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편지

 

《노동자의힘》의 세계사회포럼 평가는 부정확

 

김어진

한 가지 사실을 둘러싼 다양한 평가는 서로가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서로가 보지 못한 이면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기 위해 때때로 논쟁도 필요하다. 나는 기관지 《노동자의힘》 48호에 실린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평가 글들을 읽고 그런 논쟁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원영수 씨는 포럼의 규모가 컸다고 잘 지적한다. 전체 규모는 3차 포럼 때보다 컸다. 인도 조직위원회의 평가로 12만 명이 참가했다. 형식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했지만 “좌경화”했다고도 옳게 지적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표현보다는 제국주의적 세계화라는 슬로건이 주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체로는 부정적 평가 일색이다. 이런 평가의 근거는 사실의 검증을 통과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어, 원영수 씨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포럼 자체의 조직화 과정이 엉성”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번 포럼이 매우 잘 조직됐다는 평가가 오히려 지배적이다. 야외텐트 천정에 매달린 선풍기들은 감동적이었다. 자원봉사자 조직도 훌륭했다. 뭄바이의 프란시스 자비에로 대학의 많은 학생들이 자원봉사를 했다. 서점, 기념품, 각종 인쇄물 등이 다양하게 진열된 가판 조직도 훌륭했다. 작년(포르투 알레그레)에 참가한 경험을 돌이켜 보면 훌륭한 조직이었다.

원영수 씨는 “브라질에서 제기되었던 사회포럼의 상업화 제도화의 위험성이 뭄바이에서 더욱더 증폭”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재정 운영 사례를 든다 해도 이 지적은 적절하지 않다. 작년 브라질 조직위의 경우 기업에서 돈을 받아 재정을 마련했다. 큰 행사장에 BR이라고 쓰여진 큰 기둥이 단지 브라질의 줄임말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브라질석유’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떠오른다. 올해 뭄바이 세계사회포럼의 경우 재정 운영은 작년에 비해 크게 진보했다. 약 40억 원 가까이 소요된 기금은 정부나 기업한테서 나오지 않았다. 40퍼센트가 참가자들의 등록비에서 나머지는 각종 시민단체의 기부금으로 마련됐다.

원영수 씨는 이번 포럼의 내용이 떨어졌다는 근거로 “토론(컨퍼런스/패널)과 워크숍의 참석자 규모가 과거의 1/2 또는 1/3 수준에 머물렀”던 점을 꼽았다. 그러나 이 평가는 주관적이다. 어떤 컨퍼런스는 수천 명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정당과 사회운동’이라는 주제의 패널 토론에는 4천여 명이, ‘세계화, 경제, 사회보장’의 경우에는 5천 명 이상이, ‘여성과 전쟁’에 6천여 명이 모였다. 물론 1백여 명 정도가 고작이었던 포럼도 있었다. ‘WTO’라고만 돼 있던 제목의 컨퍼런스가 그런 경우였다. 그 글에는 왜 참가자 규모의 차이가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없다. 워크숍도 마찬가지였다. 썰렁한 워크숍도 있었다. 그러나 자리가 모자라 많은 사람들이 텐트 밖에서 토론을 경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영수 씨는 이번 포럼이 정작 인도 민중과는 괴리됐다며 “인도 참석자들이 토론에 참여하기보다는 행사장 내의 행진이나 자체 홍보 활동에 주력한 결과”, “인도 운동에 대한 이해와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분위기를 형성했다”고 말한다. 즉, “지나치게 인도적인 색채”였지만 “정작 인도 운동에 대한 이해나 소통을 위한 진지한 노력과 준비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모순이다. 인도 참가자들의 행진 등 자체 홍보 활동이 많았다면 인도 운동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것 아닌가. 실제로 인도의 다양한 운동 세력들이 “카스트를 내던져라”, “다른 아동기는 가능하다” 등을 외치며 행사장 내를 행진한 덕분에 인도의 사회 운동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1천8백 명의 인도인들로부터 연락처를 받고 서로 3·20을 건설하자고 결의했던 한국 참가자들도 있었다. Z-Net에는 달리트들과 여성, 농민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힌두어·타밀어로 자신들의 슬로건을 외치면서 행진함으로써 인도 사회운동이 아주 잘 대표됐다는 평가 글들이 올라와 있다.

인도 조직위도 “인도의 가장 큰 문제점인 카스트 제도, 가부장제, 종단주의가 전면적으로 드러났고 민중과의 만남이 가능한 행사”였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노동자의힘》에 실린 평가들은 지나치게 제3자 관찰자 시점이다. 1인칭 시점으로 생각해 보자. 한국의 좌파가 조직한다면 어떨까? 한국의 대도시 어디에선가 10만여 명이 모여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외친다면 그 자체로 얼마나 멋질까? 만약 그것을 놓고 포럼이 전체 한국 민중과 유리됐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처럼 황당한 주장도 없을 것이다.

이상화한다는 반론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 없는 평가 절하에 맞서서 인도 세계사회포럼을 방어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독자 편지 2

 

지난 호 신문에 실린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평에 이견이 있다.

“6·25라는 전쟁의 역사적인 맥락이 완전히 무시”됐다고 했는데 나는 이 영화가 우익에 의한 보도연맹원 학살과 민간인·포로 학살을 사실적으로 잘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남북한 민중이 지배자들에 의해 아무 의미없는 전쟁에서 서로를 죽이며 증오하게 되는 것을 부족하나마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분명 전쟁의 개인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전쟁이 어떻게 평범한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고 삶을 파괴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주연배우 장동건은 “전쟁이라는 게 누구를 제압하기 위해서라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라크 파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평화라는 말을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아마 이에 공감하는 관객들도 꽤 많을 것이다. 이런 정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재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