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가 통과 된 이후,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 언론에서 이를 언급하는 기사를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만 쓰면, 내가 ‘학생인권조례’에 반대해 그것이 언급되는 것 조차 꺼리는 것 같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진심으로 학생인권조례의 통과를 기원했으며, 이 아름다운 조례가 많은 이들의 입에서 회자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누군가는 조례 통과를 ‘승리’라고 불렀을지 몰라도, 내게 있어서 조례 통과의 과정은 한국사회에 뿌리깊게 박힌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재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나 그 혐오발화가 흔히 ‘언론’이라 불리는 매체의 지면, 여기저기를 타고 흐르는 과정은, 이를 지켜보는 내게는 큰 충격이었고, 다른 많은 당사자들에게는 큰 상처였을 것이다. 어쨌든, 얼마 전 서울시 교육청의 공식적인 재의요구와 함께 나의 이런 소망은 요원하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통과된 학생인권조례의 향방과 더불어.

하지만 내가, 성소수자에 대해 혐오발화를 내뿜던 보수언론 외에 이에 대응하던 몇몇 진보적 필진의 대응에도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고 한다면 어떨까? 물론, 나는 성소수자에 대한 이들의 자세나 신념에 대해 실망을 느낀 것은 아니다. 되려 이건 수사적 문제에 가까운데, 설명하자면 이렇다. 학생인권조례안이 발의 되었을 당시, 이 조례안이 성소수자 인권보호 조항을 둔 것을 두고, 많은 보수 언론인들은 이 조례안이 ‘동성애자’를 양산한다며 비난했다. 물론, 성적 지향이 사회가 이들에 대해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는 발언은 터무니 없이 멍청한 발언이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이 ‘근거 없음’을 지적하며, 성소수자를 보호하는 것과, 성소수자가 늘어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을 지적한 무수한 글들은 매우 타당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한다고 해서 문제는 끝일까? 조례안으로 말미암아 동성애자가 늘어나는 것이 참이 아님을 입증했으니, 여기에 대해 모든 대응은 끝난 것일까?

여러분들의 경우 ‘확산 방지’라는 문구를 들으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는가?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물어, 이 문구와 함께 주로 어떤 단어들이 오는가? 핵, 빈곤, 전쟁, 소수 자본가들 배나 불려주는 빌어먹을 신자유주의 체제 등등, 주로 무언가가 ‘확산되어선 안될 무언가’로 정의 된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부정적인 의미를 띄게 된다. 그러니, 누군가 ‘동성애가 확산 될 수 있으니, 이 조례안 제정은 막아야 합니다.’라고 했을 때, 올바른 반응은 ‘단순히 보호를 제공하는 게 동성애를 조장하는 건 아닙니다.’라는 발언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좀더 근본적이고 강력한 대응이 필요했다. 바로, 왜 확산되어선 안되는가, 왜 동성애자 정체성을 수행하는 인구가 늘어나선 안되는가, 왜 동성애자인 사람이 늘어나선, 동성애자인 사람이 존재해선, 되어선 안되는 가를 물었어야 했다. 간략하게 말하면 이렇게 된다. ‘늘어나면 안되나? 늘어나면 어쩔건데!’

이는 LGBT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논점이 될 것이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맑스주의적 투쟁이 성과를 거두는 것은 노동자들 각자가, 스스로의 계급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많은 논란을 안고 있음에도, 여성운동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며 나아가는 데는, 이들이 여성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투쟁의 가시적 성과 밑에는 스스로의 정체성과 계급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자존감이 있다. 물론 이는, 내부그룹의 각성만으로 이뤄질 수 만은 없을 것이며, 단순히 슬로건을 제창하는 것 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물론, 나는 앞서 말했듯 보수언론의 혐오발화에 대응한 글과 이를 쓴 이들을 비난할 의도는 없다.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이 짜놓은 담론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주의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들을 ‘안심’시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상자 밖으로 빠져나와, 담화의 구조를 허물어 버릴, 여타 계급과 정체성의 이들이, 그들의 자부심으로 했던 질문을 다시 해야만 한다. ‘동성애자가 늘어나면, 그러면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