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선거에서 지역주의 때문에 민주통합당의 영향력은 호남에 국한됐고, 영남에서는 새누리당이 득을 볼 수 있었다.

계급투쟁 수준이 높지 않은 시기에 지역주의는 더 크게 작용한다. 특히 낙후하고 후진적인 지방에서는 지역주의가 크게 작용한다. 게다가 “영남 정권”, “영포라인”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명박 정부는 지역주의를 계속 부추겨 왔다. 

이 글은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지역주의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지역주의는 정확히 말하면 “호남인”(호남 출신 타지역 거주자인 사람까지 포함하는 말로 외연이 지나치게 넓다)에 대한 차별 문제다.

호남인 차별을 왕건의 훈요십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그릇된 주장이다. 일제 시대 고등계 형사들이 작성한 독립군 자금원 지도는 곡창 지대인 호남에 부자들이 훨씬 더 많이 살고 있었고 일제는 이들을 달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호남인 차별은 1970년경 박정희가 김대중과 경쟁하기 시작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는 1963년에 군장성과 정부 고위 관료와 특히 대구·경북 지역의 자본가들을 모아 새로운 국가 기구들을 구축했다.(바로 그래서 1997년 대선을 통한 정권 교체를 “34년 만의 일당 국가 붕괴”라고 보는 것이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고립시키고 자본가들을 분열 지배하기 위해 호남인 멸시를 조장했다. 전두환 정권도 이 전략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하지만 모순이 잉태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수입한 기계로 제품을 만들어 미국 시장으로 수출한다’는 말로 요약되는 한·미·일 삼각무역에 주로 의존한 경제 성장은 섬유·경공업 중심의 공업화에서 중화학 공업화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부산·경남(특히 울산·마산·창원) 지역 자본가들이 성장했다. 김영삼은 바로 이 지역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대중 파업 이후 폭발적으로 고양된 노동자 운동을 위협 수단으로 사용해 김영삼은 군부와의 협상에 성공하고 ‘3당 합당’을 이룬다(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의 탄생).

이간질

그는 1991년 봄 강성 우파 총리 노재봉을 앞세운 군부의 반동 시도에 직면해 곤경을 겪었으나, 강경대 열사 치사사건을 계기로 다시 폭발한 항의(“분신정국”)에 부딪힌 군부가 후퇴함으로써 이듬해 민자당 대선 후보가 된다.

호남인이라 해서 30년 가까이 지배 계급 내에서 배제당해 온 김대중은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1월 중순까지 김영삼 정권을 뒤흔들어 놓은 “노동법 파업” 덕분에 그해 대선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영남 지역주의의 아성을 깨뜨리고 최초로 노동자당의 당선을 이끈 민주노동당 권영길 전 대표 지역주의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지역을 초월한 노동계급의 단결 뿐이다.

군부 출신 독재자들이 출신지를 따져 야당 정치인들을 고립시키고 권력에 접근할 기회에서 배제하려 애쓰는 동안 그 정치인들은 자기들 나름의 지역주의를 개발했다. 지역주의가 지배 계급을 분열시키는 한편으로, 특정 지역 지배자들과 그 지역 노동자들을 통합시키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주의는 한 지역의 노동자와 다른 지역의 노동자를 서로 이간시킨다. 지역주의는 지배 계급도 분열시키지만 노동계급도 분열시킨다. 그리고 해당 지역에서 계급 협력주의를 조장한다.

이것이 자신에게 이롭도록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김영삼·김대중에 이어 김종필이 가세했고, 이회창도 그랬다. 더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면 훨씬 더 많다.

지역주의가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해당 지역의 계급 화해를 고무하므로, 권세가들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은 지역주의에 애착을 느낄 수밖에 없다.

지역주의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출신 지역을 초월한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뿐이다. 1987년 6∼9월 이래 성장한 대중적 노동운동의 지지를 받는 진보정당들이 지역주의 문제로 골치 썩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최근 통합진보당이 광주·전남에서 민주당의 기반을 잠식하기 시작한 사례도 이것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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