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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
‘조성주, 비관의 정치학’이 아니라 혁명적 정치가 필요하다

조성주 정치발전소 공동 대표(이하 존칭 생략)가 낸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후마니타스, 2015)이라는 책이 화제다. 책만이 아니라 ‘조성주’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도 높다. 최근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해 ‘2세대 진보정치’, ‘청년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조성주는 이 책에서 이전에 자신이 ‘운동권’으로 살았던 삶에 대한 회환과 반성으로 출발해, 이 책이 ‘다음 세대에게는 변화를 위한 작은 참고서’기 되길 바란다고 강조한다. “다음 세대라는 말을 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다른 무엇보다, 세상은 변했고 민주주의는 새로운 접근과 언어를 필요로 함에도 여전히 낡은 관행이 압도”(11P)하기 때문에 달라진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새롭지 않다. 사실 이 책의 정치는 자본주의와 늘 함께 있었던 개혁주의다. 마치 1899년 독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통렬히 비판한 베른슈타인이라는 유령이 깃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세련돼 보이는 문장, ‘알린스키’라는 참신해 보이는 화두 이면에 가려져 있는 개혁주의적 본질을 들추어 내어 비판하고,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여전히 유효한 대안이라는 주장을 할 것이다. 그리고 조성주가 가리키는 ‘다음 세대’의 일부이기도 한 사람으로 진정으로 이 시대에 청년들에게 필요한 게 뭔지 말하고 싶다. (사울 D. 알린스키의 사상 전반에 대한 평가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된 조성주

‘조성주 왜 뜨는가?’[1] 최근 많은 언론이 조성주 띄우기에 한창이다. 조성주가 뜨는 이유는 개인의 이미지나 역량 때문만은 아니다. 그 기저에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노동계급 투쟁 수준이 충분히 높지 않아 투쟁에 대한 회의가 커진 데 있다. 조성주가 스스로 운동에서 벗어나 정당 정치로 고민을 이동했다는 시점도 2005년이다. 이러한 회의는 투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냉소를 낳는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 체제 변혁에 대한 비관으로도 이어진다. 이런 배경은 개혁주의를 강화한다. 조성주 열풍은 ‘체제 내에서의 변화’만을 추구하는 그에 대한 개혁주의 언론들의(일부 부르주아 언론들도 포함해서) 찬양이다. 또 새정치연합의 무능, 진보정당의 정체로 기존 주류정치에 대한 환멸 속에서 새로운 얼굴에 대한 기대가 주는 효과다.

조성주의 주장

조성주는 이 책에 “대부분은 실패의 경험”(11p)으로부터 얻은 성공을 위한 교훈을 담았다고 한다. 그는 일관되게 개혁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반복해서 ‘투쟁’이 아니라 ‘체제 안에서 일하는 법’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애먼 젊은이들이 “환상과 과도한 열정에 빠져 있다가 그 환상이 지속될 수 없음에 좌절하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환상에 빠지지 말고 ‘체제 안에서 일해 가는 법’을 익힐 것을 제안”(29p)한다.

체제 ‘안’을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권위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라는 다소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 급진적인 언사들과 구호들은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게 마련”(27p)이라고 설명한다. 조성주가 이 책을 쓰는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고, 정치발전소를 함께 운영하는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이하 존칭 생략)의 《정치의 발견》(폴리테이아, 2011)을 보면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분명 1980년대 민주화를 가져다 준 힘은 운동에서 왔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25년이 지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좀 더 평등하고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 책임을 다시 그들에게 부과하는 게 옳은 일인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가 민주주의라면, 이제 그 과업은 자기희생적 운동을 통해서가 아닌, 정치가 좋아지는 것을 통해 실천돼야 할 것이다.”(36~37P)

민주화가 완성된 한국 사회에서 이제 아래로부터의 투쟁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성주에게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을 목표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는 시대에 더는 맞지 않는 환상에 불과하다.

87년 이후 한국에서 더는 투쟁이나 혁명이 필요 없다는 관점은 조성주의 정치 궤적과도 관련 있다. 그는 2000년대 중반경 NL 경향의 주요 활동가였던 민경우 씨와 NL 경향을 떠난다. 공통의 문제의식 중 핵심은 “남한 자본주의의 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변화를 더는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는 그로부터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이다.[2] 그래서 그들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공인된 가치로 자리잡았으므로 오직 선거를 통해서만”[3]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실천적 결론을 내렸고, 조성주는 이를 위해 정치 활동에 뛰어든다.

그러므로 조성주가 말하는 ‘체제 안에서 일하는 법’은 단지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피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뜻이 아니다. 그의 핵심은 ‘인류 최대의 발명품인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조성주에게 “민주주의란 상대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소통을 통해 더 나은 대안을 찾아가는 것이다. 보수는 없어져야 할 존재가 아니며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체제 안에서 일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간다고 한다면, 우리가 인정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사실은 체제 안에서는 타도의 대상도 제거의 대상도 없는” 것이다.(73p) 이는 박상훈이 《정치의 발견》에서“민주주의란, 사회경제적으로는 불평등하다 해도 정치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한 ‘시민권의 기초 위에 서 있는 체제’ ”(37p)라는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생각이다.

조성주가 보기에 체제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사회적 모순”이 존재하지만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62p)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집단들 간의 모순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잘 조율하고 타협해 가며 공동체 이익을 도모해 가는 과정”(62P)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갈등을 근본적으로 없애자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따라서 “갈등이 있는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59p)”.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의 변화를 중시한다면 사회구성원들끼리의 ‘타협, 공감하기’는 사회 변화를 위한 핵심적 방법론이다. 조성주가 이 책에서 제일 강조하는 이 방법은 어려운 처지의 놓인 사람들을 이해하자는 도덕적 의미가 아니다.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에 대한 것이다. 이해관계가 다른 사회구성원들끼리 서로 ‘공감’하고 조금씩 ‘타협’하며 문제를 조율하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뜻이다.

그는 많은 곳에서 정치의 본질은 ‘말의 힘’이라며 버락 오바마의 유명한 연설을 예로 들기도 한다. ‘자극적인 구호’가 아니라, ‘설득할 줄 아는 언어’가 대중의 지지를 얻어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수려한 언변으로 ‘타협’에 능한 소수 엘리트들에게 문제 해결을 맡겨야 한다는 논리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부정하고 오로지 몇몇 엘리트들의 협상으로 개혁을 쟁취할 수 있다는 조성주의 전략은 ‘타협, 공감하기’란 말 속에 감추어져 있다.

조성주의 주장에는 다원주의론이 깔려있다. 다원주의는 “개인이나 집단이 저마다 갖고 있는 가치관·이념, 또는 추구하는 목표 등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 또는 그것을 전제로 하여 사회현상을 파악하고 설명하는 입장”[4]이다. 즉, 누구나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갈등은 당연한 것이다. 어떤 이해관계에 따른 행위이든 간에 모두 자연스럽게 추구할 만한 것이고, 모두 합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사라져야 할 대상이 아니다. 이는 갈등을 조율하고 협상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부르주아 정치학의 오래된 개념이다. 다원주의의 틀로 보면 개인들이 각자의 이익에 따라 움직일 뿐 집단적 이해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더는 계급투쟁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맞지 않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나는 조성주의 세계관에 근본적 문제제기를 하며 출발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꿰뚫어 보는 마르크스주의의 눈으로 사회변화를 위한 전망을 제시할 것이다.

‘체제 안에서 일하는 법’

계급적대

자본주의 체제는 수만 갈래의 이해관계로 분열해 있는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자본주의는 적대하는 계급이 공존하는 사회다.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체제인 자본주의는 두 가지 근본적 분열로 유지된다. 첫째는 다수의 일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착취하는 소수 사이의 분열이다. 소수가 생산수단을 통제하기 때문에 다수는 자본가에게 고용돼 임금 노동자가 돼야만 한다.

원시공동체 이후 전체 인류 역사에서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착취해 잉여노동을 빼앗아 사회 전체를 유지하고 부를 쌓아왔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다만,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착취의 형태가 비교적 쉽게 드러났다. 노예는 채찍으로 관리하고 농노에게는 창이나 칼과 같은 무장력을 대놓고 사용하면서 생산물을 수탈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의 자유 의지로 공정한 계약서를 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착취가 은폐돼 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을 칼로 위협하며 일을 시키지 않지만 노동자들은 고용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자유 밖에 없다. 그래서 무언의 강제력이 노동자들을 일터로 몰아간다. 또한 노동자들은 스스로 무엇을 얼만큼 생산할지에 대한 결정권이 없다.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는 자신이 먹고 살 만큼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이 되면 자신이 받는 임금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를 자본가들을 위해 생산하게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굴러가게 해주는 이윤의 원천이다. 그리고 은폐돼 있지만, 착취의 본질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파업 며칠만 하면 수백억 원 손실이니, 수조 원 손실이니 하면서 호들갑 떠는 언론 보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호들갑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만큼의 잉여가치를 노동자들이 생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거 사회에서는 착취가 제한적이었다. 봉건 영주가 직접 소비할 것 이외에는 더 뽑아낼 필요가 없었다. 자본주의는 지배계급의 위장 크기에 착취가 달려있지 않다. 왜냐면 이는 자본주의의 둘째 근본 분열 때문이다. 바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데는 이해관계가 같지만 동시에 자본가들끼리 끊임없이 경쟁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자본가들이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이윤을 극대화해야 한다. 그래서 다들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쥐어짤 방안을 연구하고, 착취를 통해 번 돈으로 다시 생산수단에 투자하면서 끊임없이 경쟁에 유리해지려고 고군분투한다. 경쟁에서 이기려고 끊임없이 착취하고 투자하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축적을 위한 축적”이라 했다. 이렇게 강박적 축적으로 날뛰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윤 증대만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윤 증대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억눌러져야 마땅하다. 축적을 제대로 못하는 자본가는 파산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노동자의 권리,임금, 복지는 이윤 증대를 위해 희생된다. 따라서 윤리적 자본주의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은 화해가 불가능하다. 조성주는 계급에 관해 말하는 것을 구식이라고 하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소수 집단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는 것일 뿐이다. 바로 이 소수 집단이 지배계급이다.

레닌은 계급이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생산 체제에서 차지하는 지위, 생산수단과 맺는 관계, 사회적 노동조직 안에서 하는 구실로 구별되고, 따라서 사회적 부에서 차지하는 몫과 그것을 얻는 방법으로 구별되는 사람들의 커다란 집단이다.” 라고 했다. 지배계급은 그래서 사회의 나머지 대다수와 정반대의 이해관계 속에 있다.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피땀이 지배계급에게는 이윤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의 갈등은 결코 평화롭게 해소될 수 없다. 갈등은 ‘인간 운명의 비극성’[5]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경쟁과 강박적 축적 드라이브로 돌아가는 이윤중심 체제에서 비롯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의 갈등의 본질은 계급적대로 인한 계급적 불평등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는 아무리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써도 공정한 공간 따위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국가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과연 국가는 누구의 편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조성주는 ‘국가’ 자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국가가 민주주의를 실행했다면, 갈등은 민주적 제도 안에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활용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민주주의’를 실행한다는 국가 역시 계급적 관점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했다. “국가는 계급대립들의 화해 불가능성의 산물이자 표현이다. 국가는 계급 대립들이 객관적으로 화해 될 수 없는 한에서 생겨난다.”[6] 따라서 국가는 계급들끼리 화해의 공간이 아니라, 계급 적대의 산물이자 지배계급의 수단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국가들의 형태는 같은 시기에도 혹은 시기를 거치며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국가는 일당독재체제, 어떤 국가는 민주주의 제도가 발달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형태가 다양하더라도 국가는 지배계급의 지배 수단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형태가 어떻든 간에 지배계급은 국가를 통한 지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달라진 형태 때문에 국가가 본질적으로 달라졌다고 하는 것은 오류다. 개혁주의의 시조인 베른슈타인은 ‘자유민주주의’가 계급 정부의 폐지를 가져올 자동적 과정인 것처럼 주장했다. 의회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이상, 더는 자본가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지 않고 계급 적대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조성주도 마찬가지다. 다만, 베른슈타인의 ‘산업화-민주화-사회주의’라는 도식에서 마지막 단계인 사회주의를 삭제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우리가 위에서 특정지었던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 속에 있는 모순은 현대 민주주의에서 더욱 날카롭게 드러난다. 분명 민주주의의 형식은 전체 사회의 이해관계를 국가 조직 속에 표현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반면에, 그것은 여전히 단지 자본주의 사회, 즉 자본가의 이해관계가 결정적으로 지배하고, 그 이해를 표현하는 사회다. 따라서 형태에 있어서는 민주주의적인 제도일지라도, 내용에서는 지배계급의 도구가 된다.”[7]고 베른슈타인을 비판했다.

자본주의 국가가 어떤 형태를 선택하느냐는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돼 있다. 국가가 자본과 맺는 관계, 그리고 노동계급과 맺는 관계, 지배를 하기 위해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방식에 따라 형태의 차이가 난다.

강압과 폭력을 주된 방식으로 지배하는 권위주의 국가 형태에서 일부 국가들은 ‘민주주의’형태로 전환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독재의 한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87년 이후 한국- 준 부르주아 민주주의

한국은 87년을 기점으로 권위주의 국가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바뀌어 간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핵심 이유는 노동계급이 중심이 된 피억압 민중의 투쟁 덕분이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직면한 지배계급은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뭉칠 수 있는 결사의 자유,언론 출판의 자유, 민주노조 등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변화를 이끌어낸 핵심 동력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이었다.

당시 한국의 지배계급은 강력한 투쟁 앞에서 ‘강제와 폭력’을 통한 지배만이 아니라 ‘설득과 동의’의 방식도 결합하는 지배방식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가 계급이 단지 강제력, 즉 폭력으로만 지배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중요한 사실과 관계 있다. 때때로 트로츠키는 “총검을 가지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지만 그 위에 앉는 것만큼은 할 수 없다”는 나폴레옹 의 말을 인용했다. 또 트로츠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은 지배계급이 조직 노동계급의 세력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들을 국가의 정치 구조 안에 통합하는 자본주의 국가 형태라고 했다.

그래서 1987년 투쟁으로 쟁취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이 조직을 결성하고 투쟁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있어서 무관심하거나 폄하만 해대지 않는다. 그리고 민주적 제도를 후퇴시키는 역행에 맞서는 저항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부르주아지는 민주주의가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즉, 통치에 이로울 정도로만 민주주의를 허락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형식적 법적 평등을 앞세우며 착취 관계라는 근본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자본가들과 함께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관료들은 결코 선출되지 않는다. 그런 선출되지 않는 권력들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결정짓는다. 거의 유일하게 선출된 의회나 정부는 사회의 부를 생산하는 주요 수단을 소유하거나 통제하지는 못한다. 그러한 부의 생산수단은 대부분 선출되지 않은 자본가들의 손에 남아 있으며 자본주의적 경쟁의 법칙에 따라 운영된다.

선출된 의회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 ― 군부, 검찰, 경찰, 기업주 등 ― 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 설령, 일부가 약간의 이해관계를 건드리려고만 해도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을 지킨다. 자본을 해외로 무작정 빼돌리거나, 투자를 중단하며 위협을 가한다. 혹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빼앗긴 권력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무엇보다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일터 앞에서 멈춘다. 지배계급은 이런저런 종류의 투표를 권장하지만, 결국 작업장은 경제적 독재의 영역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관리자와 사장을 뽑을 수 없다. 무엇을 얼만큼 만들지, 몇 시간을 일할지 정할 수 없다.(일부의 몫을 협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우리의 법 체제 전체에는 현재의 계급 지배에 관한 법률 문구가 전혀 없다. 임금노예제가 법률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임금노예제를 단계적인 ‘법적인 방법’으로 폐지할 수 있는가?”[8]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또, 우리는 학교에서 무슨 교육을 받을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리모콘은 있지만 대중매체에서 무엇을 방송할 지 선택권이 없다.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된 학생들의 죽음을, 일자리가 없어 목숨을 끊는 청년들의 죽음을, 전쟁으로 희생되는 목숨, 엄청나게 낭비적인 군비 지출, 심각한 기후변화. 우리의 목숨이 걸린 일에 대해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얼마 전,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무려 10년의 투쟁 끝에 노동조합을 인정받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장한다는 노동권조차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자유와 평등’이 자본주의 질서 유지에 이로운지 아닌지로 판단되는 형식적 측면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1987년 이후에도 한국에서 수많은 피억압 민중이 자본주의가 만드는 끊임없는 경제 위기 속에서 고통당하며 투쟁해 왔다. 1997년 IMF 사태, 2008년 경제 위기처럼 노동자를 비롯한 피억압 민중은 스스로 결정한 적 없는 경제 위기 때문에 고통 받았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기도 하고 2008년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따라서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투쟁이 더는 필요가 없기는커녕, 자본주의가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위기 때문에 투쟁의 필요가 커져 왔을 따름이다. 그리고 경제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지배계급은 그나마 있던 민주주의조차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와 떼어놓고 보면서, 완료된 체제라고 보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먼저 경험한 유럽의 민중은 유럽의 지배자들이 일으킨 경제 위기 때문에 긴축을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2008년도 이후로 유럽 국가의 노동자들은 유럽연합의 긴축안을 거부하며 투쟁하고 있다.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계급에게 전가하라는 사명을 안고 당선한 박근혜 정부는 국회논의 절차 조차 거슬려 하며 ‘시행령’ 대통령 행세를 한다. 박근혜 정부의 반민주적 탄압 사례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세월호의 진상을 밝히길 바라는 대다수 민중의 염원을 무시하고, 세월호 조사 특별위원회조차 무력하게 만드는 사례만 들어도 얼마나 반민주적인지 알 수 있다.

요컨대 87년 이후 한국은 노동자들의 조직 ‘결성의 자유’ 등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내용의 일부를 쟁취하고, 그리고 국가와 자본의 관계가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 달라졌다. 따라서 계급이 사라지거나, 본질적으로 다르게 변모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관계의 형태가 달라진 것일 뿐이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적대하는 계급도 존속한다.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불평등도 따라서 지속된다. 그러므로 결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가 되지는 못했다.

타협, 의사소통의 중요성?

조성주는 최근 정의당 당대표로 출마하면서 “정의당은 박근혜 대통령과 싸우는 정당이 아니고,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과 싸우는 정당이 아니다”라는 말로 합리적 진보라는 평을 받았다.

이는 그가 강조하는 ‘체제 안에서 일’하기 위해 ‘타협과 공감’해야 하는 실천적 방법론의 구현인 것 같다. 박근혜 정부는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협상의 대상이기 때문에 박근혜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자본주의는 적대하는 계급이 공존하고 있는 체제다. 예를 들어, 조성주는 박근혜와 각종 민생 살리기 정책을 놓고 협상을 하기 위해 박근혜가 처한 조건을 헤아려주겠지만, 박근혜는 전혀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에 공감하지 않는다. 박근혜는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들이 슬픔에 잠겨있을 때 경기가 나빠지며 안 된다며 기업들의 주머니를 걱정했다. 이는 박근혜의 인품의 문제가 아니라 (물론 인품도 극도로 사악하겠지만) 그의 위치가 노동계급을 철저히 쥐어짜고, 경제 위기를 고통을 떠넘겨야 하는 지배계급에 기반하고 있어서다. 객관적으로 처한 계급적 위치에서 비롯하는 적대인 것이다.

따라서 조성주의 머릿속 현실과 달리 진짜 “현실 사회는 대립되는 정반대의 이익과 지향점과 견해를 가진 계급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사회 문제에서 보편 인간학, 추상적 자유주의, 추상적 도덕은 당분간 환상이며, 자기 기만이다.”[9]

개혁 없는 개혁주의

개혁주의적 전략과 전술의 방법론은 현실에서 무기력할 때가 많다. 조성주가 말하는 ‘체제의 링’ 안으로 들어가 상대방 복서를 ‘공감’한들, 결국 얻어맞기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성주는 좌파들이 사회주의라는 ‘거룩한 계시’를 기다리는 동안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한다며 왜곡한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현실의 삶을 개선하는 투쟁에 무관심하지 않다. 개혁을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의 삶을 개선하고 의식을 발전시킨다. 이런 경험들 속에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근본적으로 불평등을 없애는 사회를 쟁취하기 위한 변혁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혁주의 정치는 협상을 최우선에 놓고 투쟁을 배제하거나 자제시키므로 개혁을 쟁취하는 데 무능한 경우가 많다.

조성주는 책에서 자신의 유일한 활동 원칙은 “약자들의 싸움은 패배해서는 안 된다. 만약 패배할 것 같다면 무조건 도망치고 이길 수 있는 싸움만 골라서 해야 한다.”(8p) 는 것이고, “거의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 번의 패배는 곧 모든 것의 종말과도 같기”(8p)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패배하지 않으려면 “민주주의가 허용하는 것은 점진주의뿐”(127p)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성주는 당장 “손에 잡히는 요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당히 실용주의적인 접근법이다. 하지만 실용주의는 정말 필요한 것을 손에 쥐어주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 운동의 요구 수준을 자꾸 삭감하게 하고, 저들에게 양보를 강요 받으며 운동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운동을 약화시킨다.

개혁주의는 자본주의 체제가 내줄 것이 충분하고, 지배계급이 양보할 준비가 돼 있는 것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특히, 경제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떨어지는 이윤을 어떻게든 지켜줘야 하는 지배계급 입장에서 더 내줄 것이 없어져 개혁주의의 입지가 줄어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약자들의 패배’를 막으려면 소수 엘리트들의 협상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핵심에 놓아야 한다. 개혁에 무능했던 개혁주의의 사례들은 많은데, 여기서 개혁주의가 운동에서 하는 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지난해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를 보자. 비극적인 참사 이후 수많은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가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희생된 계급 불평등의 문제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이 참사의 진상을 밝히려는 투쟁이 유가족을 선두로 시작되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운동의 요구는 혁명적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 참사가 일어난 원인을 명명백백히 밝혀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안전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다.

노동계급에게는 상식인 것이 지배계급에게는 결코 상식적이지 않다. 세월호 참사는 자본주의 체제 운영의 우선순위가 인간의 목숨이 아니라 이윤에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이와 관련한 진실이 대중 앞에 또렷이 밝혀져 앞으로 통치의 정당성이 훼손당할까 봐서 진실 밝히기를 꺼려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세월호 진상규명 운동을 막았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의 진실에 접근하려면 박근혜 정부를 결코 입으로만 설득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래로부터의 강력한 투쟁, 특히 노동자들의 투쟁이 결합돼야 우리 계급에게는 사이코패스 같은 박근혜 정부에게 실질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물론 세월호 진상규명 운동은 박근혜 정부에게 씻지 못할 정치적 내상을 입혔고, 적잖은 사람들에게 박근혜 정부와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어준 성과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진상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애초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운동이 내걸었던 세월호 특별법에서 핵심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수사권과 기소권 없이 아무도 순순히 조사를 받지 않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월호 운동의 개혁주의 리더들은 투쟁보다 국회에 입법청원을 넣는 방식을 택하면서 협상을 우선에 놓았다. 그러면서 점점 운동의 요구 수준을 낮출 것을 종용했다. 노동조합의 개혁주의 리더들은 실질적으로 노동자 투쟁을 조직하는 것을 회피하며 운동의 전진을 위한 동력을 제공하지 않았다. 결국 제대로 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운동의 적기를 놓치고 운동은 일단락되고 말았다.

협상을 우선으로 놓으면 상대방의 처지를 ‘공감’하고 자꾸 우리 것을 내주게 된다. 그러다 보면 약자들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최대치를 하지 않고, 소수가 비민주적인 ‘용기있는 타협’을 통해 다수의 의사를 거스르기도 한다. ‘체제의 링’에 순순히 들어가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라 체제의 링에서 길들여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애초에 약속한 개혁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동시에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기업주, 정부에 맞서 격렬히 싸울 수는 있지만 그때조차 자본주의까지 타도할 엄두는 쉽게 못 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배적인 사상이 지배계급의 사상인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결코 단숨에 혁명을 지향하는 노동자들이 다수가 될 수는 없다. 개혁주의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계급 다수의 모순된 개혁주의 의식과 계속 공존할 수 있다. 아직 “노동자들이 더 나은 세계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그런 사회를 건설할 자신감이 없는 한” 개혁주의는 강력하다.

그러므로 혁명기가 아닌 일상적 시기에 투쟁은 어느 시점에서는 타협으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적 관점이라는 원칙을 일상적 시기에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일상적 시기의 투쟁에서조차 원칙이 없으면 승리를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어떤 싸움이 타협으로 끝날 때 그것이 불가피한 타협인지, 불필요한 배신적 타협인지 판단할 기준이 있어야 패배를 반복하지 않는다. 개혁주의자들이 투쟁을 자제시켜 개혁을 성취하지 못한 패배감이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떨어트린다. 개혁주의는 자신감 저하를 이용해 다시 부상하고 또 같은 방식으로 악순환을 낳는다. 이미 개혁주의가 뿌리깊은 유럽에서는 영국의 노동당 같은 ‘개혁 없는 개혁주의’인 우파 개혁주의에 대한 환멸이 깊다. 환멸을 배경으로 좌파 개혁주의가 부상하고 소수는 급진좌파로 흡수되기도 했다.

반면에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을 위한 투쟁이 승리하도록 최상의 전술을 제시하고 운동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개입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입으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사상을 가진 대다수의 노동자들과 관계 맺고 개혁주의 노동자들과 공동 행동을 조직하고 혁명적 정치가 개혁주의 정치보다 낫다는 것을 실천에서 보여 주려고 노력한다.

좌파들에 대한 왜곡

조성주는 책 전반에 걸쳐 ‘혁명적 정치는 혁명도 성공시키지 못하고 아무것도 성취한 것이 없기 때문에 대안이 아니다. 그래서 내(조성주)가 지향하는 개혁주의 정치가 정답이다.’라는 논리를 펼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반증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저런 사실의 파편들을 들이대며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는 경험주의적 방식으로는 진정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발견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본질이 언제나 일치한다면 과학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상은 본질의 일부를 반영하지만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근로계약서를 ‘공정’하게 작성한다고 해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본질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가 작동되는 원리로부터 사회를 변화시키는 핵심적 동력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실현시키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변화를 추동 할 수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 맞서는 운동을 공상에서 과학으로 이끌어 온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옳다. 현대 자본주의가 이전보다 복잡다단해져서 전통적 투쟁 방식이 쓸모없어졌다는 주장과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그대로 작동되는 체제의 비밀을 밝혀준다. 조성주는 급진좌파를 비롯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치를 ‘거룩한 천사’의 계시를 기다리는 무지로 표현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조성주는 “(좌파들의) 환상을 거두고 보면 세상은 부조리하고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97p)며 자본주의 체제를 두려워한다. 물론, 체제에 맞선 저항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자 투쟁은 탄압받기 일쑤다. 하지만 자본주의 지배계급은 착취에서 나온 이윤에 의존하며 기생하는 존재들이다. 지배계급의 사상과 체제는 아직 공고하지만, 역사적으로 크고 작은 혁명 없이 지나온 날들이 없다. 문제는 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왜 승리하지 못했는가다. 여기서 역사적 교훈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박근혜와 좋은 말로 해결하려는 조성주의 개혁주의적 전략이야 말로 ‘환상의 세계’에 갇혀 있다.

사실 급진좌파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힐난하는 데는 개혁주의적 전략과 전술의 주된 방식인 지배계급과의 협상에 있어서, 좌파들의 존재가 방해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개혁주의자들은 노골적으로 급진좌파를 적대시하기도 한다.

이점은 첫째, 조성주의 솔직하지 못한 돌아보기다. 조성주는 이전에 속했던 NL 경향이 한국 사회를 ‘식민지 반半자본주의’라고 규정하거나, 경제 분석 등을 등한시하는 비현실성에 합리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가 ‘거대담론보다 고통 받는 내 옆 동료의 구체적 삶’을 개선하자고 주장할 때, 그 거대담론이 가리키는 것은 NL 진영의 민족해방론 등을 뜻했던 것이다. 건설적인 비판을 하려면 왜 민족해방론 등이 현실과 맞지 않는지를 분석해야지 좌파 전체를 비과학적 교조주의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둘째, 조성주는 그래서 박상훈의 “진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보수만이 아니다. 오히려 반민주적 좌파 내지 혁명적 좌파와의 싸움이 더 힘들고,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민주주의 하에서 진보는 성장·집권하기 어렵다”[10]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언론 인터뷰를 많이 한다. 기존 운동권을 음모적으로 묘사하거나, 선민의식에 빠진 자들이라고 비난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는 개혁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전략을 위해 계급투쟁을 중시하는 급진좌파들을 왜곡하는 전형적 수법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 (베른슈타인은) 수백 년 이래 인류 역사의 축이며 추동력인 것을 블랑키주의적인 [음모적 테러주의-박한솔] 오산으로 여기고 있다. 계급사회가 존재한 이래, 또 이 사회의 역사를 만드는 본질적인 내용이 계급투쟁인 이래,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항상 상승하는 계급의 목표였을 뿐 아니라, 또한 각 역사적 시기의 출발점이면서 종착점이었다. 실로 모든 법률 헌장은 오로지 혁명의 산물이다. 혁명이 계급 역사의 정치적 창조 행위라면, 법률 제정은 그 사회의 정치적인 존속을 표현하는 것”[11] 이라고 했다.

‘약자들의 승리’를 위한 핵심 과제는 무엇인가? 전반적인 임금 삭감, 복지와 연금 삭감, 반민주주의적 공격으로 우리의 숨통을 조여오는 박근혜 정부에 맞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급진좌파,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적 정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투쟁 특히 노동자 투쟁이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실천

이러한 과제에 비추어 봤을 때 조성주의 실천과 행보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조성주의 전략에는 말쑥한 차림의 정치인은 있어도 노동계급은 없다. 민경우 씨처럼 농민을 변화의 주체로 설정한 NL 경향을 옳게 비판했지만, 정작 자본주의의 성장으로 중요해진 노동계급의 힘을 거부한다. 민경우 씨는 새로운 사회변화의 주체로 농민 대신 자영업자를 택했다. 조성주는 불안정 노동과 청년실업이 증가하는 시대적 맥락의 반영으로 농민이 아닌 자리에 청년을 택했다. 이는 청년실업이 너무나 심각한 상황에서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정당한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조성주가 스스로 청년을 대표하겠다며 다른 기존 개혁주의 정치인들과의 차이를 긋고 주목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성주의 문제는 청년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조직 노동계급과의 단절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조성주는 조직 노동계급은 1987년 투쟁의 수혜를 받아 ‘민주주의 광장 안’에 있지만 새로운 세대들은 ‘민주주의 광장 밖’으로 밀려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 광장 밖’에 세력들이 변화의 주체가 돼 ‘민주주의 광장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광장 안’에 있는 기성세대, 전통적 노동운동은 사실상 변화의 힘을 잃어버렸다고 본다.

그런데 민주주의 광장 ‘안과 밖’을 나누는 것은 자기모순적이다. 조성주는 한국 사회 전체가 민주주의의 확립으로 투쟁이 필요 없는 체제로 변모했다면서도 동시에 민주주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주체라고 하는 것이다. 조성주의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것일까? 민주화가 ‘덜’ 되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해서라도 투쟁은 필요한 것 아닌가?

무엇보다 조성주의 문제는 대체 왜 ‘민주주의의 광장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생겼는지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민주주의 광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광장 밖이 만들어진 것처럼 말한다.

청년들이 ‘민주주의 광장 밖’으로 밀려난 이유

조성주는 책과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그 몫으로 청년고용을 늘리고, 고용보험료도 노동자들이 더 내서 청년들에게 실업급여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성주의 분석은 틀렸다. 청년들이 실업, 알바, 높은 등록금, 학자금 대출에 시달리는 것은 기성세대 때문이 아니다. 일터에서는 독재, 시장에서는 무정부주의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낳은 경제 위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는 08년도 이후로 장기적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각한 세계경제 위기 속에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도 어려움을 면치 못하고 있다. 기업들의 수익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신규채용을 꺼리고, 기존 노동자들을 혹사시키는 방향으로 어떻게든 이윤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정부는 기업의 수익성을 걱정하며 경제 위기의 책임을 노동계급에게 떠넘기기 위해 사활적이다.

근본에서 실업은 경기침체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붙박이장이다.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임금을 인상하기보다 생산부문에 투자한다. 이렇게 되면 같은 양의 상품을 더 적은 노동자로도 생산할 수 있다. 그러면 자본가는 필요 이상의 노동자를 해고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상대적 과잉인구”라고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을 혁신하며 노동절약적 기술을 도입해 이윤을 증대시키는 과정에서 “산업 예비군”, 즉 실업자가 필연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따라서 민주주의 광장 안에 안주한 기성세대 때문에 청년들이 광장 밖으로 밀려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민주적이지 않은 체제에서 소수의 지배계급이 일으킨 경제 위기가 원인이다. 원인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고 부모 임금을 떼어 자식에게 주자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또 이 주장은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이며 모든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대기업 노동자들이라고 해서 열악한 노동자들보다 덜 착취 받거나, 편하게 일하는 것이 아니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은 고된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것이다. 게다가 상대적 고임금은 정규직이 비정규직 몫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전부 기업주들이 빼앗아간다. 대기업일수록 노동소득분배율이 낮다. 노동자 양보론은 ‘기업주 VS 노동계급’이라는 진정한 계급 분단선을 가리고 노동자들끼리 분열시키는 분열전략일 뿐이다.

또 개혁주의자들의 공상적 전략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이 먼저 임금을 삭감하거나 보험료를 더 내면 자본가들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발상은 착각이다. 무엇보다 경제 위기 시대다. 간단히 말하면 기업의 이윤이 줄어들어서 이윤을 만회하려는 마당에 절대 노동자들이 임금을 스스로 깎으면 그 깎인 몫만큼 “자본가인 내가 기부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대한 비관, 투쟁을 조직하는 것을 회피하고 우리 것을 내주어 협상에만 의존하려는 개혁주의자다운 전략과 전술이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그 몫이 청년고용으로 돌아오는가? 노동자들로부터 고용보험료를 걷으며 그것이 청년들의 실업급여로 돌아오는가? 그 돈을 거두어 나누는 실행의 주체는 국가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박근혜 정부가 공무원연금 삭감분 중 20퍼센트를 국민연금 상향 개선에 사용하자는 합의에 강경하게 반대한 것을 보자. 또 박근혜가 시대적 배경상 특별히 악독하기 하지만 박근혜만의 문제는 아니다. 박근혜를 비롯한 역대 정권은 ‘재정 절감’을 내세우며 복지를 축소하고 그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겨 왔다. 비정규직 확대, 임금 등 노동조건 악화로 기업주들의 이윤을 보장해줬을 뿐이다.

물론 나는 조성주가 2010년 설립 멤버였던 ‘청년유니온’의 활동을 지지한다. 저질 알바 노동, 실업 등 청년들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매우 뜻 깊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으로 30분 배달제도 폐지, 커피전문점의 주휴수당 지급 등을 성취한 것은 전체 운동의 기여한 바이며, 소중한 성과다. 올해 최저임금위원회의 청년 대표로 나간 것도 당연히 지지할 만하다. 복지와 노동의 사각지대로 내몰린 청년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이를 언론이 많이 실어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내가 비판하는 점은 청년들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청년들의 조건 개선을 위한 노력은 더욱 확대돼야 하며 성과를 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결국에 빛을 보려면 청년유니온과 조성주가 공유하는 “사회연대전략”을 비판하고 거부해야만 한다.

지금 박근혜 정부는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고혈을 짜기 위한 칼자루를 휘두르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칼자루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청년들까지 노리고 있다. 청년실업을 볼모로 노동자와 청년들을 사악하게 이간질하는 것이다. 청년유니온과 조성주는 박근혜의 사회연대전략이 아니라, 우리 편의 선제적인 사회연대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박근혜가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국가의 속성상 우리 편의 선제적 양보는 저들의 이간질을 이롭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정부를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가 진정으로 노리는 바, 모든 노동자들의 조건 하락과 경제 위기의 고통을 전가하려는 시도를 막아야 한다. 그래야 청년들도 살수 있다. 그 방법은 조직 노동계급과 선을 긋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이간질을 통해 고립시키려는 노동운동에 적극 지지를 보내는 것이 대안이다. 노동자들에게 휘두르는 칼날을 처음부터 막아야 청년들에게도 유리하다. 박근혜 정부가 노동운동을 그토록 다른 사회세력들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이유는 노동운동이 가진 강력한 힘 때문이지, 열악한 노동자나 청년들이 더 예뻐서가 아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조성주와 달리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혁명이 여전히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번영을 누렸지만 동시에 대다수는 굶주림, 가난, 실업, 전쟁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자본주의의 야만성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증대한다. 20세기에 거듭된 축적과 경쟁은 더 새롭고 파괴적인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거대한 기업들이 국가들과 얽히고 섥혀 국가들끼리의 경쟁은 더 첨예해진다. 자본주의 권력의 핵심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며 세계 여러 지역의 패권을 가지기 위해 경제적 경쟁과 전쟁을 결합했다. 이런 제국주의적 갈등은 우리 삶에 영속적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국가들끼리의 갈등은 ‘타협’으로 해결할 수 없다. 아무리 화려한 언변으로 전쟁 반대를 호소한들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결합되지 않으면 국가들은 경쟁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 체제는 파괴적일 뿐만 아니라 통제 불가능이라 주기적으로 경제 위기에 시달린다. 갈수록 주기가 길어지고 정도가 심해지는 위기 때문에 죽어나가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문제는 태생적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다. 조성주가 제기하는 ‘변화의 정치학’은 자본주의라는 암세포를 그대로 둔 채 약효가 떨어진 진통제만 맞으라는 꼴이다. 따라서 조성주의 문제의식에 대한 진정한 대답은 “개혁이냐, 혁명이냐”라는 갈림길에 여전히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혁명은 불가능하지 않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마르크스의 눈으로 본다면 영원불변한 체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바로 노동계급이다.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이윤을 창출해 내는 이 계급은 자본주의의 목줄을 움켜쥘 힘이 있다. 박근혜가 없어도 한국 사회는 돌아가지만, 이건희가 죽어도 삼성은 돌아가지만, 노동자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운영할 수 없다. 철도, 전기, 가스, 공장, 사무실, 학교, 병원 모든 곳에 노동자들이 있다.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에 주목한 것은 그들의 의식이 깨어있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집단적으로 일하고 이윤 창출을 멈춰 버릴 수 있는 객관적 조건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은 “압도 다수의 이해관계에 따른 압도 다수를 위한” 운동이 될 것이다. 청년과 같이 노동계급은 아니지만 억압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투쟁도 노동계급과 만날 때 가장 효과적이다. 따라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도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즉, 자본주의의 철폐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

1백년 전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강력하다. 우리의 답도 여전해야 한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냐, 야만주의로 퇴보냐’ 라는 갈림길에서 혁명에 대한 ‘비관의 정치학’은 무기력하다. 자본주의의 모순적 본질은 몇몇 혁명가들의 공상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현실이다. 현실이 우리를 끝없는 갈림길로 내모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혁명적 정치다.


[1] 〈프레시안〉 2015.07.02

[2] 김하영, “민경우의 NL 재구성 시도” 《마르크스21》 3호(2009년 가을) 258P

[3] 같은 글.

[4] 하동석,《이해하기 쉽게 쓴 행정학 용어사전》,2010.3.25

[5] 박상훈 《정치의 발견》, 후마니타스 ,2013, 9P

[6] 레닌, 《국가와 혁명》, 아고라, 2013

[7]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 2002

[8]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돌배개, 2002

[9]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돌배개

[10] 박상훈, 《정치의 발견》, 후마니타스, 2013, 130P

[11]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