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전 종전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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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정부가 들어선 뒤 이라크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네 번이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1998년 12월부터 이틀에 한 번 꼴로 이라크를 폭격해 왔다. 폭격과 경제 제제는 평범한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 넣고 있다. 걸프전이 종전된 지 1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걸프전의 공포는 계속되고 있다.
10년 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걸프전을 일으켰다. 이라크에 폭탄이 빗발치고 있을 때 그는
그보다 여섯 달 전에 사담 후세인은 인접 국가인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미국 외교관들이 미국은 그런 침공을 전혀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라크 외교관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다. 후세인이 이라크 내 소수 민족인 쿠르드족을 상대로 화학 무기를 사용한 것을 포함해 사담 후세인을 무장시키고 그를 지원한 세력이 바로 서방이었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다.
후세인이 무례하게 굴고 서방이 그를 벌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서방과 거래해 온 무자비한 폭군이었다는 진실 또한 알려지지 않았다. 대신에 전쟁을 정당화하는 거짓말이 넘쳐났다. 이라크 병사들이 쿠웨이트 병원에서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아기들을 살해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고 쿠웨이트의 지배자였던 알 사바 왕가에서 지어 낸 이야기임이 나중에 밝혀졌다. 우리는 전쟁이 쿠웨이트의 민주주의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쿠웨이트에는 애당초 민주주의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그런 거짓말들은 미국의 진정한 동기 ― 석유와 지배력 ― 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말
1990년대는 소련의 붕괴와 함께 시작됐다. 미국은 이제 자신이 중동과 세계에서 최강의 지배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중동은 석유 때문에 중요했다.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서 세계 제2위의 석유 확인매장량
미국 국무부는 아라비아 반도와 페르시아 만
군부와 정치가들은 이라크를 폭격하고 있는 죽음의 기술이 거둔 성공을 더 좋아했다. 미국 군부는 자신들이 내보낸 보도 자료와 꾸며 낸 이야기를 그저 되풀이하는 대부분 언론의 도움을 받았다. 텔레비전은 진짜로 끔찍한 장면을 내보내지 않도록 검열을 받았다.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나 몹시 충격적인 장면들은 금지됐다. 민간인 사상자들을 언급할 때는
우리는
바그다드의 병원을 빠져 나온 어떤 여인은
1991년 1월 12일, 폭격이 시작되기 나흘 전에 10만 명이 참가한 런던의 시위 행진을 포함하여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반전 시위를 벌였다. 영국 전역의 작업장과 주택 지구에서 사람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고 언론 노동자들도 신문
피비린내 나는 서방의 석유 전쟁
전쟁은 2월 28일에 끝났다. 미국과 영국과 그 연합국들이 취한 마지막 조치는 이미 항복하고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남부로 철수하고 있던 바스라 도상의 이라크 군대를 학살한 것이었다. 어떤 미국 병사는 그 학살을
그의 사촌 레스는 존이
작년에 미국의 언론인 시모어 허쉬는 바스라 도상의 학살에 관한 자세한 기사를 썼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의 장군 배리 먹캐프리는 전쟁을 끝내자고 한 휴전 이틀 뒤에 의도적으로 학살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바스라가 얘기의 끝이 아니다. 전쟁 끝 무렵에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이슬람 교도들과 북부의 쿠르드족이 사담 후세인에 맞서 봉기했다. 그들은 부시와 메이저가 전쟁의 원흉이라고 지목했던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민중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담 후세인이 두 봉기를 모두 잔인하게 진압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했다. 전직 국가안보회의 중동 국장이었던 리처드 하스는
전쟁의 목표는
공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라크를 상대로 한 전쟁은 경제 제재 조치를 통해 계속되고 있다. 전쟁 전의 이라크는 현대적인 학교가 있는 세련된 나라였다. 이라크의 의료 서비스는 그 지역의 부러움을 샀다. 이라크는 세계에서 유아 사망률이 가장 낮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유아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전쟁과 경제 제재는 초인플레, 대중 빈곤, 사회적
1991년 이래 계속된 경제 제재는 달마다 5천에서 6천 명의 이라크인을 살해했다. 정화되지 않은 생활 하수를 그대로 수로에 버리기 때문에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풍토병이 됐다. 현대적인 병원에는 기본적인 응급 약품은커녕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경제 제재는 종이를 이라크 국내로 반입하는 것을 금지해 왔고, 고무
클린턴의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1996년에 TV에 출연했을 때 경제 제재의 결과로 이라크 어린이 50만 명이 죽은 것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그녀의 대답은
영국 외무장관 피터 헤인은 지난 1월 〈가디언〉과의 회견에서
후세인에 대한 복수심은 경제 제재로 그치지 않았다. 1998년 12월에 4백 기의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한 것을 포함해서 이라크에 대한 폭격은 계속 되풀이됐다.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 북부와 남부에
미국과 영국은 1998년 12월 이래로 사실상 이틀에 한 번 꼴로 이라크를 폭격해 왔다. 그것은 언론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1999년 3월에 〈가디언〉이 사설에서
〈워싱턴 포스트〉가 1998년에 썼듯이,
열화 우라늄 지옥
미국은 치명적인 열화 우라늄으로 만든 무기들을 엄청나게 많이 투하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식량을 얻는 비옥한 토지인 바스라 시 남부의 들판이 특히 심한 타격을 입었다. 열화 우라늄은 이라크 병사들의 폐 속으로 침투하여 그들이 처음으로 병에 걸리게 됐다.
토마토, 양파, 감자, 고기도 우라늄 찌꺼기에 오염됐다. 1998년에 언론인 로버트 피스크는
전투가 끝난 뒤에 전진하여 이라크 기갑 부대의 오염된 잔해를 파괴한 미군 병사들도 그 우라늄 찌꺼기에 노출됐다. 오늘날 이라크 남부에서는 암이 4배로 증가했고 어린이들은 백혈병과 임파종 암으로 죽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