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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카스테라 논란에 부쳐

2006년에 맑시즘에 참가했던 한 연사가 연사비 대신에 카스테라를 받았다는 트윗을 올렸다. 이 연사는 딱히 맑시즘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교환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가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누군가가 쓴 트윗은 곧 일파만파 퍼졌다. 그 일이 있던 금요일, 나는 진행팀이었는데, 일을 하다가도 불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맑시즘”을 검색해보곤 했다. “빵함께” “카스테라가 새로운 화폐 단위” 같은 비아냥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연사 페이지에 “더운 날씨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연사비 없이 맑시즘에서 연설해주시는 많은 연사분들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추가된 것이 주최측의 대응이었다. 이 사건은 경향신문에 기사로까지 올랐고, 나는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심기가 불편했다. 정확히는 무서웠다. 맑시즘 기간 내내 여러 사람들과 이 문제에 대해서 얘기해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보기도 하다가 내 머릿속에서는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 동지들과 논의해보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연사에게 연사비를 지급해야 하는가?

맑시즘에 와서 강연을 하는 연사들의 많은 수가 강연을 업으로 삼고 있는 연구자라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연단에 오르는 모든 사람들이 강연을 업으로 삼고 있는 연구자는 아니다. 맑시즘에서 열리는 어떤 토론은 ‘강연’이 목적이 아닌 서로 다른 경향의 활동가들이 모여서 운동의 방향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것이 목적인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국회의원 등이 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에게 5만원 정도의 돈을 주면서 오라고 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고 누구는 주고 누구는 주지 않는 건 매우 이상하다.

더구나 맑시즘에 강연을 하기 위해 오는 연사들은 맑시즘을 “수익 창출을 위한 창구”로 생각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 이 이야기를 꺼낸 안영춘 연사도 그렇고, (나중에 그 점을 반성적으로 평가하긴 했으나)“문제의식이 없었다”고 말한 하종강 연사도 비슷한 맥락이었다고 보인다. 이것을 노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처음에 나는 “노동”이라는 지칭이 매우 불편했다. 나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이틀 내내 녹초가 되도록 진행팀 일을 했다. 누군가 내가 “무급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난 분명히 발끈할 것이다. 내게는 이 일이 “자의식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반응으로 미루어보건대 안영춘 연사와 하종강 연사도 그렇게 생각하고 왔던 것이리라. 안영춘 연사의 말대로 “교환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명한 사전합의이다. 우리는 사전에 연사와 합의해서 이를 진행시키고 있는가. 물론 연사비가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모르고 오는 연사는 매우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분명하게 적시했는가. 트위터에서 이에 대해 제일 처음 문제제기를 했던 안영춘 연사의 지인은 그가 확인해 본 세 명의 연사가 모두 “제대로 된 사전합의가 없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어련히 알려니” 하는 게 아닌,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친 사전합의가 있어야 한다.

사실 돈 준다고 오고 돈 안 준다고 안 올 그런 토론회도 아니다. 더욱이 위에서도 말했듯이 맑시즘에 연사로 참여할 정도가 되는 이들의 진보적 자의식이 그렇게 허약한 수준도 아닐 것이다. 이들에게 연사비를 주지 않는 이유를 충분히 의식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우리가 호소하고 있는 것이 경제적 이유가 아닌 당신의 자의식이라고. 다른 강연들과 달리 이곳에서 자의식적으로 연설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게 말해야 한다. 당신의 자의식에 돈이 아닌 다른 종류의 “예의”를 표하는 우리의 자의식에 대해서도.

그런 의미에서 연사 페이지 밑에 “더운 날씨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연사비 없이 맑시즘에서 연설해주시는 많은 연사분들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붙이는 건 너무 소극적인 대응이었다. 제대로 된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활동이 노동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서, 연사에게 제대로 된 연사비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의구를 갖는 대중들의 생각은 종파적인 것도 반동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가질 수 있을만한 의문이다. 강연료를 지불한 사람들은 이 강연료의 일부가 당연히 연사에게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직을 해 본 다함께 회원들이라면 수많은 대학생들이 “배우고 싶어서” 라는 이유를 대면서 맑시즘에 찾아온다는 것을 알 것이다. 주최측은 이 사람들의 의문을 해결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맑시즘 2013에서는 홍보단계에서부터 이를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연사들이 돈을 받지 않고 자의식적으로 맑시즘에 참여한다는 사실부터가 맑시즘이라는 행사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포스터에도 리플릿에도 연사들에 대한 감사표시와, 연사들이 돈을 받지 않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야, 모든 사람들이 맑시즘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대해 주목할 것이다. 소극적인 대응은 무언가 거리끼는 게 있지 않은가, 혹은 사람들을 설득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여러 가지 의문들을 일으킬 것이다. 맑시즘은 개방성을 커다란 장점으로 가지고 있는 행사다. 토론과 행사가 아닌 다른 면에서도 지금보다 더 개방적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