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일본 정부는 재정 적자 해소와 서비스 향상을 이유로 공기업이었던 일본국유철도(국철)을 7개의 JR(Japan Railway)로 분할 민영화했다.

국철 민영화는 우파 인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이 추진한 공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미 1970년대부터 국철 당국과 일본 정부는 구조조정을 실시해 ‘적자선’을 무더기로 폐지하고, 인력을 감축했으며, 전투적인 노동조합을 탄압했다.

또한 ‘국철의 막대한 채무, 비효율적인 운영, 낮은 생산성, 강성노조의 잦은 쟁의 때문에 민영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부었다. 일본의 주류 우파 언론들은 정부의 말에 발맞춰 민영화를 찬양했다. 민영화 후 JR이 흑자를 기록하자, 일본 정부는 철도 민영화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주장은 명백한 기만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가 줄곧 강조했던 국철의 막대한 적자는 사실 정부 탓이었다. 일본 정부는 국철이 독립채산제라는 이유로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국철의 철도 건설 사업에 국고부담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실제로 1964년에 개통된 신칸센 건설 비용 3천3백억 엔은 국가의 보조금 없이 오로지 국철이 낸 빚으로만 조달됐다. 이런 탓에 1963년까지만 하더라도 흑자를 기록하던 국철은 부채가 8천3백억 엔으로 급증하면서 엄청난 적자와 이자까지 감당해야 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1964년에 국철로부터 건설권을 인계받아 일본철도건설공단이라는 별도의 공기업을 만들었다. 명목상으로 철도공단은 지방 철도를 효과적으로 확충하려고 설립됐다. 그런데 여기에 이권을 의식한 정치인, 관료, 건설업자들이 개입하면서, 공공성은 등한시한 채 불필요한 지역에 철도가 건설되는 사례가 자주 발생했다.

어떤 선로들은 개통한 지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폐업이 될 정도였다. 또한 1973년 오일쇼크 이후에 일본 정부는 경기부양대책으로 무책임한 신선 건설을 강요했다.

그런데 문제는 국철이 차지하는 여객수송 점유율이 1950년대 이후로 계속해서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일본 정부는 방만한 정책을 내세우며 신선 건설을 밀어붙였다.

이렇게 건설된 선로들의 건설 비용을 일부 부담하고 운영까지 해야 했던 국철로서는 당연히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새로 건설한 선로들을 국철이 인수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국철의 전투적인 노동조합이었던 국철노조(국노)는 “국철 경영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일본 정부의 정책적, 제도적 결함에 있다”고 비판했다.

노조 탄압

사정이 이런데도 국철 당국은 국철의 적자를 노동자들에 전가하며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국철 사측은 1965년 이래로 정리해고를 계속했다. 또한 생산성을 높이겠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통제를 강화하고 노동강도를 증가시키고자 했다.

국철이 설립된 1949년 이래로 국철의 노동자들은 공공부문의 노동자라는 이유로 단체행동권을 박탈당했고, 단체교섭권도 크게 제약을 받았다.

국철의 전투적인 노동조합이었던 국철노조와 국철동력차노조(국철동노조)는 이러한 시도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국철노조는 투쟁을 통해 단체교섭권을 얻어 내는 한편, 연공서열제와 종신고용제를 보장받았다.

1969년부터는 국철동노조와 함께 국철 당국이 추진한 ‘생산성 향상 운동’에 반대하는 격렬한 투쟁을 전개해 국철 사측이 개혁을 포기하게끔 했다. 국철노조가 전투적으로 행동하던 당시에는 열차의 시간표를 노조원이 정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강력했던 철도 노동운동은 정권과 사측에 눈엣가시가 됐다. 1975년 국철노조는 파업권을 얻어내려고 국철동노조와 ‘파업권 파업’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국철노조 지도부는 다른 산별노조와 연대하지 않았고, 다른 노조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또한 준법투쟁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투쟁을 좀 더 급진적으로 이끌지 못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측은 노조에게 손해배상 202억 엔을 청구하고, 조합원 수천 명을 해고하거나 징계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국철 개혁’을 위해서는 노조의 힘을 파괴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70년대에 국철노조의 조합원은 25만여 명으로 국철 내에서 가장 많았을 뿐만 아니라, 좌파노총이었던 ‘총평’에서도 매우 강력한 조직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국철노조를 약화시켜 노동운동과 진보진영 전체를 약화시키려고 JR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실제도 나카소네는 민영화 이후 “총평을 붕괴시키려고 생각했다”며 공공연히 발언했다.

시그러나 국철노조는 1980년대 내내 민영화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국철노조와 국철노조가 배타적으로 지지한 사회당과의 관계가 끼어있었다. 국철노조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역량을 사회당에게 맡기고 경제투쟁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사회당의 우파 지도부는 민영화를 전면적으로 반대하다가, 국철노조를 팽개치고 정부와 협상을 통해 주식회사로의 전환과 국철노조 투쟁 방침의 수정을 합의했다. 이때 즈음 국철노조는 민영화에 반대하는 대국민 서명을 3천5백만 명 이상 수합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국철노조 조합원들은 민영화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서로 갈등만을 빚었다. 급기야 민영화 찬성파는 국철노조를 탈퇴하고 새로운 철도노조를 세워 정부와 독자적으로 민영화를 합의했다.

그러나 민영화 반대파도 공산당계, 사회당 좌파계, 신좌파계 등으로 나뉘어 전혀 힘을 뭉치지 못했다. 분열 후 국철노조는 정치적인 힘을 크게 잃어 정부와 사측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국철동노조는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며 민영화 반대를 철회하고, 노조원 우선채용을 조건으로 일본 정부와 민영화에 합의했다. 우파노총이었던 동맹(도메이)의 철도노조는 정부의 민영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국철노조가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상급단체인 총평의 지원이 절실했지만, 당시 총평은 동맹과 조직을 합치는 문제로 매우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으므로 국철노조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결국 정부는 총평과 국철노조를 배제한 채 민영화를 감행했다.

민영화 후 국철노조는 조합원 20만 명 이상이 탈퇴해 군소노조로 전락했다. JR이 민영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선별채용하면서 ‘국철노조 탈퇴’를 재고용 조건으로 명시했기 때문이었다.

국철의 몰락은 말 그대로 일본 노동운동의 전투성 몰락을 의미하는 지표였다. 현재도 JR 내에서 국철노조 조합원들은 노조 배지도 달지 못할 정도로 탄압을 받고 있다.

또한 노동자들이 7만 명 넘게 해고되면서, 남은 JR 노동자들은 잔업과 승무시간 증가 등의 노동강도 강화에 시달리고 있다. 시설 관리나 정비에 소홀해지면서 국철 시대보다 사고 건수도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국철이 해산되면서 남긴 28조엔라는 막대한 부채는 오늘날까지도 재원 마련이 되지 않아 여전히 국민의 몫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