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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슬라보예 지젝, 《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난민 문제에서 처참하게 망가진 지젝

해마다 지중해에서는 세월호 참사 같은 비극이 수차례 반복된다. 유럽으로 가려는 난민을 실은 배가 한 해에도 몇 번씩 침몰된다. 그래서 지중해에 수장된 난민 수는 2000년 이후에만 무려 2만 명이 넘었다. 지난 5월 말에도 단 사흘 동안 7백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망망대해에서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게 난민을 실은 낡은 배가 뒤집어지는 모습은 언론에도 보도됐고,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난민 사태”를 겪고 있는 유럽에서 난민 문제는 핵심적인 정치적 화두이다.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도 유럽의 난민 문제를 다룬 《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자음과모음, 2016)이라는 책을 냈다.

올해도 5월 28일까지 난민 2천 명 이상이 지중해에 수장됐다 지젝의 대안은 이런 난민들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킬 방안이다. ⓒ사진 출처 Ggia(위키피디아)

지젝은 옛 동구권이었던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다.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대중문화 이야기 등을 혼합해, 재치 있게 주장을 펼쳐 대중적 인기가 있는 지식인이다. 레닌을 재조명해 학계에서 레닌 관련 연구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비록 지젝 특유의 색다른 접근법 때문에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호평은 받지 못했지만 말이다.

지젝은 2001년 9·11 이후, 이를 빌미로 이라크 전쟁을 벌인 미국 정부를 비판하는 올바른 태도를 취한 바 있다.(물론 그때도 “통합된 유럽”을 통해 미국에 맞설 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이민자의 유입을 막으려는 유럽연합의 국경 통제 강화에도 반대한 바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계급투쟁》은 이런 긍정적 기여와는 거리가 멀다. 지젝이 제시하는 난민 문제의 설명과 대안은 명백히 우경적이고, 국제주의적 좌파라면 동의하기 힘든 내용이다. 지난해 12월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지난 몇 달 동안 지젝은 처참할 정도로 망가져, 그리스 시리자 정부가 유럽연합에 굴복하는 것을 어떻게든 옹호하고, 이민자와 난민에 대한 외국인 혐오적 반응에 거듭 공감을 표했다”고 지적했는데, 이 책도 처참하게 망가진 지젝을 보여 준다.

물론 이 책에서 지젝은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은 “글로벌 자본주의 동력과 군사개입”에 있다고 옳게 지적한다. 또, 책 곳곳에서 난민을 속죄양 삼는 “반 이민 극우 대중영합주의자”도 비판했다.

그러나 이 책은 국경 개방 요구를 지지하는 좌파를 주로 반박하고 있다. “열린 국경[즉, 국경 개방]을 요구하는 쪽”은 “최악의 위선자”라는 것이다.

지젝은 난민들이 유럽에 들어오면 좋지 않은 정치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난민이 유입되면 노동자 사이에서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우려가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런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이슬람 문화가 서구 문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도 크게 우려한다.

“교내 식당은 이슬람 학생에게 돼지고기 요리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돼지고기를 먹는 다른 아이들을 곱지 않게 바라본다면? 이슬람 여학생들은 수업 중 히잡을 착용해도 된다고 허락받는다. 그러나 반쯤 벌거벗다시피 한 차림으로 등교하는 다른 여학생을 본 이슬람 여학생들이 눈살을 찌푸린다면? 이슬람교는 서구 사회에서 그저 묵인될 뿐 존중받지 않는다. 어쨌든 갈등의 소지는 크기만 하다.”

이슬람에 대한 편견

그래서 지젝은 “좌파의 금기를 깨자”며 이슬람에 대한 비판을 삼가서는 안 되고, “서구의 문화적 가치(평등주의, 기본권, 복지국가)”를 더욱 분명하게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유럽에서 온갖 인종차별과 무슬림 혐오에 시달리는 난민과 이주민들에게 “서구의 문화적 가치”를 침해하지 말라니, 이런 오만함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기본권과 복지국가 같은 가치들을 굳이 ‘서구 대 비서구’의 대립 구도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랍이나 아시아 등지에서도 노동계급이 투쟁을 벌일 때마다 평등과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이런 요구들은 투쟁을 통해 확대돼 왔다.

지젝은 이슬람을 싸잡아 비이성적인 “근본주의”로 보며, “어두운 잠재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슬람 파시즘’이라는 표현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지젝은 유대교·기독교도 함께 문제 삼지만, 사회적 맥락을 도외시한 이런 추상적 종교 비판은 현실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흔한 편견을 강화하는 효과만 낸다.(이런 잘못된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는 격주간 〈다함께〉 73호에 실린 인도 출신 영국 사회주의자 탈라트 아흐메드의 기사 ‘이슬람주의, 세속주의 사회주의’와 본지 40호에 실린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과 한 인터뷰 기사를 참고하시오.)

이슬람 혐오는 오늘날 인종차별의 주요 양상이다. 이슬람에 대한 편견 어린 시각을 공유하는 것은 인종차별에 뒷문을 열어 주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젝은 “반 이민 극우” 세력을 비판했지만 사실상 그들의 핵심 전제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지젝은 난민들이 복지국가를 꿈꾸며 유럽에 오지만 이는 환상에 불과하고, 유럽에 와서 노예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지적이 난민들이 더 나은 처우를 누려야 한다는 근거가 아니라, 애초에 유럽에 오려는 기대가 헛되고 부적절하다는 근거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난민들은 잘못된 환상을 품었든 아니든 원하는 곳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가로막는 지배자들에 맞서 함께 싸우는 것이 진정한 좌파의 자세일 것이다.

이런 태도들 때문에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은 매우 우려스럽다. 그는 “위기 지역 근처(터키, 레바논, 시리아 해변과 북아프리카 해변)에 난민 수용 시설”을 세우고 군대를 동원해, “유럽 등록이 허용된 난민들을 … 체계적으로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해 난민들이 유럽 국경 개방을 요구하며 투쟁했을 때 경찰은 곤봉과 물대포를 동원해 폭력 진압했다. 군대를 동원한다면 난민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억압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또, 국경 통제와 난민 선별을 강화할수록 난민들은 더욱 위험하고 비용이 더 많이 드는 방법으로 입국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지젝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며 국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레닌의 글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는 맥락에서 떼어 내어 레닌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다.

레닌에 대한 곡해

지젝이 인용 것은 러시아 혁명이 한창이던 1917년 4월 29일 레닌이 민족문제에 관해 한 연설이다.(레닌 저작선 《볼셰비즘과 10월 사회주의 혁명》 7-1(전진 출판사)에 우리 말로 번역돼 있다.) 당시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러시아 제국주의의 억압을 받던 핀란드의 독립을 반대하며 추상적으로 “국경 철폐”라는 슬로건을 내놓자, 레닌은 이를 비판하며 억압받는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하는 맥락에서 국경 문제를 언급했다. 이런 맥락을 빼버린 채 현재 국경 개방 요구를 반대하는 근거로 인용하는 것은 정말이지 터무니없다. 이는 레닌을 민족주의자로 둔갑시키는 스탈린주의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레닌은 러시아 국수주의에 반대하며 억압받는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했다. 이런 정신을 오늘날 적용한다면, 유럽 제국주의의 국수주의, 국경 통제에 반대하며 억압받는 난민들의 이주의 자유를 지지해야 한다. 진정한 레닌주의자라면 노동자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난민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이 책의 제목은 《새로운 계급투쟁》이지만 지젝은 난민 문제를 계급투쟁의 일부로 보지 않는다. “2015년 상반기에 유럽은 주로 급진해방운동(시리자, 포데모스)에 몰두한 반면, 하반기에는 난민의 ‘인도주의적’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계급투쟁은 관용과 연대라는 자유주의적-문화적 주제에 그야말로 압도당하고 밀려났다”는 것이다. 이처럼 난민 문제는 “자유주의적, 문화적 주제”이고, 이 문제와 계급투쟁은 대립되는 것처럼 서술된다.

그러나 난민 문제는 오늘날 특히 유럽에서는 민감하면서도 계급투쟁에 중요한 문제이다. 지배계급은 자본주의 체제의 실패와, 자신들의 긴축 정책 때문에 생긴 문제를 난민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호도한다.

이런 이간질이 먹힐수록 계급투쟁은 약화되고 그 대신 파시스트와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난민을 속죄양 삼아 성장할 수 있다. 반면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의 위선을 폭로하며 난민과 함께 투쟁할 때 계급투쟁은 더욱 전진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9월 난민들이 국경 개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일 때 유럽 노동자들과 청년들의 연대도 잇따랐다. 9월 12일 하루에만 영국 곳곳에서 약 8만 명,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3만 명, 독일 함부르크에서 1만 4천 명 등이 거리로 나와 난민을 환영했다.

따라서 계급투쟁을 전진시키려면 지젝의 주장과 정반대로 국경 개방 요구를 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난민들의 투쟁과 노동자들의 긴축 반대 투쟁의 연대는 더욱 강화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최근 지젝이 보이고 있는 문제는 정세에 대한 비관에 바탕한 듯하다. 그는 책에서 “글로벌 자본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음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지금 그동안 꿈꿔온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풀뿌리 민주화 운동을 통한 모든 변화의 시도 역시 실패할 운명”이라며 대안으로 “군사화”를 제시한다.

아마도 2008년 위기 이후 벌어졌던 미국의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 등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고 사그라든 상황에 대한 실망이 커서 국가에 기대는 방향이 강화된 듯하다. 그러나 좀더 큰 시야에서 보면 결코 비관적인 상황이 아니다. 미국 아큐파이 운동이 나은 토양은 센더스 열풍이라는 형태로 변형돼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에서 대규모 노동자 투쟁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좌파는 인내심 있게 아래로부터 노동계급 투쟁이라는 대안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