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노동계급” 지난해 공공운수노조 총력 투쟁 결의대회. ⓒ이윤선

정치인·언론인·학자 들은 계급이란 무엇인지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회가 엘리트, 중산층, ‘노동귀족’, 서민, ‘프레카리아트’ 등 다양한 ‘계급’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다르다고도 말한다.

집과 자가용이 있는지 없는지, 외식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 같은 기준으로 계급이 나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을 사회적 생산에서 나타나는 사회 관계라고 규정한다.

칼 마르크스는 공장이나 사무실 같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계급이 지배계급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공장 등을 그저 갖고 있기만 해서는 돈을 벌 수 없다. 지배자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해, 노동 생산물의 가치보다 더 적은 돈을 임금으로 지불해서 이윤을 만들어 낸다.

노동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것 말고는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다.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는 서로 대립한다.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에게서 가치를 최대한 많이 뽑아내려 하지만 노동계급은 보통 이에 반대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대립과 갈등이 계급사회의 핵심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제까지의 역사는 모두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계급투쟁은 소소한 일을 둘러싸고도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업무 중 휴식 시간이나 구내 식당의 위생 상태 같은 문제를 두고 일어날 수 있다.

노동자들은 이런 투쟁을 발전시켜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고용 형태, 소득 수준, 소비 취향에 따라 계급을 구분하는 관점은 노동자들에게 이런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물론 유력한 사람들과 연줄을 맺거나 소위 ‘고급’ 문화를 즐기는 것은 계급과 아무 상관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계급 분화의 결과이지 계급을 규정하는 근본 요소는 아니다.

독일 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는 1965년에 생활 양식 변화로 노동계급이 변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좋은 옷, 음식으로 꽉 찬 냉장고, TV 세트, 자동차, 집 같은 것들을 가졌거나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현재 체제를 타도하는 것이 그리 중요할까?”

프랑스 사상가 앙드레 고르는 최근 한국에도 출판된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책에서 자동화, 직무 분담 등 때문에 계급 분할의 본질이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전통적 노동계급”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고정불변?

그러나 계급은 언제나 고정불변의 형태를 띠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생산의 지속적 혁신과 그에 따른 고용 형태 변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태생적 특징이다.

19세기 초 방적기가 물레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방적기도 새로운 생산수단에 의해 대체됐다. 오래된 산업이 쇠퇴하고 새로운 산업이 성장했다.

그러나 생산수단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여전히 소수가 다수를 착취했다. 노동계급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많아졌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는] 이제껏 고귀했던 모든 직업의 후광을 벗겨 냈다. 자본주의는 물리학자, 변호사, 신부, 시인, 과학자를 임금노동자로 바꾸었다.”

이런 변화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