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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자본주의인가, 반자본주의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낳는 재앙을 지긋지긋하게 겪고 있다. 벌써 열아홉 명째 죽음을 맞이한 쌍용차 노동자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라 불리는 청년들, 세 명 중 한 명이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노인들 …. 이런 고통이 체제에 넓게 퍼져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경제 위기 속에서 자본주의가 낳는 비효율과 모순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가 “최근 미국에서 주택 7백만 채가 압류됐다. 그 이후 우리는 빈집과 집 없는 사람들을 갖게 됐다”고 말한 것에서 보듯 말이다.

팔리지도 않을 아파트 와 노숙자 자본주의적인 이윤 논리를 벗어나면 대안이 보인다.

장하준 교수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시장 자본주의의 실패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자유시장 정책의 결과 “미국 CEO들은 노동자들보다 3백~4백 배”나 많은 보수를 받는다. “부자들을 위한 정책은 지난 30년의 세월 동안 성장을 가속화하는 데 실패”했고, “소득 불평등”만 심화시켰다.

최근 하버드대 학생들이 《맨큐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맨큐 교수의 강의를 거부한 일도 자유시장 변호론의 파산을 보여 줬다. 학생들은 맨큐 교수의 수업이 “탐욕스런 신자유주의를 정당화한다”며 거부하고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다. 2008년 영국 여왕이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를 방문해 “왜 아무도 경제 위기를 예상하지 못했소?” 하고 질책한 일화는 주류 경제학과 학자들의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런 실패한 자본주의가 아닌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열망은 광범하다.

따뜻한 자본주의?

많은 사람들이 국가가 나서서 탐욕적인 금융자본과 기업을 통제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따뜻한 복지 자본주의를 만들자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기업도 안철수가 말한 것처럼 “영혼이 있는 기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구현하려는 사회적 기업이나, 이윤이 아닌 민주주의와 사람들의 필요를 실현하려는 생활협동조합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런 바람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근본 원리가 이런 가치와 끊임없이 충돌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해 경쟁적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체제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해 노동자들의 삶, 억압받는 사람들의 권리, 환경 등 모든 것을 희생시킨다. 게다가 더 많은 이윤을 위한 경쟁 때문에 과잉생산·과잉투자와 투기 거품이 일어나고 결국은 점점 더 깊고 회복하기 힘든 경제 위기로 빠져든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와 지금 다시 더블딥으로 빠져드는 세계경제가 바로 그것을 보여 줬다.

이 때문에 스웨덴 같은 복지 국가도 1990년대 이후 연금 제도를 개악하고, 보육시설을 축소하는 등 복지를 후퇴시켰다. 세계적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도 자본주의가 갈수록 심한 경제 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적 해법은 환상이 됐다”며 계급타협적 복지국가 모델은 지속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사회적 기업이나 생활협동조합 같은 소규모 대안 경제모델을 만들려는 시도도 자본주의 내에서는 한계에 부딪쳐 왔다. 대안 경제모델들도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수익을 내야 하므로 이윤을 위해 운영하는 다른 기업들을 닮아 갈 수밖에 없었다. 최근 원주의 사회적 기업 다자원이 지방자치단체의 민간위탁에 참여하면서 반노동자적인 일을 벌이고, 이에 맞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윤을 위한 눈먼 체제인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동안 환경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최근에는 국제에너지기구도 세계가 5년 안에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 온난화를 막을 강력한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 기회를 놓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어서 이제 점증하는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과 긴장은 미래에 핵무장 열강 간의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낳고 있다. 결국 인류는 나쁜 자본주의냐 좋은 자본주의냐의 선택이 아니라 변혁인가 야만인가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 것이다.

변혁인가 야만인가

환경을 살리고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면 이윤을 위한 경제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직접 민주적으로 생산하고 분배하는 민주적 계획 경제를 실현해야 한다. 이런 사회는 옛 소련식 관료적 지령 경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민주적 계획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장하준 교수는 “우리는 여전히 계획 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사회는 전기를 얼마나 생산할지, 전 세계에 공급하기 위해 석유를 얼마나 시추할지 등 이미 매우 많은 부분을 계획한다. 문제는 이윤을 위한 경쟁 때문에 이런 계획이 왜곡되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윤을 위한 경쟁이 없으면 자본주의에서 봤던 창조성이나 역동성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창조성의 진정한 동력은 경쟁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다. 아인슈타인은 “사회정의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열정적 감각”이 자신의 연구 동기라고 말했다. 현대 사회를 보더라도 진정한 연구 계발은 집단적인 계획과 조직을 통해 이뤄진다. 1950~80년대 미국에서도 전체 연구계발비 가운데 47~65퍼센트는 정부 지원금이다. 다수 노동자를 소외시키고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는 사회라면 더 큰 창조성이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부합해 영원할 체제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수만 년이 넘는 인류 역사에서 자본주의는 고작 4백여 년 전에 만들어진 일시적인 체제일 뿐이다.

봉건제 내에서 봉건 지배권력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 진 것처럼, 오늘날 이윤 논리에 맞서는 유럽 노동자 투쟁, 미국 월가 시위 그리고 한국의 한미FTA 반대, 복지 확대, 반값 등록금, 정리해고 반대,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을 요구하는 운동의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도 싹틀 수 있을 것이다.

30년 독재자도 3주 만에 무너뜨린 아랍혁명은 급진적인 변화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줬다.

대중이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는 단지 상상 속의 이상만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노동자·대중이 스스로 통제하고 운영하는 사회의 맹아를 봤다.

당시 노동자와 억압받던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던 파리를 두 달 동안 통제했다. 코뮌은 모든 공직자를 선출하며 매우 민주적으로 운영됐고, 야간 노동을 폐지하고 아이들에게 무상 교육을 실시하는 등 오늘날 우리도 아직 성취하지 못한 개혁을 이뤘다.

이후 1917년 러시아, 1918~19년 독일, 1956년 헝가리, 1978~79년 이란 등 체제를 뒤흔드는 혁명이 벌어질 때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민주적인 대안 권력의 모델들이 만들어졌다.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빠진 오늘날, 이런 대안은 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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