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사회주의노동자당(SEK)의 활동가인 소티리스 콘토야니스가 지난 7월 노동자연대다함께가 주최한 ‘맑시즘 2012’ 참석을 위해 방한했다. 이 글은 콘토야니스가 7월 27일에 강연한 ‘유럽연합과 유로의 미래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녹취한 것이다. 유럽연합의 본질과 구실, 저항의 과제에 관한 분석은 심화하는 유럽 경제 위기 속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유럽연합의 기원은 19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에는 유럽연합이 아니라 유럽석탄철강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범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일종의 자유무역지대로 철강과 석탄만을 취급했다. 당시 회원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이렇게 6개국뿐이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창립 문건은 당시 프랑스 외무부 장관 이름을 따서 슈망 선언이라고 불렸다. 슈망 선언은 이 자유무역연합이 마치 평화를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인 것처럼 포장했다.

슈망은 “세계평화를 달성하려면 그 평화를 위협하는 요인에 상응하는 만큼의 창조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석탄철강공동체는 사실 평화와는 전혀 무관했다. 오히려 유럽연합은 언제나 제국주의적 기관이었다.

슈망이 평화를 위협하는 두 가지 요인으로 석탄과 철강 산업을 지목한 것은 일리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을 보더라도 영국, 독일, 프랑스의 석탄·철강 기업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철도노선을 지으려고 했던 것이 1차 대전 발발에 상당히 큰 구실을 했다.

그러나 석탄과 철강 기업주들은 경쟁을 중단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경쟁에 맞서서 좀더 든든한 국가 연합의 힘을 빌리고자 유럽석탄철강연합을 만들었다. 결국 유럽석탄철강연합은 서방의 냉전 동맹의 일부분이었다. 그래서 유럽석탄철강연합도, 또 그것을 1950년대 말에 계승했던 유럽공동체(EC)도 미국의 지지와 후원을 등에 업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에 미국과 EC 간에 어떤 갈등이나 경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는 단지 강력한 국가가 약소국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들 간의 위계질서를 말한다. 그 위계질서 내에서는 한편으로 갈등과 반목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조와 협력도 있다. 그래서 EC와 미국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고 심지어 EC 내에서도 핵심국인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전리품’ 챙기기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옛 소련이 패망하자 EC는 유럽연합으로 이름을 바꿨다. 냉전이 끝나자 서방 강대국들은 옛 동구권을 약탈하고 산산조각 내서 각자 전리품을 챙길 기회를 맞았다. 유럽연합이 창설된 것은 주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였다. 1990년에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했다. 2004년에는 옛 소련 위성국 8개국이 유럽연합에 가입했고, 3년 뒤에는 불가리아, 루마니아도 합류했다.

그런데 그와 더불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도, 전쟁도 함께 확대됐다. 예컨대 유고슬로비아는 7년간 끔찍한 내전을 겪었는데, 이 내전은 결국 나토 군의 폭격으로 막을 내렸다. 요컨대 유럽연합은 국가도 아니고 나프타(NAFTA) 같은 무역블록도 아니다. 그것은 악랄하고 호전적이며 피로 얼룩진 제국주의적 연합이다.

유럽연합은 시장근본주의와 극단적 신자유주의의 보루이기도 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연합국들은 추축국들을 상대로만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자국 노동계급에게도 전쟁을 선포했다. 그래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보내서 죽였다. 마찬가지로 경제 위기 시대에 유럽연합도 회원국 노동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래서 지금은 긴축정책 기조가 모든 회원국에서 대세로 자리잡았다. 3월에 유로존은 ‘유럽 국가들은 재정 적자를 단 한 푼도 내서는 안 된다’는 신재정협약 체결에 합의했다. 이것은 복지국가에 대한 엄청난 공격이다.

이런 공격적인 신자유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 바로 유로화다. 2002년에 도입된 유로화는 유럽 지배자들이 시도한 가장 야심차고 공격적인 프로젝트였다. 유로화를 도입한 주된 목적은 세계시장에서 달러화와 경쟁할 수 있는 기축 통화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달러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서방세계에서 사실상의 기축 통화로 떠올랐다. 미국 지배계급에게 이는 대단한 이점이었다. 해외에서 뭔가를 수입할 때 돈이 부족하면 달러를 찍어 내기만 하면 됐으니 말이다. 마치 매장량이 무한한 금광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런 금광이 있다 해도 아무 때나 금을 캐내서는 곤란하다. 금을 너무 많이 파내면 국제시장에서 금값이 폭락해서 결국 가치가 없어질 테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달러화가 바로 다음 날 평가절하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면 세계의 어떤 중앙은행도 달러화로 외환보유고를 비축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통화가 기축 통화 구실을 할 수 있으려면 그 통화의 가치가 보장돼야 한다. 미국의 경우 여차하면 군사력을 사용해서라도 달러화의 가치를 보장할 수가 있다. 요컨대 어떤 나라가 달러화의 가치를 위협하는 짓을 한다면 미국은 그 나라를 폭격할 수 있다.

반면 군사력으로 미국을 따라가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유럽연합은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에 의존한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존재 목적도 유로화의 안정성을 지키는 것뿐이다. ECB는 정부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다. 다른 나라의 경우 중앙은행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구실은 돈이 필요한 기업들이나 정부가 다른 어디서도 돈을 조달할 수 없을 때 최후의 대부자 기능을 하는 것이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FRB)은 돈을 찍어내서 그 돈으로 정부의 국채를 사들이는 식으로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를 메운다.

반면 ECB는 국채 매입 권한이 없다. ECB는 단지 민간은행들한테만 돈을 빌려줄 수 있다. 그런데 민간은행은 국채를 매입할 수 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유럽의 민간은행들은 엄청난 이윤을 누렸다.

그들은 ECB로부터 1퍼센트의 금리로 돈을 빌린 다음 그 돈으로 국채를 사들였다. 그런데 스페인 국채는 수익률(금리)이 7.5퍼센트, 이탈리아는 6퍼센트, 그리스의 경우 25퍼센트다. 이런 식으로 엄청난 금리 차이를 이익으로 챙긴 것이다.

이런 시스템은 경제 위기 이전에는 유럽 지배계급 전체에게 이득이 됐다. 하지만 이 시스템 속에서 유로화는 심지어 유럽 국가들에게도 본질적으로 외국 통화와 같은 기능을 했다. 이 때문에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에는 사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최후의 대부자 구실을 할 수 있는 중앙은행이 없는 상황에서 유럽연합은 악순환에 빠졌다. 모든 유럽 국가에서 은행 예금은 정부의 지급보증을 받는다. 문제는 정부들 자신이 빚을 지고 있고, 그 빚을 갚으려면 결국 (정부의 예금 보증을 받는) 은행들의 대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탈출구

과연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있는가? 이와 관련해 유럽에서는 (심지어 좌파들 사이에서도) 몇 가지 해결책들이 거론되고 있다.

먼저 ‘유로본드’를 발행하자는 안이 있다. 유럽 국가들이 공동으로 국채를 발행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나 스페인 같은 나라들도 유럽 공통의, 더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안은 위태로운 나라들에 구제금융을 제공하기 위해서 조성된 기구인 유럽안정화기구(ESM)를 은행으로 전환시켜 마치 중앙은행과 같은 위상을 부여하자는 안이다. 만약 ESM이 은행으로 전환한다면 이 은행은 다른 유럽 은행들과 마찬가지로 ECB로부터 1퍼센트 금리로 돈을 빌려 올 수가 있다. 그래서 만약 ESM이 은행으로 전환한다면 ECB로부터 1퍼센트 이하의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서 그걸 다시 위험한 나라들의 국채를 매입하는 데 쓸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구상에는 유로존이 돈을 더 많이 찍어내 인플레이션을 통해 이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공공연하게 이 안에 반대하고 있다. 메르켈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유로본드 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인플레이션을 통한 경제 위기 타개책에 반대하는 것은 비단 메르켈만이 아니다. 거기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미국 연준 의장 벤 버냉키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이 사실상 돈을 찍어내서 시중에 푸는, ‘양적완화’ 조처였다. 지금까지 두 차례 양적완화 조처가 시행됐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미국에서 실패한 정책을 유럽연합이 뭣 하러 모방하겠는가?

둘째 이유는 1970년대의 경험 때문이다. 1970년대 거대한 경제 위기 때도 각국 정부들이 돈을 더 많이 찍어내서 위기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한동안 세계경제는 스태그네이션과 인플레이션이 함께 가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었다. 10년을 끈 스태그플레이션에서 지배자들이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에 대처와 레이건이 수행한 ‘혁명’, 즉 노동계급에 대한 악랄한 공격 덕분이었다. 30년 전에 이렇게 실패한 정책을 누구도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셋째 이유는 유럽 지배자들이 유럽연합과 유로화 가운데 어느 것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만 봐도 그렇다. 유로화 덕분에 그리스 은행들과 기업들은 발칸반도로 대거 진출했다. 유로화의 구매력 덕분에 그들은 발칸반도에서 민영화하려고 내놓은 공기업 등 각종 자산을 헐값에 쓸어 모았다.

결국 그리스 경제 전체가 발칸반도를 이렇게 수탈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에 완전히 적응이 되면서 예전에 수익성이 있었던 산업들을 포기하거나 폐쇄했다. 예전에는 그리스의 식량자급률이 1백 퍼센트 이상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설탕 공장들도 유럽연합의 지시에 따라 폐쇄됐다.

그리스 좌파 일부는 그리스 지배자들이 옛날 국민 산업이었던 설탕 공장 등을 폐쇄하고 팔아 치웠다는 이유로 지배자들을 ‘매국노’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은 ‘매국노’가 아니다. 1980년대에 마가렛 대처도 영국의 전통적 산업으로서 수십만 명을 고용하던 자동차 산업을 폐쇄했는데, 그것은 런던을 세계적 금융 허브로 만들기 위해서였지 ‘조국을 배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 지배자들도 아테네를 발칸반도의 중심 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지배자들도 똑같이 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유일한 선택지는 앞으로 돌진하는 것, 즉 노동자들을 살벌하게 공격하고 긴축을 강행하는 것이다.

반란의 물결

그렇다면 이들의 시도는 과연 성공할 것인가? 얼핏 보기에는 가능성이 없다. 이 위기 자체가 유럽만의 위기가 아닌 세계적인 위기고, 또 그 근저에는 마르크스가 말한 이윤율 저하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여부는 결국 그들에 맞서는 대중 운동에 달려 있다.

 유럽 지배자들이 만약 유럽 노동자들의 임금을 중국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면, 비록 야만의 시대가 도래하긴 하겠지만 어쨌든 위기는 잠시나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스만 해도 이미 2년 동안 전 국가가 반란 상태에 있었고, 이 반란의 물결이 이제 스페인으로 전염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반란은 정치적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그리스 좌파들은 모두 합해 38퍼센트를 득표했다. 

불행히도 이들 좌파의 지도자들은 유럽연합이나 유로화 문제에 대한 관점이 불분명하다.

그리스의 원내 좌파 중 가장 큰 정당인 시리자는 현재 유럽연합과 유로화 자체를 지지한다. 시리자는 자신들이 집권하면 유럽연합과 잘 협상해서 그들의 재앙적인 노선을 바꿔 보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다. 이는 제2인터내셔널의 방침과도 비슷하다.

즉, 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사민당의 카우츠키와 힐퍼딩, 베른슈타인 등이 독일 제국주의를 편들며 전쟁을 찬성하고 나선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 이론에 따르면 1차 대전은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었다. 대기업들이 국제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초제국주의’ 시대에는 더는 강대국들이 서로 충돌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전쟁이라는 구시대의 유물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라는 논리였다.

시리자도 유럽연합과 유로화에 대해 이와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다.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은 역사에 의해서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 입증됐다. 그런데 부분적으로는 그런 잘못된 관점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선의 참호에서 조국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죽어 나갔다.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되도록 놔둬선 안 된다. 그래서 그리스의 안타르시아(혁명적반자본주의연합체)는 유럽연합에 분명하게 반대하며 유로존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주장을 분명히 했다.

득표율로만 치면 안타르시아는 시리자보다 훨씬 더 규모가 작지만 실제 거리에서, 작업장에서의 힘은 훨씬 더 강하다. 일례로, 대학 학생회 선거에서 시리자 학생그룹은 7퍼센트를 득표한 반면 안타르시아 쪽 학생 그룹은 11퍼센트를 득표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유럽연합이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예견한다. 만약 유럽연합이 실제로 붕괴한다면 단지 “단일 통화”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그 끔찍한 긴축을 견뎌 왔던 수많은 노동자들에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을 때 독일 노동자들이 겪었던 충격과도 비슷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1차 대전 직후에 독일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혁명이 유럽에서 곧바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유로존 붕괴를 단언하는 것도 아니다.

혁명가의 구실은 마치 점쟁이처럼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다. 만약 이상의 분석이 옳다면 우리 앞에는 실로 엄청난 격돌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와 유럽뿐 아니라 한국,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서 거대한 한판 승부가 다가오고 있다.

정리발언

진정한 문제는 그리스 자본가들이 결국 망하게 될 사업에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직장을 걸고 투자를 했다는 것이다. 투자 자금을 조달하려고 그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결국 그렇게 투자한 실물 자본은, 즉 공장을 짓고 생산을 하는 데 들어간 자본의 가치는 증발해 버렸다. 그러나 돈을 빌려 준 은행들은 이제 빚을 돌려 받으려고 혈안이 돼 있다. 달리 말하면, 비록 실물 자본은 죽었지만 가공자본은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의 피를 빨아 먹으려 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과연 좌파들이 어떤 구체적인 요구들을 내세워야 하는가, 어떤 강령을 채택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개혁주의적 관점이다. 즉 자본주의를 조금 고쳐 쓰자는 관점이다. 둘째는 바로 혁명가들의 관점으로서, ‘이행기적 요구’를염두에 둔 관점이다.

우리가 주장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후자다. 자본주의에서 대안적인 체제로의 이행을 촉진할 수 있는 요구, 즉 이행기적 요구를 제기해야 한다. 우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경제 발전이 아니라 운동의 발전이다.

이행기적 요구

이행기적 요구의 직접적인 목적은 긴축 정책 등이 강요하는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행기적 요구가 실현된다면 그런 상황과 자본주의 체제가 오랫동안 양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디폴트 요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른바 ‘구제’ 금융의 목적은 남유럽 국가들의 부채에 심하게 노출돼 있었던 유럽 은행들, 특히 독일과 프랑스 은행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그리스 은행들의 경우, 그리스 주식시장에 가면 그리스의 모든 은행을 30억 유로에 매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은행들이 구제금융으로 지금까지 받은 돈이 1천억 유로가 넘는다. 그런데 이제 또 5백억 유로를 더 받을 참이다. 디폴트를 요구하는 것은 곧 이 은행들에 단 한 푼도 더 퍼 주지 말자는 얘기다.

만일 그리스나 포르투갈이 디폴트를 하게 된다면 다른 유럽 은행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의 운동이 고립될까?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그리스가 겪고 있는 문제는 유럽 노동자들이 똑같이 겪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민중이 들고 일어나 은행들에 대한 퍼 주기를 중단시키면 모든 유럽 노동자들의 승리가 될 것이다.

유로화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그리스가 만약 유로존을 탈퇴한다면 그것은 운동의 힘에 떠밀려서일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옛 드라크마화를 복원함으로써 소박하고 인간적인 그리스 자본주의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유로존 탈퇴는 결국 그리스 기업주·은행가들, 독일과 프랑스 은행가들에 맞선 전쟁 선포가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에게 전쟁을 선포하면 그들도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것이다. 예컨대 금융 투기꾼들은 드라크마화의 가치를 최대한 떨어뜨리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전쟁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밀어붙여야지 중간에 어정쩡하게 멈춰선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도 결코 금융 투기꾼들이 그리스 통화로 투기를 벌이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그리스와 유럽 자본가들에 맞서서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리스 노동자들이 고립되기는커녕 국제적 연대가 확산되면서 운동이 유럽 전체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우리는 이 전쟁에서 조국이 패배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가 진다고 해서 다른 나라가 이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노동자들이 ‘조국’ 정부를 타도하면 ‘적국’ 노동자들도 자기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고무받을 것이라고 레닌은 믿었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제 러시아는 독일의 침략을 받아 패망하겠구나!”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일 제국주의가 독일 혁명에 의해 분쇄됐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 지배자들, 은행가들이 파산해서 무일푼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스가 앞장서서 그렇게 하면 스페인,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나아가 전 유럽의 노동자들도 그리스의 선례를 따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복지가 너무 잘 돼 있어서 그리스가 지금 이 지경이 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재 그리스 예산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항목은 은행들에 지급되는 이자다. 현재 그리스의 대형은행 7개와 유럽 은행 서른 개가 그리스 공무원 전원과 연금 생활자들이 받는 것만큼이나 많은 돈을 이자로 챙겨가고 있다. 그리스 민중이 아니라 은행들을 위한 복지가 너무 잘 돼 있었던 것이다.

‘공포심 유발 캠페인’

지난 2년 동안 그리스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파업이 일어났다. 그래서 총선 중에 안타르시아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리스 금융권에서 돈이 계속 새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은행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것이다.” 총선 기간에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려는 테러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선 기간 중 그리스의 모든 주요 언론과 보수 정당들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했다. “만약 좌파가 득표를 더 많이 하게 되면 우린 끝이다. 우리는 유로존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고 대재앙에 빠질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의 과반수가 아직까지도 유로존에 남는 것을 지지하는 이유는 이런 공포심 유발 캠페인 때문이다.

한편에는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대학교수들, 지식인들이 우리가 유로존을 탈퇴하면 그리스는 망한다고 얘기했고 시리자조차 우리가 유로존을 떠난다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공산당조차 먼저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된 다음에 유로존을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판이다. 좌파 진영 내에서는 안타르시아를 빼면 누구도 유로존 탈퇴를 말하지 않았다. 결국 총선 기간에 은행 노동자들의 파업은 실현되지 않았다. 파업을 호소하는 세력이 소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2차에 걸친 선거 기간 중 그리스에서 총 1백억 유로의 자금이 빠져나갔다. 부자들이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시리자 같은 좌파들이 여전히 우세한 상황에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적 유럽연합’ 요구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 물론 나는 유럽 노동자들이 단결하는 것을 지지하지만 그보다는 전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을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나에게 최상의 구호는 ‘사회주의 유럽연합’도 아닌 ‘전 세계 사회주의 연합(연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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