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부상이 지정학적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의 부상이 어떤 의미고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 살펴보는 연재를 시작한다.


중국이 세계적 국가로 부상한 것은 더는 논쟁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부상한 중국의 성격을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서방 정부와 언론 들은 중국이 국방비 증가, 인터넷 해킹, 영토 분쟁으로 ‘정의의 사자’ 미국과 그 동맹들을 위협하는 지구 최고의 악당이 됐다는 황당한 주장을 종종 한다.

반면에, 좌파 내에서는 아직도 중국 국가에 우호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 제국주의와 그 동맹들에 반대하는 것에 동의하지만 일부 좌파가 중국을 두둔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1920년대 노동자 혁명이 실패한 이후 중국이 오늘날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쭉 살펴보면 중국 공산당과 국가가 자본주의 경쟁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뿐더러 미국 제국주의에 일관되게 저항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927년 노동자 혁명 패배와 공산당의 질적 변화

중국 공산당은 1927년 참혹한 패배로 노동계급 기반을 잃고 군사 투쟁에 주로 의존하는 스탈린주의적 중화민족주의 정당으로 변신했다.

1930년대 공산당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때 공산당은 한족 엘리트들의 민족주의를 ‘다시’ 흡수했고, 이들이 말하는 혁명은 중국에 강력한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하게 됐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문제가 되는 소수민족 정책의 변화를 낳았다. 원래 중국 공산당은 “만주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은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며 민족자결권을 옹호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중화주의 논리를 흡수했다. 1919년 “나는 대중화민국에 반대한다”던 청년 마오쩌둥은 “이 지역[티베트]의 국제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이 곳을 점령해야 한다”고 말하는 중화민족주의자로 변했다.

1949년 혁명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1949년 중국 혁명은 중국이 제국주의 열강과 지주들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위대한 혁명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공산당 고위 관료들이 자본축적을 강요하는 구실을 하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가 탄생하는 계기기도 했다.

중국 혁명은 민족주의 혁명이었지 노동자 혁명이 아니었다. 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벌이지 말고 자기 작업장에서 일을 열심히 일하라고 요구했다.

중국을 위협하는 서방 제국주의를 추월하겠다는 일념 아래 공산당은 1978년까지 중국을 전시 경제 체제로 운영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서방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국제 운동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을 쥐어짜 군사력을 강화하는 반동적 방식으로 대응했다.

예컨대, 1950년대 ‘영국 따라잡기’란 목표가 수정된 과정을 보자. 마오쩌둥은 1957년 11월에는 “15년 또는 조금 더 많은 시간 안에 영국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에는 “7년 안에 영국을 추월하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말했다가 그 다음 달에는 “영국을 따라잡는 데 … 2년이면 가능할 것이다” 하고 말했다.

미친 경쟁 논리 때문에 공산당 정부는 중공업 투자자금을 확보하려고 1979년대 말까지 임금을 동결하고 농촌의 ‘자급자족’(지원 중단)을 ‘장려’(사실은 강제)하는 극단적 긴축 정책을 폈다.

또, 공산당은 소수민족들의 자결권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소수민족 지역을 강제로 중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중화민족주의라는 것은 사실상 한족 우월주의였기 때문에 한족 관료들은 현지 정서를 무시하고 식민지 총독부처럼 행동했다. 

‘병단’이라는 대규모 군사 생산 조직이 주둔한 신장은 처음부터 점령지 분위기였다. 한족 관료들은 이곳에서 인구의 다수인 무슬림을 모욕하려고 쿠란을 불태우고 이슬람 사원들을 돼지 사육장으로 만드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엄청난 희생 덕분에 당시 중국은 높은 자본축적률을 달성하면서 약소국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60∼76년 중국의 누적 군비지출은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전통적 서방 열강보다 많았을 뿐더러 일본처럼 미국 군사력에 의존하는 나라에 견주면 거의 5배나 많았다.

중국 관료 지배자들은 이렇게 얻은 힘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62년 인도와 국경 분쟁, 1969년 소련과 국경 분쟁, 1974년 남베트남이 통제하던 남중국해의 시샤섬 점령, 1979년 베트남 침공 등 횟수로만 따지면 중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 다음으로 군사 충돌을 가장 많이 벌인 나라였다.

물론 이것은 중국이 미국 다음으로 호전적인 국가였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변국들의 군사 경쟁 압력에 중국 관료들도 미국 지배자처럼 대응한 것이 주된 원인 중 하나였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세계적 열강인 미국·소련 제국주의와 경쟁했기 때문에 주변 지역뿐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원거리에도 개입했다. 그러나 이때도 중국 외교의 목표는 세계 운동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가능하면 그 지역의 핵심국 정부와 손잡는 것이었다. 그 정부가 아무리 잔인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컨대, 중국은 1958년 이라크 혁명 이후 발생한 대중의 급진화를 막기 위해 카셈 정부가 운동을 탄압할 때 가만히 있었다. 심지어 1963년 이라크 혁명 물결을 완전히 파괴한 바트당 쿠데타가 발생해 이라크 공산당을 학살할 때도 중국은 쿠데타 정부를 바로 승인했다.

중동의 왕정 독재 정부들과 손잡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정책이 가장 기괴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이란 샤(국왕)와의 관계였다. 중국 공산당 내 제2인자 저우언라이는 유럽제 명품으로 치장한 이란 왕비를 환영하면서 ‘이란을 근대화시킨 샤는 중국의 마오쩌둥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 관료 지배자들의 강력한 경쟁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 국가의 지정학적 위치는 갈수록 불안정해졌다. 양대 초강대국이 대결을 벌이는 냉전 제국주의 구도에서 독자 노선을 추구하기에는 중국의 힘이 너무 어정쩡했다.

중국 경제는 정체하지 않았지만, 미국(과 나중에 소련의) 경제 봉쇄 때문에 거의 모든 물품을 국내에서 생산해야 했다. 이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세계시장에 편승한 동아시아의 친미 국가들에도 뒤쳐졌다.

또, 중국 군비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인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미국이나 소련에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결국 중국은 미국과 소련에는 밀리는 지역 열강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1970년대 초 중국 지배자들은 중요한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됐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 제국주의와의 관계

베트남 전쟁 패배로 위기에 빠진 미국 제국주의를 도운 덕분에 중국 국가자본주의는 군비 부담을 줄이면서 세계시장과 기술에 접근할 기회를 잡았다.

이것은 덩샤오핑보다 먼저 마오쩌둥 자신이 시작한 변화였다. 마오쩌둥은 베트남 민중을 3백만 명 이상 죽인 최고의 제국주의 열강과, 그것도 미국 역사상 가장 우익적인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리처드 닉슨과 손잡았다.

미국 처지에서는 베트남 전쟁 패배와 심각한 경제 불황으로 미국 제국주의의 위상이 흔들리던 상황에서 소련 진영이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견제해 줄 존재가 필요했다.

미국 레이건 정부 시절 국방장관을 지낸 케스퍼 와인버거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서태평양의 ‘중요 해상선들’을 통제하려면 중국의 구실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 서태평양에서 미국과 중국 해군이 경쟁을 벌이는 상황을 보면 이 말은 진정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중국 정부는 세계 곳곳에서 미국 제국주의를 돕기 시작했다. 이집트가 친미 국가가 됐을 때 이를 환영했고, 미국을 대신해 이집트의 독재자 무바라크에게 미그기 등 소련제 무기와 부품을 ‘선물’로 제공했다.

심지어 일본이 소련과 에너지 개발 협정을 논의하는 것을 보며 마오쩌둥은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에게 미일동맹을 더 강화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이것도 대단한 역사적 아이러니다.)

키신저는 툭하면 중국 정부가 “나토 동맹보다 낫다”고 농담을 하곤 했는데, 실제로 미국 제국주의가 베트남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 세계적 패권 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서 중국의 구실은 결코 작지 않았다.

물론, 중국 지도자들은 미국의 단순한 하위 파트너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타이완에 무기를 판매하거나 국교를 정상화하려 할 때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냉전 종식과 1991년 걸프 전쟁 전까지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전반적으로 좋았다.

냉전 종식 이후 중미 관계에서는 협력보다 갈등이 상대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소련이라는 공통의 적이 사라진 후 서로 지정학적 경쟁자로 (다시)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1990년대 일본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자 중미 관계는 악화했다. 미국 처지에서도, 중국 처지에서도 이제 진정한 장기적 위협은 일본이 아니라 서로가 됐다.

그러나 경쟁 방식은 냉전 때와는 달랐다. 중미 관계는 경제적 관계는 거의 없이 상호 봉쇄가 핵심이었던 냉전식 경쟁에서 벗어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고전 제국주의 시대 특징이었던 경제적·지정학적 협력과 갈등이 복잡하게 얽힌 형태를 닮아 갔다.

예컨대, 중국 관료들은 수출 공업단지에서 미국 기업들이 중국 노동자들을 학대하고 초착취하는 것을 기꺼이 돕는데 이것만 봐도 관계가 매우 복잡미묘함을 쉽게 알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2000년대 미국 부동산 거품이 낳은 호황과 테러와의 전쟁은 중국을 세계적 열강의 반열에 올리는 ‘질적 변화’를 낳은 계기가 됐다.

중국이 세계적 열강이자 미국의 진정한 지정학적 경쟁자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미국 자신이 제공한 것이었다. 특히 2000년대 미국 부동산 거품 호황 덕분에 중국은 세계 1위 수출국에 등극한 데 이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됐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략이 재앙이 되면서 미국 제국주의는 중국을 집중적으로 ‘태클’ 걸 여유를 잃었다. 오히려 북한과 이란 문제에서 중국의 영향력에 의존해야 했다.

중국 자본축적 과정이 진정으로 세계적 과정이 되면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전략적 사고도 변했다. 폐쇄적 국가자본주의일 때 중국은 소수민족 지역, 중동, 아프리카, 동아시아와 유럽, 라틴아메리카에서 주로 지정학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지역들은 수출 시장, 원료 공급지, 첨단 기술과 자본의 도입처이자 투자처가 됐다. 중국 자본주의가 세계와 맺는 관계는 훨씬 복잡해졌고 얻을 수 있는 이득뿐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위험도 더 커졌다.

중국이 아프리카 정부들에 돈과 무기를 지원하고, 유엔군의 깃발 아래 전 세계로 군대를 파견하고, 상하이협력기구와 브릭스 회의를 주도하고, 대양 해군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이런 변화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패권 국가인 미국뿐 아니라 일본과 서유럽 국가 등 기존 선진 자본주의 열강과의 관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면서 세계 제국주의 경쟁 구도를 뒤흔들고 있다.

이런 중국의 부상이 기존 제국주의 체제에 어떤 균열을 낳고 있고 그것이 세계와 특히 동아시아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다음에 다룰 것이다.