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한겨레〉 와 〈경향신문〉 의 이중성, 그리고 혁명적 신문의 필요성
〈노동자 연대〉 구독
최근 필자는 트위터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팔로워 수도 적고 자체 트윗만 엄청 많지만, 그리고 가끔 스스로 ‘애국 보수’라 지칭하는 분들이 나타나서 필자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트위터 상에 올라오는 정보들을 보고 토론도 하며 나름
그러다 최근에 올라오는 트윗 중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
MBC 노조 파업이 정당한가는 이 글의 논점이 아니지만, 적어도
언론의 계급성? 부르주아 언론?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언론은 중립적인 자세로 사실만을 보도해야 하는 집단이 아닌가? 이렇게 필자에게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이렇다.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위 문구는 유머 사이트에서 한때 유행하던 문구인데,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trap’
그렇다, 함정이다. 언론의 중립성은 사실 함정에 불과하다. 언론은 중립적이지 않다. 달리 말해, 언론은 중립적일 수가 없다. 언론의 중립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잠시 언론의 역사를 살펴보자.
대한민국이란 땅에서 언론이 시작한 것은 그다지 오랜 역사는 아니다. 최초의 신문은 1883년 박문국에서 발간했던, 다시 말해 정부 측이 발간한 ‘한성순보’였다. 민간 자본 측에서는 ‘독립신문’이 최초로 발간됐고, 그 후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이 발행되면서 언론의 춘추전국 시대가 열렸다.
필자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던져본다. “왜 언론이 중립적이어야 하는가?”
언론은 반드시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 그것은 영원불멸의 법칙이다. 사람들의 눈과 귀와 입이 돼 주는 언론이 만약 거짓된 정보에 기반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의 사실과는 별개로 언론이 ‘중립적’이라는 데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여러 개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흔히 중립을 표방하며 들고 나오는 것이 ‘양비론’이다. 그러나 양비론은 ‘중립’이 아니다. 양비론은 단순히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준’이 존재한다면 ‘관점’ 역시 존재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언론은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중립’은 불가능하게 된다.
최근 몇몇 언론의 ‘편파성 보도’에 따라 수많은 비판이 쏟아져 나오는데 사실 언론은 ‘중립성’의 함정 때문에 ‘중립’일 수가 없다. 따라서 언론은 필연적으로 ‘편파적’이다.
당장 조선 시대에 나온 언론들만 보더라도 언론이 편파적일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한성순보’는 정부가 발간한 것이고, 또한 관보적 성격을 띠었기에 친정부적이었으며, 사용한 글자 역시 한문, 즉 친유생적이었다. ‘제국신문’의 경우 부녀자를 주로 대상으로 했기에 한글을 사용했다. 당장 두 개의 신문만 놓고 보더라도 언론의 ‘계급성’이 드러나는데 하물며 오늘날에서랴.
오늘날 조중동과
그러나
비록 사원대주주제 등을 통해 자본의 논리로부터 최대한 자유롭고자 노력한 흔적이 면면히 엿보이기는 하지만, 기성 언론으로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더욱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자본의 논리에 부분적으로나마 순응할 수밖에 없다. 또한 기성 언론이라는 점은 독자들의 참여 수준을 일정하게 제한하기도 한다. 독자들의 참여가 제한된다는 부분은 신문으로써 굉장히 치명적인 약점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계급적’일 수가 없는 이유이며 부르주아 언론의 ‘한계’다.
진보언론으로서
기존 언론들의 이중성과 한계로부터 우리가 또 한 가지 이끌어 낼 수 있는 교훈은 바로 ‘양비론’적이지 않고 ‘이중적’이지 않으면서 노동자 계급을 대변해주는
지노비에프는 1921년 코민테른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부르주아 신문과 사회민주당 신문들이 제공해 줄 수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공장과 작업장에서 남녀 노동자들이 보내거나 또는 병사들이 보내는 편지다.”
하먼 또한 이를 인용하면서 “노동자 대중의 생생한 경험들을 표현”하는 신문이야 말로 “노동자들을 위한 신문이자 노동자들의 신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인용 - 『혁명적 신문의 구실』, 김승주)
흔한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