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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병역거부 소견서:
나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다

사회운동 활동가인 김무석 씨가 병역을 거부하면서 그 소견서를 〈레프트21〉에 보내왔다. 이 소견서는 병무청과 병역거부캠페인 단체 '전쟁없는세상'에도 함께 보냈다고 한다.

현역입영예정일인 6월 24일 오후 2시, 난 훈련소에 가지 않았다. 나는 모든 억압과 착취, 불평등과 부정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로서의 신념에 따라 이런 결정을 내렸다. 나는 이 소견서를 통해 내 신념을 밝히고자 한다.

교과서에선 모든 사람들에게 ‘국방의 의무’가 부과된다고 가르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와 가족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군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군대를 가야 한다고 말하고,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비겁한 일로 여겨진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겉모습만 봐선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어떤 껍질은 외부로부터 내용물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내용물을 가두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군대는 어떠한가? 이 나라의 군대는 정말 평범한 민중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평범한 민중을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계급으로 나뉜 자본주의에서 군대는 소수 지배자가 다수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하기 위한 대표적인 억압 기구라고 생각한다.

박정희의 군대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1964년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미국의 민족 억압과 학살을 지원했다. 1979년 10월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항거해 부마항쟁이 벌어지자 군대는 대검을 들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을 진압했다.

전두환 시절 군대는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켰고, 1980년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 5.18 광주 항쟁 당시 발포해 시민들을 학살한 것도 이 나라의 군대였다.

이런 일들이 군사정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군사 정권이 끝난 뒤에도 군대의 역할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이 나라의 군대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동원됐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수십만 명을 학살했고,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난민으로 만들었다. 2006년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고 평화를 요구한 평택 대추리 주민과 활동가 들의 목소리는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혔다.

강제로 동원되어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사병들은 또 다른 희생자들이었다. 이처럼 군대는 평범한 민중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소수 권력자들의 도구로 활용돼 왔다.

지배계급의 도구

자본주의 체제의 권력자들이 군대를 이용한 목적은 두 가지였다. 지배자들은 자국의 민중들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한 타국과의 군사적 패권 경쟁을 위한 수단으로 군대를 이용했다.

지배자들은 동의와 설득으로 지배를 유지하려고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군대·경찰·감옥과 같은 억압기구를 필요로 한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이 폭력이 노골적으로 전면에 드러났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민중이 벌인 투쟁으로 이 억압기구들이 뒤편으로 물러나긴 했다. 그러나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 진압에 군대가 투입된 것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점거 파업에 경찰 특공대가 투입된 것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배자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늘 폭력과 억압에 의존해 왔다.

지배자들은 지정학적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도 군대를 활용한다. 베트남과 이라크에 파병된 군대는 미국의 학살과 점령을 도왔고, 이 나라의 지배자들은 파병을 통해 제국주의적 영향력을 키우려 했다. 지배자들의 한미동맹 전략은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첨단무기가 동원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에 참가했고,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추진하는 미사일방어체제(MD)에 참여할 절차를 밟고 있다. MD 참여는 이 나라가 미국과 중국의 군사적 갈등에 더 쉽게 휘말리는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 있다.

미국 패권 강화의 발판이 될 제주해군기지는 건설 과정부터 주민들을 탄압해 ‘제주해적기지’라고 불렸다. 주민과 활동가, 성직자 들에게 가해지는 경찰들의 폭력은 용인됐고,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연행되고 벌금을 물고 구속됐다.

난 이처럼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의 세계 패권전략을 뒷받침하고, 자국의 민중을 억압하는 데 이용되는 이 나라의 군대에 입대하기를 거부한다.

무고한 젊은이들을 억압하고 희생시키는 군대

부와 권력을 독점한 권력자들은 소수기 때문에 군대는 압도 다수인 노동자와 민중의 자녀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지배계급은 군대를 통제하기 위하여 상명하복의 억압적 위계질서를 적용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2013년 1월 30일 발표된 ‘군 인권실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8.5퍼센트의 응답자가 구타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탈영 또는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병사는 34.6퍼센트였으며, 5년 간 실제로 자살한 군인의 숫자는 3백68명이었다.

최근 군대 내에서 가혹행위로 자살한 경우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결정이 있었지만, 이미 무고하게 희생된 젊은이들의 삶은 어떤 것으로도 보상해줄 수 없다.

‘국방의 의무’를 준수하라고 앞장서 요구하는 권력자들은 역겹게도 정작 자신들의 자녀는 어떻게든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 한다. 2004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신의 아들과의 전쟁’편은, 진짜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군대가 자신의 의무가 아니라는 것을 폭로했다.

권력층과 부유층, 예를 들면 재벌가의 병역 비리는 강력한 권력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건드릴 수 없었고, 과거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병역비리 군·검 합동수사도 결국 내부 권력 – 기무사와 군·검찰 – 이 좌절시켰다는 것이다.

지배자들은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군대와 안보 논리를 정당화해 왔다. 그러나 북한 지배계급과 남한 지배계급은 서로 적대적 경쟁을 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정당화 해 왔다. 반면 북한의 평범한 젊은이들과 남한의 젊은이들은 그 과정에서 모두 희생되고 억압받는다. 두 국가가 젊은이들을 군대에 동원하는 논리는 거울을 두고 마주보는 것 같이 똑같다. 김정은 정권의 이해관계를 위해 젊은이들을 희생시키는 군대와 박근혜 정권의 이해관계를 위해 젊은이들을 희생시키는 군대는 별로 다르지 않다.

신념을 지키기

지금까지 평화주의적, 종교적, 정치적 신념에 의해서 병역을 거부해 온 사람들이 1만 7천여 명에 이른다. 각자의 신념은 달라도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감옥을 선택했다.

나 또한 신념에 따른 행동으로 감옥에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감옥에서 군대보다 더 큰 억압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과,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사회적 차별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따라서 ‘감옥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지 군대인가 감옥인가 하는 선택을 넘어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하는 질문과 마주치는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 삶의 목표가 이 체제가 강요하는 경쟁과 생존의 논리에 타협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면, 이런 선택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삶의 목표는 부조리와 모순에 가득 찬 이 사회의 변혁에 기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 신념을 지키고 그에 따른 억압과 고통을 감내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겪을 모든 개인적 손해에도 불구하고, 신념에 따라 이 나라의 군대에 입대하길 거부한다.

2013년 6월 25일, 병역 거부를 선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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