. 앞서 말했듯이 당시에는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고도기술 자본주의로의 구조조정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국가와 자본의 관계가 변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점은 이미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부터 꾸준히 나타났던 바입니다. 그 때문에 국가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하는 자본들의 입장을 대변한 자유주의 야당이 6월 항쟁에 포함돼 있던 거 아닙니까? 따라서 한 측면인 거죠. 또, 6월 항쟁 한번으로 단숨에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핵심은 노동자 대중조직의 성장을 사회적 내용으로 하는 것이거든요. 즉,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이 성장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 편승해서 자본도 권력을 더 확장하려 했거든요. 그래서 단지 국가와 자본 사이의 관계만을 놓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에 앞서서 자본·국가와 노동 사이의 계급 세력 관계를 먼저 봐야 합니다. 그 속에서 자본이 계급간 세력 관계 변화를 이용해서 어느 정도 자신의 자율성을 확대해 가는 과정으로 봐야 하는데, 이것도 너무 일면적으로 강조해서는 안 되죠.

6월 항쟁 직전까지 학원에 경찰이 상주하는 등 국가의 정치적 억압이 심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국가의 정치적 억압은 덜해졌다지만 신자유주의가 대학에 본격화하면서 학사 행정은 전보다 억압적인 것 같습니다. 20년 전의 대학과 오늘날의 대학을 비교해 본다면요?

우선 대학에서 경찰이 철수한 것은 정확히 1984년 초에요. 1983년 말 유화 조치의 일환으로 적어도 가시적으로는 경찰이 철수했죠. 물론 경찰의 밀정들이야 계속 활동했지만요. 6월 항쟁 당시의 대학이 오늘의 대학보다 조금 덜 억압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인데, 이는 당시 학생들의 투쟁이 강력했다는 사실의 반영이에요. 학생들이 무지 전투적으로 싸웠어요. 광주항쟁 이후에도 소규모일지라도 학생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거든요. 몇 분 동안 잠깐 구호 외치다 체포될지라도 투쟁을 했고, 도서관에서 밧줄로 몸을 동여매서 구호 외치다 떨어져 죽은 사람들도 있었죠. 그런 저항과 저항적 분위기가 광범했었다는 게 먼저 지적할 측면이죠. 그런 저항이 확대되고, 국민적 지지 여론이 광범하다 보니 대학 당국도 학생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어요. 객관적 요인으로는 경제가 호황이라는 조건이 있었다는 점, 자본가들 일부도 어느 정도 강압적 정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했다는 점 등이 있죠. 또, 당시 졸업정원제로 입학 정원을 대폭 늘렸는데, 이는 학생을 많이 받아들인 뒤에 쪼아서 공부를 많이 시키려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를 학생들이 또 강하게 반대하니 사실, 입학[만] 쉬워진 측면이 있었죠. 이런 것도 부차적이지만 한 요인이 될 수 있겠죠.

7월∼9월 노동자 투쟁이 독자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연결되지 못하고 그 과제가 지연된 것이 한국 사회 진보의 비극이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어느 역사를 봐도 노동 대중의 의식이 순식간에 노동조합 의식에서 사회주의 의식으로 도약한 사실이 없어요. 심지어 러시아 혁명에서도 경제 공황의 재앙, 제국주의 전쟁, 절대주의 전제 정부에 맞서 싸운 강력하고 전투적인 러시아 노동계급조차도 그랬습니다. 2월 혁명을 일으킨 그들은 무려 8월 말 9월 초까지 소비에트와 정부 내의 온건 좌파 세력을 지지했거든요. 게다가 한국의 1987년 항쟁은 혁명적 상황에서 벌어진 게 아니었어요. 경제 호황기여서 노동자들이 전투적으로 싸우면 자본가들의 양보가 가능했던 시기였죠. 노동자들이 전투적으로 싸워 그 해 임금을 10퍼센트 이상 순식간에 인상시키고, 1988년과 1989년에도 계속해서 임금을 인상시켰습니다. 그래서 1989년 말 1990년 초에 이르면 한국 노동자들은 서구 노동자 생활 수준의 60∼70퍼센트까지 생활 수준을 높일 수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독자적 정당을 건설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죠. 게다가 부르주아 야당 인사들이 수십 년 동안 군사 정권에 의해 혹심하게 탄압을 받았다는 점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중에는 목숨까지 위협받으며 망명하기도 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환상이 컸거든요. 그런 점에서 당시 노동자들이 정치세력화를 조기에 이루지 못한 것을 지금 와서 애석해 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비현실적 관점입니다.

일부 학자는 1987년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독립노조를 건설했지만, 그 후 정부는 노동조합 간부층을 체제 내로 통합하는 데 성공해 오히려 체제를 안정시키고 강화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 변화를 1987년 직후로 보는 것은 너무 시점을 빨리 보는 것이자 추상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노조를 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어떤 시기의 노조냐 하는 것입니다. 1987에서 1990년 초 시기는 노동운동이 고양되는 시기였어요. 경제적으로도 호황기였죠. 노조 운동이 일시적이지만 퇴조하고, 경제 위기로 시험대에 오르기 시작하고, 소련이 무너져서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방향 감각 상실에 빠지고 하는 게 1991년 말부터거든요. 노조 관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92년∼94년부터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게 1997년 그들이 노동법 개악에 맞선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입니다. 노조가 형성되면서, 즉 노동자 대중조직이 건설되면서 자유민주주의로 전환이 이뤄지는데, 이 과정에서 노조 상층 간부들이 기성 체제로 통합되는 것만 보는 것은 일면적입니다. 노조는 양면성을 같이 봐야 하는 거죠. 노조는 체제에 포섭되는 측면도 있지만, 노동자들의 불만과 전투성을 어느 정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성도 있는 거죠. 그래야만 조합비도 걷을 수 있고 위원장으로서 위세도 떨칠 수 있죠. 일면적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어떤 증언을 들어보면 당시 3∼4천 명의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소위 위장취업을 해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했다고 합니다. 6월 항쟁에서 그들이 한 구실은 무엇이었습니까?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광범한 위장취업 전술을 채택했던 것은 사실인데, 6월 항쟁까지 대부분 효과를 보지 못했어요. 7∼9월 노동자 파업 때도 학생들의 경제 선동에 의해 벌어진 것은 극히 드물었죠. 어떤 통계에 따르면 8∼9백만 명이 파업에 연루됐다고 하고, 어쨌든 수백만 명이 파업을 했는데, 그 중에서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선동해서 한 것은 정말 극히 드물었을 겁니다. 당시 알려지지도 않았고요. 물론 1985년 대우차 파업 때 송경평 씨라는 서울대 출신 활동가가 선동한 게 주효했고 구로 연대파업에서도 그런 점이 있었죠. 공장 안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노동계급 지구에서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선동이 효과를 보기도 했죠. 바로 그 때문에 정권은 혹심하게 탄압했고 곳곳에서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색출당하고 있었어요. 권인숙 씨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죠. 학생 출신 활동가들은 탄압으로 솎아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굉장히 주변적인 마치꼬바 같은 데 들어가 활동도 못하고 단순 노동자로 있다가 항쟁을 맞았기 때문에 별로 역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1987년 대투쟁을 전개한 노동자들이 이제 보수화해 전처럼 투쟁에 나서지 않을 거라는 비관도 있습니다.

노동계급 투쟁에 대해 그런 전망을 하는 분들은 노동계급의 의식이 매우 단선적으로 발전하거나 또는 단선적으로 후퇴한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노동자들의 의식은 불균등하죠. 같은 부문의 노동계급, 심지어 한 사람의 노동자조차 부침을 겪는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거죠. 1987년에 투쟁했던 노동자들 중 간부가 된 사람들만 보는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노조 지도자 위치에 있게 되면 그 사람들의 전투성 문제와 연관되는 노동조합의 성격 문제가 상당히 작용하거든요. 사용자와 교섭을 해야 한다는 노조의 본질적 기능 때문에 투쟁을 이끌기도 해야 하지만 일정 수준에서는 통제해야 하는 역할도 하거든요. 또 당시 노동자들이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까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박, 특히 지난 1990년대 말 이래 경제 위기가 대중의 삶과 정신을 괴롭히기 때문에 1987년의 노동자가 지금의 노동자일 수 없거든요. 따라서 노동운동은 부침을 겪기 마련이고, 오늘의 전투적 노동자는 오늘의 시점에서 관계를 맺어야지 자꾸 과거를 기준으로 본다거나 거꾸로 현재의 조급한 눈이나 개량주의적 눈으로 20년을 투사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노무현 자신도 6월 항쟁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고 합니다. 그 점에서 우리가 20년 전의 항쟁에서 배워야 할 교훈과 과제는 무엇입니까?

앞서 말했듯이 6월 항쟁은 여러 계급들이 민주라든가 평등, 자유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도 단결할 수 있는 투쟁이었어요. 그런 투쟁은 승리한 뒤 분화를 겪기 마련이에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낡은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민주주의 문제도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죠. 그러나 새로운 과제, 즉 계급투쟁이 더 중요해지기 마련인데, 그것이 뜻하는 바는 6월 투쟁으로 뭉쳤던 세력들이 갈리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그 중 가장 온건한 세력이 먼저 배신하는 거고, 김영삼이 3당 야합을 한 게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죠. 노무현도 그런 맥락이죠. 그가 6월 항쟁의 일부분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진정한 주체인 양 말하는 것은 당치도 않아요. 자유주의 야당이 결코 주된 부분이 아니었거든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청년 학생들이었어요. 6월 항쟁은 거리 전투가 주된 형태였는데 거리 전투를 조직하고 주도한 것이 청년 학생들 아닙니까? 또, 참가자 수준에서 보면 노동자 대중이 가장 주된 세력이었죠. [게다가] 6월 항쟁의 이상, 민주주의로 집약됐던 급진적 이상들에 비춰 보자면 노무현은 배신자죠.

일부 노동자주의자들은 6월 항쟁보다는 7∼9월 노동자 투쟁만 보는데 이는 잘못 보는 겁니다. 마치 6월 항쟁만 얘기하고 노동자 투쟁은 얘기하지 않는 사람들과 정반대지만 거울 이미지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는 명백한 연속성이 있거든요. 노동계급 대중이 미조직 개인들로, 군중으로서 정치투쟁에 참가한 것이죠. 다시 말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 작용이라는 것이 고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묶어 주고 6월과 7∼9월을 이어주는 이상은 단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권만이 아닙니다. 아주 발본적인 의미의 민주주의, 억압받는 사람들의 자유·해방이라는 이상이 우리를 묶어 주었거든요. 이런 이상은 오늘날 피억압자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우리의 대의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진보·진출이라는 점이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6월 항쟁은 우리의 항쟁이고 연속된 7∼8월 항쟁과 묶어서 우리의 전통, 우리의 대의, 우리의 역사로 삼아야 할 위대한 기억, 계급의 기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