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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은이 서평]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 ─ 콜론타이·체트킨·레닌·트로츠키 저작선:
근본적 사회변혁과 여성해방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필독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 — 콜론타이·체트킨·레닌·트로츠키 저작선》 정진희 엮음, 책갈피, 272쪽, 13,000원

페미니즘이 국제적 차원에서 새롭게 부흥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여성들이 처한 모순된 현실(상당한 법률상 평등을 성취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광범한 여성 차별이 지속되는)과 더불어, 2000년대 들어 일어난 급진화의 산물이다.

페미니즘의 부흥은 북미와 유럽에서 두드러지는데, 이런 급진화 속에서 최근 몇 년 새 서구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과 마르크스주의적 여성해방론(가령 리즈 보겔)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치열하게 투쟁한 혁명가들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클라라 체트킨,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가 여성해방에 관해 쓰거나 연설한 내용을 담았다.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문제를 계급 문제로 환원하므로 여성 차별을 이해하거나 없애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해방 투쟁을 사회주의 건설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옛 소련 붕괴(1991년) 이후 한국의 여성운동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스탈린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여성해방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흐름들이 득세했다. 페미니즘의 주류는 여성 억압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거부했다. 그리고 가족제도를 자본주의 착취 구조에서 분리해 남성의 지배욕에 따라 작동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콜론타이, 체트킨, 레닌, 트로츠키

이런 분석은 약점이 있다. 우선, 여성의 삶이 역사적으로 크게 변해 온 이유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에서 여성이 처한 모순된 현실(많은 평등 조처가 제도화되고 성과 결혼이나 가족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개방적으로 바뀌면서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는 반면, 여전히 다수 여성의 삶이 크게 나아지지 않거나 심지어 더욱 나빠졌다)을 종합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무엇보다 여성 차별의 물질적 토대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해방의 전망과 전략도 제시하지 못한다.

평등을 강화하는 개혁 입법들이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구조는 그대로 남았다. 따라서 개혁은 상징적 조처에 머물거나 정치인들의 생색내기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각국 정부가 내핍 정책들을 시행하면서, 노동계급 여성들이 처한 법적 지위와 현실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적으로 유행한 신자유주의 정책들로 기업주와 부유층이 더욱 부유해지자, 여성들 사이의 양극화도 심화됐다.

이러한 현실은 여성해방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 준다. 여성해방 투쟁에 나서려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 비판과 근본적 변혁 전략을 제시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억압의 근원을 계급사회의 등장과 그 속에서 가족이 하는 구실에서 찾는다. 이런 분석을 통해 계급사회인 자본주의를 전복하면서 여성해방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창출하고 낡은 관행에 맞섬으로써 여성해방을 성취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무엇보다 자본주의 체제를 파괴할 수 있는 세력인 노동계급의 잠재력에 주목하면서 여성해방을 성취할 수 있는 전략을 제공한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작은 이에 관한 통찰을 보여 준다.

부르주아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여성운동

여성해방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은 독일 혁명가 체트킨과 러시아 혁명가 콜론타이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활동에서 명료히 드러난다. 이들은 당대의 부르주아 여성운동을 비판하며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구축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독일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뛰어난 지도자는 클라라 체트킨이었다. 체트킨은 여성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여성이 임금노동자가 되면서 일어난 변화, 특히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위시한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조점이었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은 투표권이 여성이 직면한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체트킨과 콜론타이는 투표권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투표권 쟁취에 한정하지 말고 노동권, 동일임금, 유급 출산휴가, 무료 보육 시설, 여성 교육 등을 위해 싸워야 하고, 나아가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재산과 소득 구분 없이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권을 옹호했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했기에 파업과 혁명적 투쟁에 반대하며 계급 협조주의를 추구해, 노동운동을 분열시키고 온건화 압력을 가했다. 여성해방을 착취받고 억압받는 노동계급의 해방운동과 분리하지 않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착취 질서를 옹호하는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체트킨과 콜론타이의 글과 연설문들을 보면, 체트킨과 콜론타이를 체제 변혁 투쟁으로부터 ‘자율적인’ 여성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한 페미니스트로 묘사하는 흔한 시각이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체트킨은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 소수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국제 사회주의의 원칙을 옹호하며 용기 있게 반전·반제국주의 주장을 펼쳤다. 이런 반제국주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하다. 2001년 9·11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서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무슬림 여성에게 히잡 벗기를 강요한 프랑스 지배계급의 법률과 정책을 옹호했다.

러시아 혁명과 여성해방

역사상 노동계급과 여성해방 투쟁의 정점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계급투쟁이 여성 평등과 해방운동의 진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줬다.

10월 혁명으로 세워진 소비에트는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법으로 보장했다. 그리고 유급 출산휴가를 전면 도입하고 이혼 간소화와 낙태 합법화 등을 추진했다. 나아가 볼셰비키는 여성해방을 실질화하는 데 가사를 사회화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료 어린이집, 공공 식당, 공공 세탁소 등을 운영해 양육과 가사를 사회화하려고 애썼다.

볼셰비키는 새로운 법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여성들 자신이 이 과정을 주도해야 한다고 봤다. 여성부인 제노텔은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콜론타이는 제노텔의 두 번째 의장이었다.

남성 혁명가들도 여성해방 투쟁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레닌은 “여성의 적극적 참여가 없다면 혁명은 승리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제노텔 창설과 그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내전에서 러시아 혁명을 지키는 적군(赤軍)을 이끈 트로츠키도 레닌과 함께 여성 노동자·농민 대회에 참가해 여성들의 활동을 격려했다. 이 책에 실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콜론타이, 레닌, 트로츠키의 저작과 연설문은 볼셰비키가 혁명 뒤 여성해방을 위해 기울인 진지한 노력의 일부를 보여 준다.

1920년대에 많은 볼셰비키가 여성해방을 위해 헌신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다른 많은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여성해방의 운명도 혁명 자체의 운명과 직결돼 있었다. 러시아는 너무 가난하고 후진적인 사회였다. 그래서 서구에서 노동자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면서 러시아에서 혁명을 진척시키는 데 엄청난 어려움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1918~20년에 벌어진 내전으로 혁명은 탈진해 버렸다. 대규모 인명 피해와 기근이 러시아를 덮쳤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성해방이 계속 진척될 수 없었다.

1920년대 말이 되면 혁명 자체가 아예 역전됐다. 1920년대에 부상한 관료 집단은 1928~29년 일부 남아 있던 혁명의 성과를 모조리 파괴하는 반혁명을 추진했다. 여성의 지위도 역전됐다. 트로츠키가 쓴 “가족 관계의 테르미도르 반동”은 “소련 사회의 실제 성격과 그 지배층의 진화”와 함께 소련에서 가족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예리하게 지적한 글이다.

반혁명 이후 스탈린주의 체제는 서방 자본주의와 경쟁하면서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군사적 필요를 위해 강박적 축적을 해야 하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 흔한 오해와 달리, 옛 소련에서 나타난 여성 억압은 사회주의가 돼도 여성 차별은 계속된다는 점을 입증한 게 아니라, 노동계급 혁명이 패배하면서 어떻게 여성들의 지위가 역전되고 차별이 지속되는지 보여 주는 비극적 사례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여성들의 삶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살던 시기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긍정적인 변화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차별에 시달리고 있고, 심각한 경제 위기로 대다수 여성들의 삶이 악화되고 있다. 지금처럼 불황이 장기화하고 국가 간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되는 때에 불황과 세계대전 그리고 혁명의 시대를 살아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성해방을 위해 내놓은 통찰과 실천적 경험을 곱씹어 보는 게 유익하다. 이 책은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에 영감을 불어넣고 여성해방의 전망과 전략에 관한 토론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