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12월, 폴란드 총리 야루젤스키는 무려 16개월 동안 폴란드 사회를 뒤흔든 연대노조 운동을 불법화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비록 쓰라린 패배로 끝났지만 이 위대한 운동은 폴란드를 포함한 동구권 국가들이 모종의 사회주의라는 거짓 주장을 통렬히 반박했을 뿐 아니라 진정한 노동자 국가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연대노조 운동의 경험을 돌아보며 교훈을 살펴본다.


1970년대 말 폴란드인민공화국은 최악의 경제 위기에 시달렸다. 국민총생산은 1979년에 2퍼센트, 1980년에 8퍼센트, 1981년에는 15∼20퍼센트가 하락했다. 불평등이 커졌다. 주택 부족과 식량 공급은 언제나 원성의 대상이었고, 정부에는 부패가 만연했다. 

1980년 7월 1일 정부가 앞으로 질 좋은 고기들은 ‘가격 자유화’ 상점에서만 구입할 수 있을 거라고 발표하자 쌓였던 불만이 폭발했다. 폴란드 산업의 대부분이 파업 물결에 휩싸였고, 이 물결은 8월 중순 그단스크-그디니아, 슈체친 같은 해안 도시들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파업 운동을 조율하는 중심은 없었다. 그러나 ‘반체제인사들’로 구성된 한 그룹, 즉 ‘노동자방어위원회’(KOR)가 중요한 구실을 했다. KOR은 주요 산업 중심지의 소규모 노동계급 활동가 서클들과 함께 소식지(〈노동자〉, 〈연안노동자〉 등)를 제작·배포했다.  

8월에 그단스크 〈연안노동자〉 그룹의 회원인 여성 노동자 안나 발렌티노비치가 레닌 조선소에서 해고되자 이 그룹 회원들은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손으로 쓴 유인물과 포스터를 조선소와 다른 몇몇 작업장들로 몰래 반입했고, 파업을 촉구했다. 대중 집회가 열렸고 조선소 관리자와 논쟁이 벌어졌다. 같은 그룹 회원이자 역시 조선소 해고자인 레흐 바웬사는 관리자 옆으로 뛰어올라 군중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점거파업이 시작됐음을 선언했다. 

파업은 인근의 다른 작업장들로 빠르게 확산됐고(역시 〈연안노동자〉 그룹 회원들이 주도적 구실을 했다), 이런 작업장의 대표자들은 레닌 조선소로 결집했다.  

며칠 만에 조선소 노동자들의 즉각적 요구들(역대 최고 수준의 임금 인상, 두 해고 노동자의 복직 등)이 수용됐다. 바웬사는 점거 종료를 발표했고, 사태는 이대로 종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레닌 조선소와 연대하고자 파업에 돌입했던 다른 노동자들은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연대 파업에 참가했던 한 시가전차 운전사가 화를 내며 바웬사를 찾아왔고 다른 모든 작업장이 성과를 얻을 때까지 조선소 노동자들도 파업을 유지하라고 요구했다. 바웬사는 바로 동의했고 점거가 재개됐다.

MKS

이것은 질적으로 새로운 발전이었다. 곧 새로운 기구, 즉 ‘기업연계파업위원회’(MKS)가 세워졌고, 이 기구에는 지역의 파업 작업장에서 파견된 모든 대표들이 참가했다. 

MKS는 ‘21개 조항’이라는 더 발전된 요구안을 작성했는데, 이 요구안은 새로운 독립적 노동조합에 대한 요구를 맨 위에 올려놓았고, 나아가 검열의 완화, 교회의 새로운 권리들, 정치수 석방, 의료 서비스 개선 등을 요구했다. 

그단스크의 새로운 조직과 요구안에 대한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정권은 그단스크와 슈체친의 MKS와 조선소에서 공개 협상을 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8월 31일 그단스크에서 정부 각료들은 ‘21개 조항’을 수용하는 문서에 서명했고 조인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운동은 거대한 작업장 점거 물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모든 파업 작업장들이 그 지역 MKS에 대표자를 파견했다. 대표자들은 집행위원회를 선출해 직접 통제했다. 정부와의 주요 협상들은 노동자 수천 명이 협상 과정을 파악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조선소 방송 시스템과 연결된 마이크 앞에서 진행됐다.

그단스크 MKS는 만들어진 지 며칠 만에 그 지역의 필수 서비스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디니아 항구에서는 절도 사건이 발생하면 범죄자들이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재판에 회부됐다.

스스로 깨닫지는 못했지만, 폴란드 노동자들은 경험을 통해 1905년에 러시아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채택했던 조직 형태, 즉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를 다시 창안해냈다. 사실상 초기 단계의 ‘이원 권력’ 상황이 시작된 것이다. 

이 민주적 노동자 국가의 맹아는 혁명적 대중 권력 기관으로 발전해 새로운 사회 질서의 토대가 될 잠재력이 있었다. MKS가 이런 방향으로 발전하려면 그 구성원들이 이런 잠재력을 인식할 수 있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1980년 폴란드에는 그러한 통찰을 제기할 만한 세력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MKS는 그러한 염원을 의식적으로 제한했다.

이원권력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미 그단스크 파업 때부터 지식인으로 구성된 ‘자문단’이 MKS 지도부 주위에 포진했는데, 그들은 주로 요구 수준을 낮추고 타협할 것을 종용했다. 보수적인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도 비슷한 구실을 했고 주요 고비마다 자제하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노조 활동가들 자신도 자제를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예를 들어, ‘21개 조항’ 합의문에는 “공산당의 지도적 구실”이 포함됐는데, 이것은 노동자들이 지배자들의 존재와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단스크 합의 3주 뒤에, 여러 MKS에서 온 대표자들이 최초로 전국 모임을 열었다. 그들은 새로운 노조 창설을 결의했고, 이를 ‘연대노조’(NSZZ)라고 불렀다. 늦가을이 되자 가입 조합원 수는 1천만 명에 이르렀고, 이는 폴란드 노동자의 약 80퍼센트에 해당했다. 

연대 의식과 자신의 힘에 대한 자각이 새롭게 강화됐다. 대중의 요구와 첨예한 지역적·전국적 투쟁들이 더욱 쇄도했다. 8월 이후 일곱 달 동안 연대노조의 물결은 계속 고양됐고, 학생과 농민 등 사회 각 부문에서 ‘연대노조’를 본뜬 자주적 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누구나 연대노조가 사태를 이끌기를 바랐다. 그러나 권력 장악 의지가 없는 운동(과 지도부)에게 이것은 딜레마였다. 노조 지도자들은 공산당과 국가의 지배라는 근본 질서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대체로 운동이 더 치고 나가는 것을 막으려 애썼다. 

연대노조를 단순히 노조로 규정하는 것이 더는 운동의 실제 성격과 맞지 않았다. 새로운 질서의 맹아이자 토대로서 낡은 질서의 수호자인 국가 기구와 정면대결을 준비해야 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비드고슈치 

1981년 3월, 농민조합, 즉 ‘농촌연대’ 합법화 요구를 지지하며 관공서를 점거한 비드고슈치 연대노조 조합원들이 경찰 2백여 명의 습격을 받아 조직적으로 구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연대노조를 상대로 노골적인 폭력이 사용된 첫 사례였다. 비드고슈치 시 전역에서 즉각 50만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3월 23일 개최된 전국대표자회의에서는 전국적 행동을 요구하는 기층의 압력이 회의를 압도했다. 회의는 3월 27일 네 시간 총파업을 벌이고 노조의 요구(책임자 처벌, 농촌연대 인정, 정치수 석방 등)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네 시간 총파업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분위기는 첨예했고, 양측 모두 결정적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각 지역의 대공장에 파업 본부가 설치돼 바리케이드들로 요새화됐다. 

공산당 정치국의 다수는 즉각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경찰과 군대를 투입해 파업을 분쇄하자고 제안했지만 총리 야루젤스키는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는 교활한 수를 썼다. 그는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추기경은 레흐 바웬사와 한 시간가량 비밀 회동을 해 직접 압력을 가했다. 바웬사는 다른 노조 지도자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정부와 비밀 협상을 벌였고, 마지막 순간 TV에 나와 파업 취소를 발표했다.

총파업의 돌연한 취소로 현장 조합원들은 사기가 떨어졌다. 그 뒤 석 달 동안 파업이 없었고, 노조 회합에 나오는 인원도 줄었다. 

쿠데타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1981년 봄과 여름에 경제 위기가 심화되고 생활수준이 악화하자 노동계급 투쟁의 새로운 분출(주로 ‘비공인 파업’)이 촉발됐다. 

그러나 연대노조 지도부의 반응은 싸늘했고, 때로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연대노조 때문에 경제가 마비된다고 정부가 비난하자, 지도부는 두 달 동안 파업을 중단하자고 촉구했다. 

온건파 지도자들에 대한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조직적 분파로서 분명한 모습을 갖추지 못했고 대안 전략을 세우지도 못했다. 

11월 중순이 되자 파업 물결이 잦아들었다. 조합원들은 점차 지쳤고, 실망감 속에서 노조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제 정권은 공공연하게 노조의 반격 태세를 시험했다. 소규모 군부대들이 시골과 소도시들로 파견됐다. 11월에는 비슷한 부대들이 공장들에 파견됐다. 

12월 2일 진압경찰(ZOMO) 수백 명이 바르샤바 소방학교 ― 연대노조 가입 권리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 로 쳐들어왔다. 이것은 군사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신호였다. 

12월 12일 연대노조 전국위원회가 그단스크에서 열렸고, 분위기는 비드고슈치 사태 이후 가장 급진적이었다. 대표자들은 파업 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때늦은 좌선회였다. 정권이 선수를 쳤다. 그날 밤 전국위원회 참가자들이 호텔에서 자는 동안 진압경찰이 들이닥쳤다. 폴란드 전역에서 연대노조 활동가 수천 명이 자다가 체포됐다. 

13일 아침 6시 야루젤스키는 군사 쿠데타를 선언하며 연대노조의 활동을 불허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글렘프 추기경은 방송에 나와 국민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노동자들의 저항(2백여 건의 파업과 점거)이 있었지만 불균등하고 산발적이었다. 며칠 뒤, 이런 저항들은 경찰과 군대에게 폭력적으로 분쇄됐다. 

최근의 경제 위기에서도 노동자 저항과 반란은 성장하고 있다. 30년 전 폴란드에서 벌어진 투쟁이 앞으로 재연될 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30년 전 폴란드 노동자들의 교훈은 그런 반란의 성공을 위한 길잡이가 돼야 한다. 

추천하는 책 :《혁명의 현실성》콜린 바커 외 지음, 책갈피


김용민은 21세기 후반 프랑스, 칠레, 포르투갈, 이란, 폴란드에서 일어난 혁명의 격변을 다룬 《혁명의 현실성》(콜린 바커 외 지음, 책갈피)의 번역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