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전선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다 ③ 스페인에서 노동자 혁명의 목을 졸라 버린 인민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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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프랑스에서 노동계급의 전진을 가로막았던 계급동맹 전략이 스페인에서는 노동자 혁명의 목을 직접 졸랐다.

20세기 초 스페인은 낡은 봉건적 잔재가 있었고 산업 발전이 미약했다. 봉건 영주와 귀족들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고 매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신흥 산업 자본가들이 봉건 지배계급과 단절할 의지나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저항에 나서는 것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봉건 영주와 귀족들과 기꺼이 손을 잡았다.  

그래서 스페인에서는 낡은 왕정 체제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스페인 노동계급은 20세기 초부터 혁명적 잠재력을 드러냈다. 

1909년에는 모로코전쟁에 반대하는 파업이 일어났다.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이 스페인에 저항의 불바람을 몰고 왔다. 총파업이 스페인 사회를 흔들었다. 

이 운동은 3년 만에 진압되고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독재가 시작됐다. 취약한 경제 때문에 독재는 오래 가지 못하고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다. 

스페인 민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화정을 요구하며 저항에 나섰다. 알폰소 13세가 도망가고 1931년 공화국이 선포됐다. 신흥 자본가들이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집권한 ‘공화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 주지도,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지도 못했다. 여전히 봉건적 지배자 노릇을 하는 교회를 억압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스페인은 1932년부터 경제 위기로 빠져들었다. 

이 위기를 틈타 우익들은 더 우경화한 우익연합을 결성해 1933년에 집권했다. 우익 세력들은 3년간 시늉만 낸 개혁조차 뒤엎으려 했다.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에서 광부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고 봉기를 일으키며 저항했다. 

저항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그러자 우익들 사이에선 더 극단적인 파시스트들이 성장했다. 결국 1936년 2월 선거에서 우익연합을 이기고자 인민전선이 결성됐다. 

우익연합의 반동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공화주의 자본가들과 스페인 좌파들이 동맹을 맺은 것이다. 

인민전선에는 중도우파 자본가당인 공화연합부터 개혁주의 정당인 사회당(PSOE)과 이 당과 연계된 노동총동맹(UGT), 그리고 극좌파인 공산당과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이 모두 참여했다. 

그러나 우익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계급을 뛰어 넘어 구성된 연합체가 진정으로 우익을 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곧 드러나기 시작했다. 

반파시즘 투쟁의 동학

인민전선 내각의 자본가 장관들은 온건한 개혁 조처조차 우익과 기업주들이 반발하면 뒤로 물러섰다. 

연합의 유지를 위해 좌파 정당들과 장관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감을 얻은 우익 군부와 봉건적 교회, 왕정 복고파와 파시스트들은 마침내 7월 17일에 프랑코가 이끄는 군사쿠데타를 시작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불법 쿠데타를 두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정부의 확신 없는 태도는 쿠데타 모의에 참가하지 않았던 군부와 지방정부들을 동요시켰다. 

자본가들도 갈수록 프랑코 독재를 통해 스페인 자본주의가 처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낫다는 방향으로 이끌리기 시작했다. 

공장과 토지의 옛 주인들은 도망가거나, 소유권은 보장해 줄 거라는 기대감으로 파시스트 편에 섰다.  

결국 단숨에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하려던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대를 막아선 것은 인민전선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무토지 농민들이었다. 

카탈루냐, 발렌시아 등 지역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저항을 조직했다. 

저항에 나선 노동자와 농민 들은 도시와 공장, 토지를 자주적으로 통제 · 관리하기 시작했다. 

기층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반파시즘 투쟁은 스페인에서 새로운 권력 수립, 즉 노동자 혁명을 일정에 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공산당의 계급동맹 정책이 문제가 됐다. 

POUM

이 당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트로츠키가 이끄는 국제 좌익반대파 소속이었으나 결별하면서 지지자들과 POUM을 결성했다. 이 당은 스탈린의 반혁명 정책에는 반대했으나 혁명적 경향과 개혁주의 경향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투쟁의 기회를 놓쳤다.

FAI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단체로 1백만 명이 넘는 전국노동연합(CNT)을 지도했다. 충심으로 혁명을 지지했으며 가장 전투적인 반파시즘 투사들이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대안 권력을 세우는 일에 기권해 인민전선 정부를 대체할 정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공산당은 자본가계급과 동맹해서 인민전선 정부를 유지한다는 목적에 매달리며 오히려 노동자 혁명의 가능성을 가라앉히는 구실을 했다. 

공산당은 ‘혁명은 나중이다’ 하며 노동자 · 농민에게 공장 · 토지 점거와 자주 관리를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자본가들과 동맹을 유지하려, 적당한 수준에서 투쟁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재앙적 정책은 혁명적 열기로 달아오르던 스페인 노동자 · 농민의 투쟁에 찬물을 끼얹고 김을 빼는 구실을 했다. 

결국 기층의 활력이 꺾이자 인민전선 정부는 더 노골적으로 혁명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들은 불법화되고 그 지도자들은 처형당하거나 살해됐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는 세계사의 줄기를 바꾸는 패배였다. 

1939년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군사 반란이 성공하자마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제2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을 당겼다.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 정부 지지자를 포함해 수십만 명이 학살됐고, 노동계급 투사 한 세대가 절멸했다.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노동자들이 너무 급진적으로 행동해서 반파시즘 진영이 분열하고 자본가들이 도망간 것이 패인은 아닐까?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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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인민전선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서 핵심은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를 위해 각국 공산당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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