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5월 24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들려오는 참담한 소식을 날마다 언론으로 접하고 있습니다. 대만 등 동아시아에서도 전쟁 위험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반도도 연루될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적 해결책을 지지합니다. 흔히 정상회담이나 평화협정 체결 등을 그 해결 방안으로 여깁니다.

평화주의는 분쟁 해결에 전쟁과 폭력 사용을 반대하는 것으로, 대중의 소박한 평화 염원 정서에 기반한 사상입니다. 저는 여기서 비폭력 평화주의가 아니라 전쟁 반대 평화주의에 집중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보는 평화주의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지배자들의 위선적인 ‘평화주의’와 보통 사람들의 평화 염원 정서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서 출발하겠습니다.

지배자들은 “테러”나 “폭력 시위”를 비난하며 평화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국가라는 억압 기구를 통해 폭력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배자들도 되도록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장 강도가 되도록 ‘평화적으로’ 남의 지갑을 강탈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지배자들의 평화주의가 “제국주의의 가림막”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반면 일반 대중의 평화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한 불신을 혼란스럽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대중의 염원은 흔히 저항의 시작, 전쟁의 반동적 성격에 대한 분노와 자각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평화 염원을 종파적으로 무시하거나 그런 정서와 접맥할 필요성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2000년대 전반부에 노동자연대는 평화주의자들과 함께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공동 행동을 건설했습니다.

물론 그런 공동 행동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2010년대 들어 북한 핵을 두고 반전 평화 운동이 첨예하게 갈등하면서 공동 행동의 여지는 크게 줄었습니다.

장차 평화주의자들과의 공동 행동이 가능한 조건을 지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모든 경우에 적용될 일반 원칙은 극도로 제한돼 있으므로, 각각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평화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차이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중의 평화 염원에 크게 공감하면서도 운동 전략으로서의 평화주의에는 비판적입니다.

평화주의는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상이한 형태의 평화주의를 구별하는 것은 필요할 뿐 아니라 중요합니다. 자유주의적 평화주의는 체제의 특정 측면들만 비판합니다. 반면 좌파적 평화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평화주의에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도덕주의적으로 일체의 전쟁과 폭력을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전쟁은 인간이 저지르는 최대·최악의 폭력 행위라고 해서 평화주의자들은 모든 전쟁을 반대합니다.

전쟁이 야만적이고 잔인하다는 것은 참말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는 모든 전쟁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전쟁들이 진보적이고 정당하며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베트남 전쟁 등 피억압 민족 해방 전쟁, 러시아 혁명 직후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개입에 맞선 신생 러시아 노동자 국가의 방위 전쟁, 착취받고 억압받는 계급이 지배계급에 맞서 벌이는 내전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국주의적 전쟁은 반대합니다. 제1·2차세계대전 같은 제국주의 전쟁은 세계의 패권과 부를 재분할하려는 자본주의 강대국들 간의 경쟁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제국주의 대리전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서방과 러시아 중 어느 한 편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군사 지원 반대를 우선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일부 평화주의자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는 이유로 서방과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누가 먼저 총을 쐈는가,” “누가 침략자인가” 하는 점을 전쟁의 성격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누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하는 점이 핵심입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을 먼저 공격했습니다(진주만 공습). 그렇다고 해서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침략 전쟁인가요? 또는 미국의 방어 전쟁인가요? 태평양전쟁의 본질은 그 지역의 통제를 둘러싸고 벌인 일본과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이었습니다.

종종 평화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합리적 이성”이나 인류애 같은 추상적·절대적 도덕에 호소해 전쟁을 반대합니다. ‘전쟁은 불필요하다’, ‘지배계급이 군축의 필요성에 동의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세계의 전쟁들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다’ 등 소박한 가정들이 전제돼 있습니다.

위대한 역사학자 E. P. 톰슨이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톰슨은 1980년대 영국 반핵군축운동(CND)을 주도했던 탁월한 역사가였습니다.

평화주의자로서 그는 “절멸주의” 이론을 내놨습니다. 핵무기가 계급 이익과 무관하게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에 핵무기는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문제라는 게 골자였습니다. 따라서 전쟁을 낳는 체제를 없애기 위한 계급투쟁을 고무할 것이 아니라 사회 최상층부터 바닥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합리적 대안”을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경쟁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경쟁도 경쟁자들에게 외부적 강제를 부과합니다. 각각의 자본가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자들을 경기장에서 몰아내려고 애씁니다. 세계 시장에서 경제적 경쟁을 낳는 똑같은 조건들이 군사적 경쟁도 낳습니다. 자본가 계급은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힘을 통한 위협과 무력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규모 파괴 수단으로부터 세계를 구해 달라고 지배계급에 호소하는 것은 다국적기업들에 이윤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입니다.

합리적 이성이 판단의 기준이라면 자본주의는 진작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식량이 넘쳐나는데도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설비와 원자재가 쌓여 있는데도 실업자가 양산되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비롯해 수많은 참혹한 전쟁들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톰슨의 주장은 평화주의 이데올로기의 계급적 기반을 잘 보여 줍니다. 즉, 평화주의는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인류애”의 이름으로 계급 사회와 계급 분열을 부정하는 중간계급의 논리인 것입니다.

트로츠키도 평화주의의 핵심 계급 기반이 중간계급임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중간계급이 전쟁을 두려워하지만 전쟁으로 나아가는 자본가들을 막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국 자본주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자국 정부의 군사적 의무를 기본적으로 거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주의자들이 “이성”에 호소하는 것은 특히, 자본주의의 본질에 내재돼 있는 계급 적대를 무디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의도가 무엇이든지 평화주의는 결국 기존 체제의 가림막 구실을 한다고 지적해 온 것입니다.

국가 간 협정이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평화주의자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기존 세계 체제의 기반 위에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러저러한 국제기구·협정·회담이 전쟁으로 가는 추세를 막거나 완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주위의 평화주의도 주로 이런 국가 간 협상·협정을 중시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민주당과 주요 좌파 단체들(민주노총·정의당·진보당)은 남북 정상회담과 평화협정 체결을 한반도 군사 긴장 고조의 가장 중요한 해결 방안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전쟁 행위를 규제하는 국가 간 협정들은 관련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휴지조각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2014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체결한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사례가 아닙니다.

제1차세계대전의 대량 파괴·살상 뒤 국제연맹이 설립되고 군축 회담들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을 막지 못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핵 실험 금지 조약과 군축 협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옛 소련이 대규모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것을 전혀 막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스라엘·파키스탄·인도·북한 같은 국가들이 새롭게 핵 보유국이 되는 것도 막지 못했습니다.

유엔과 그 밖의 국제 기구들은 강대국인 주요 회원국들의 정책 도구 노릇을 합니다. 때문에 전쟁의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언제나 승자의 법정이었고, 그래서 전쟁의 대안이 아니라 전쟁의 일부였습니다. 미국의 전쟁 지도자나 군인 중 기소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국제법이 세계의 보통 사람들의 민주적 표현이 아니라 세계 지배계급의 이익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평화주의자들은 제국주의를 유순하게 만들 수 있고 각국 지배계급이 전쟁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제국주의 체제하에서 경쟁국들 간의 이러저러한 협정을 통해 평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환상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폴란드계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세계 평화와 군축이 기존 사회 질서의 틀 안에서 실현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은 “한심한 미봉책”이고 “공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지배계급에 군축을 호소하는 것은 반전 운동을 무장 해제시키는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평화주의자들의 이런 해법 이면에는 자본주의하의 전쟁과 평화를 근본적으로 다른 별개 상황으로 여기는 발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레닌은 “전쟁은 평화 정책의 지속이고, 평화는 전쟁 정책의 지속”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제1차세계대전은 그 이전 소위 평화 시기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의 지속이었던 것입니다.

전쟁은 개전 오래 전부터 서로 적대하는 강대국들의 지배계급들이 추구해 온 정치를 무력 수단을 통해 지속하는 것입니다. 즉,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일 뿐입니다.

평화도 바로 동일한 정치의 지속입니다. 전쟁의 결과로 적대 세력들의 힘 관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컨대, 제국주의 체제 내에서 협정을 통한 평화는 공공연한 적대 행위를 일시 중단하고 미래의 전쟁을 예비하는 것일 뿐입니다.

혁명과 평화

이렇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쟁은 고질적이고 필연적입니다. 자본주의와 전쟁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지배계급은 전쟁과 파괴 없이 자기 계급 안에서 전리품 분배를 조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이 보여 준 바입니다.

이렇듯 전쟁은 자본주의의 풍토병이고 붙박이장인 것입니다.

따라서 전쟁을 끝장내는 것은 자본주의를 끝장내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두 과제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없애지 않고도 평화적인 국제 관계가 가능한 것처럼 설파하는 것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평화,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의 평화, 억압자와 피억압자 간의 평화를 설파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화주의는 적대적 계급들 간의 사회적 조화를 이루려는 사상과 동일한 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된 고전적인 논쟁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 레닌과 독일 사민당 지도자 카를 카우츠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제1차세계대전 개전 직후 카우츠키는 독일 정부의 전쟁 노력을 지지했습니다. 전쟁이 지속되고 대중의 불만이 커지자 카우츠키는 평화 회담을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습니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기회주의 전력을 은폐하고 약화된 대중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혁명적 투쟁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거리 반전 시위조차 모험주의라고 비난했습니다.

레닌은 카우츠키의 평화주의가 개혁주의의 다른 모습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사회평화주의자라고 비판했습니다. 계급투쟁에 직면해 사회의 평화를 헛되이 설교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 용어를 사용해 평화주의를 설교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레닌은 자본주의 정부를 혁명적으로 전복하지 않는다면 평화는 제국주의적 평화, 제국주의 전쟁의 지속일 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제1차세계대전을 끝장낸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더 결정적이게는 1918년 독일 혁명이었습니다.

평화주의자들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이 폐지되고 그에 따라 국가가 점진적으로 소멸되지 않는다면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는 유혈낭자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코앞에 임박한 것은 아니지만 군사적 긴장이 쌓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혁명적 분석을 발전시키면서 평화 운동을 건설할 태세를 갖춰야 합니다.

이때 로자 룩셈부르크의 동지였던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주창한 구호 “주적은 국내에 있다”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표어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서방 지원을 한결같이 반대해야 하고, 한국 자본주의 자체를 반대해야 합니다.

현재 북한 핵 고도화 위협 때문에 미국과 북한의 핵을 대등한 위협 문제로 보는 관점이 대중의 평화 정서에 호소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한국 정부의 친서방(미·일) 대외정책에 우선적으로 반대해야 한다는 점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추상적인 평화주의 기치와 제안들 속에서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제국주의 강대국들 중 어느 한 쪽을 지지해서는 안 되고 모두에 반대해야 하지만, 한·미·일 군사 동맹을 우선적으로 반대해야 합니다.

평화를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이런 운동을 건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화주의의 정치적 난점에 대해 말하기를 회피하거나, 평화주의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우리 견해를 한정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