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코 앞에 다가왔다. 현재 시각 새벽 두 시, 이제는 컨디션을 조절하면서 수능일까지 몸과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이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쉬이 잠들 수가 없다. 대한민국 수험생들 중에도 나처럼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왠지 모를 유대감이랄까, 연민이랄까 미묘한 감정이 가슴 속에 피어오른다.

고개를 들어서 시간표를 본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들여온 낡은 나무책상 위에는 노오란 포스트잇 종이 세 장이 붙어있다. 그 중 한 장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7:30~7:50 단어 외우기 8:00~8:50 외국어 영역 모의고사 9:00~10:00 언어영역 모의고사…'

수학을 너무나도 못하는 탓에 나는 언어와 외국어, 그리고 탐구영역에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계획을 세워도 지켜지지 않는 것이 다반사고, 즉흥적인 성격 때문에 내멋대로 계획을 바꾸기도 하며 심지어 졸음으로 날려버리는 시간도 존재한다. 그래도 비록 ‘남들보다 열심히’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어쨌든 수능을 향해 나도 나름 성심성의껏 달려가고 있다. 반복되는 문제 풀이, 그리고 채점. 몇 점 차이에 1등급이다 2등급이다 하면서 일희일비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다. 가끔, 나는 내가 문제 푸는 로봇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차라리 로봇이라면 좋겠다. 외우면 까먹진 않으니까!)

시간표를 보면서 문득 드는 의문이 있다. 빈틈없이 꽉 짜인 시간표, 저 속에서 짬짬이 가지는 10분의 쉬는 시간은 무엇을 의미할까? 저것은 ‘여유’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고, ‘자유’와는 아주 동떨어진 개념이다. 단지, 24시간 계획표에서 ‘쉬는 시간’이라는 또 하나의 계획이 삽입되어 있을 뿐이 아닌가?

나에게는 헌법적으로 보장된 자유가 있다. 신체의 자유가 있고, 양심의 자유가 있다. 그런데 자유롭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왜? 나는 ‘계획’이라는 포승줄에 묶인 포로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에게 계획을 세우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시간을 헛되이 쓴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는 죄악으로 취급된다. 나는 내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중간중간 쉬는 10분의 달콤함 앞에서 그것을 ‘자유’라고 지칭한다. 이런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된다.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인간인가? 더 나아가, 나처럼 빈틈없이 짜인 계획표 속에서 살아가는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본질적 의미의 ‘자유인’인가? 그렇게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내가 가지는 10분의 쉬는 시간도, 아버지가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입에 털어넣는 맥주 한 잔도, 친구와 함께 하는 게임 한 판의 즐거움도 사실은 나를 자유롭게 해 주진 못한다. 다만 그것은 나에게 일시적으로 ‘자유롭다’라는 착각을 하게 할 뿐이다.

실존주의 철학의 대명사인 장 폴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다른 모든 물건은 만든 목적(본질)이 있다. 예를 들어 연필은 무언가를 기록하기 위해(본질) 발명되었다(실존). 연필처럼 초보적 도구에서부터 우주를 탐험하기 위한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물질은 모두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반면에, 인간은, 인간만은 태어난 목적이 없다. 본질이 있기 전에 실존이 앞서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떠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간존재 본연의 질문에 대해 독자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또한, 스스로의 존재방식을 구성해간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르트르의 이러한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자유’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내가 수능을 위해 공부하는 것도, 모두 나의 존재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과정이다. 고시생들이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명문대를 향해, 대기업을 향해, 좀 더 나은 삶을 향해 노력하는 것은 모두 존재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인간이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길은 분명히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한 방향으로만 달린다. 질서 정연한 것도 아니다. 힘 있는 자가, 돈이 있는 자가 사람들을 짓밟으며 나아간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지독한 매연을 뿜으며 후발주자들의 앞길을 가로막지만, 그 매연을 뚫고서라도 어떻게든 앞으로 가기 위해 모두 밀치고 밀리며 내달린다. 매연은 갈수록 높아진다.

대열의 맨 앞에 선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무한 경쟁!’ 후발주자들은, 그러한 말들을 교조적으로 신봉하기까지하며 피 튀기는 싸움을 계속한다. 혼돈의 대열 속에서,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일으키는 희뿌연 먼지 속에서 숨이 막혀 켁켁거리면서도 대열에 낀 사람들은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라면서, 심지어 ‘당연한 것’으로 취급하기까지 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이 대열에 끼어들지 않으면 ‘낙오자’라고 불린다. 혹은 ‘배부른 자’라며 손가락질 한다. 대열에 끼어들면 ‘정상인’이 되고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비정상’이 된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자유인’인가?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지니고 있고 그 자유를 이용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경쟁한다.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사르트르의 다음과 같은 명제는 ‘자유’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보게 한다.

‘생존 수단이 존재 이유를 훼손할 때’

우리가 무엇 때문에 경쟁을 할까? 왜 경쟁을 해야만 할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생존’에 있다.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한다. 학생, 혹은 노동자인 우리들은 좀 더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혹은 좀 더 많은 연봉을 타기 위해 경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경쟁한다. 경쟁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다. 경쟁하지 않으면, 나보다 더욱 강한 힘을 가진 이가 나의 몫을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경쟁을 해야만 한다. 경쟁 속에서 강해져야만 한다.

명백히, 우리는 ‘생존 수단이 존재 이유를 위협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서 우리가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대답은 NO라고 하겠다.

자본주의 체제는, 특히 경제 위기를 빌미로 노동자들에게 내핍을 요구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본질적 ‘자유’를 박탈하고 대신 그 자리에 ‘생존’을 대입한다. 우리는 그 체제 안에서 살아가며, 끝없이 ‘경쟁하라’고 주입받는다. 생존하기 위해, 남들보다 나아지기 위해. 리영희 선생님조차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다’라고 했다. ‘인간’의 반대말을 짐승도 아니고 그렇다고 식물도 아닌, ‘노예’라고 규정함으로서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서, 과연 우리가 ‘인간’일까, ‘노예’일까? 자본에 예속되어 끊임없이 생존을 갈구해야만 하는, 그러기 위해 끝없이 남들과 경쟁해야만 하는 우리는 ‘노예’에 더 가깝지 않을까? 요즈음 벌어지는 反월가 시위, 그리고 유럽의 反긴축투쟁, 좀 더 협소하게는 삼화고속의 파업, 대학거부선언 등은 그러한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 말로만 ‘자유’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갈구하는 목소리가 투쟁의 형태로 표면에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자유’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제까지 우리가 누려온 ‘가짜 자유’들을 인식해야만 한다.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더는 ‘인간’으로 부를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또한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생존문제’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누군가는 현대사회를 ‘풍요의 시대’라며 찬송가를 부른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미래의 장밋빛 청사진을 자랑스레 제시한다. 과연 그럴까? 풍요의 시대라면, 모두가 풍요로워야 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못한 현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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